페터 한트케 긴 이별 짧은 편지/상처가 영광이 되길 바라(feat.김애란의 잊기 좋은 이름, 스티븐 킹, 이은대, 박종혁, 카프카, 김종원)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에 대한 리뷰를 해보고자 하는데요. 페터 한트케의 상처어린 과거가 노벨문학상의 재료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김애란, 스티븐 킹, 이은대, 박종혁, 카프카, 김종원의 이야기를 콜라보해서 포스팅해 보고자 합니다.
1
김애란은 나보다 젊은 작가였다.
80년대생이었다.
'신은 참으로 불공평하구나! 젊은 작가가 이렇게 글을 잘 쓰다니'
그런 생각이다.
『젊은작가 수상작품집』을 두어권 읽었는데, 나는 이제 ‘젊은 작가’에 들어갈 수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세월은 구약성경의 표현처럼 ‘장사의 쏜 화살처럼’ 스피드하게 흘러가는구나 싶다.
2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 보면 그는 ‘형용사’나 ‘부사’의 사용을 굉장히 배제하거나 꺼린다. 주어와 동사로 모든 문장을 완벽하게 기술할 수 있는 단문, 간결함, simplicity를 추구했다. 거추장스럽거나 아니면 군더더기가 많이 장식된 문장과 단어를 극도로 자제한다는 의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쓰는 문장에는 얼마나 많은 수사여구와 부연설명하는 품사들이 많은가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문득 우리의 삶을 생각해볼 때, ‘존재’를 주어라고 하고, ‘삶(살아냄)’을 술어라고 했을 때, 그 안에 들어가는 수많은 품사들과 단어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주어와 술어 사이에 등장하는 무수한 컨텐츠들...‘존재와 삶(인생)’이라는 카테고리 안에는 수많은 것들이 들어가거나 빠지거나 삽입되거나 추가되거나 삭제되고 생략되기도 한다. 돈, 명예, 권력, 직업, 결혼, 자녀, 승진, 실직, 이혼, 파산, 연애, 인간관계 등. 작가 김애란은 스티븐 킹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부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말言이 말言을 바라보는 느낌.
부사는 마음을 닮은 품사다.’(김애란, 89p)
주어와 술어, 주어와 동사 사이에 들어가는 ‘부사’에 대해 애정을 듬뿍 담은 김애란의 말들이 흥미롭다. 품사 가운데 애정을 유독 가진 품사가 내게 있을까? 언어에 대해 많은 생각과 사유가 있었던 작가이기에 그런 고백을 한 것이 아닐까?
3
‘글을 쓸수록 아는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쥐게 된 답보다 늘어난 질문이 많다. 세상 많은 고통은 사실 무수한 질문에서 비롯된다는 걸, 그 당연한 사실을, 글 쓰는 주제에 이제야 깨달아간다. 나는 요즘 당연한 것들에 잘 놀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려 한다.’(124p)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을까? 만권을 읽을 수 있을까? 『강안독서』의 저자, 이은대가 그런 이야길 했던가! 독서노트의 메모가 어디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요즘 글을 쓰는 것도 힘든데, 이것 찾고 저것 찾고 할라믄 오히려 글쓰기의 줄기가 휘어지고 시들어질 듯 해 그냥 내버려 두련다. 아무리 많은 책을 쓰고, 아무리 많은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뿐이기에 우리의 한계와 유한함을 날마다 인식하며 ‘무지의 지’를 소유하고 유지해야 더 겸손해지지 않을까 싶다. 나의 ‘무지의 지’를 유지할 때 일상은 언제나 순전한 깨달음으로 경이롭지 않을까 싶다.
4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문장 안에 살아오는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문장 안에 시선이 머물 때 그 ‘머묾’은 ‘잠시 산다’라는 말과 같을테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사는 동안 읽는 글이니 그렇고, 글에 담긴 시간을 함께 ‘살아 낸’거니 그럴거다.’(141p)
김애란은 ‘자신이 읽은 문장이 아닌 산 문장’이란 표현을 쓴다. 우리가 독서를 하며 글자를 읽고 판독하는 것은 단순한 to read의 의미가 아니라 to live의 의미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to read가 아니라 정말 to live의 독서가 된다는 것은 그 작품속에 녹아나는 체험일 때 가능할 것이 아닐까? 우린 독서를 하면서 잠깐 그 문장과 단어와 그 텍스트가 뿜어져내는 모든 배경background 속에서 ‘잠시 머물다’가 빠져 나온다. 단순한 읽는 행동이지만, 단지 간접적인 체험 행위에 불과하지만, 그 독서가 ‘머묾’의 체험이 되어진다는 말. 몇 십분, 몇 시간을 투자하여 잠시 다른 세계와 다른 시공간에 머물다가 오는 행위는 ‘독서’만한 것이 있을까? 멀티미디어도 그런 역할을 하겠지만, 거기에 ‘상상력의 부재’, ‘상상력의 결여’가 있음을 기억하자. 독서만이, 텍스트를 읽는 것만이 ‘상상력’을 키워주는 행위임을. 그냥 좋은 문장이라 몇 마디 한다는게 글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표류하는 느낌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오늘은 이렇게라도 글을 적어야겠다 싶어 노트북을 펼친 것이니 이해해주길 바라!
5
‘인간의 심연을 ‘신神도 들여다 볼 수 없는 골짜기’(161p)’
라고 김애란은 표현한다. 이 표현이 참 좋다. ‘신도 들여다 볼 수 없는 골짜기’가 바로 ‘인간의 심연’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갈래가 여러 갈래라서 어떻게 표현하기가, 형언하기가 힘든 공간이다. 그 마음에 천사가 존재하기도 하고, 악마가 존재하기도 한다. 죄와 벌이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 마음은 세계를 일으킬 수도 있고 세계를 무너지게 만들 수도 있다. ‘신도 들여다 볼 수 없는’이란 말에 인간 고유의 고독하고 외롭고 혼자서 사수할 수 있는 깊은 갱도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정신적, 영적인 갱도 말이다. 하지만 그 골짜기 안에 너무 고립되어 있으면 인간은 정말 헤어나올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어쩌다 읽게 된 『30억 빚을 진 내가 살아가는 이유』에서 저자 박종혁은 이런 이야길 한다. 그는 38세에 30억 빚을 진 인물이다. 20대부터 자동차딜러로 사업을 확장하다가 모자쇼핑사업도 망하고, 대리운전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이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빚을 갚고자 일하는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책을 많이 읽어서 글을 쓴 인물이 아니다. 그냥 자신의 삶의 생채기를 있는 그대로 토해낸 글이라 더 공감이 간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진정한 친구 단 한명만 사귀어도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나는 내가 친했다고 생각한 사람이 나에게 등을 돌리기도 모자라 비난하는 것을 경험했다. 반면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내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었다. 연이어 발생한 상황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걸러졌다.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 마음이 닫히고 열리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지금 내 주위에는 나를 살아가게 해주는, 어쩌면 생명의 은인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내가 벌인 일이니 빚을 갚고 살아가는 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내가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시간을 나 홀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건네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살아가는 동력이 되고, 그 파급력은 생각보다 컸다.’(박종혁, 224p)
‘신도 들여다볼 수 없는 골짜기’라는 말을 생각해보니 문득 카프카의 『변신』이 떠오른다. 그 작품의 주인공 그레고르는 가족을 위해 뼈빠지게 고생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결국 흉물스러운 괴물, 벌레로 변해버렸다. 김종원의 『사색이 자본이다』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한다.
‘독일어로 벌레(Ungeziefer)라는 단어는 기생충이라는 의미이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해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에게 없애야 할 기생충 취급을 당했다. 작가인 카프카 역시 그레고르와 닮은 삶을 살았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자립하지 못한 채, 부모에게 얹혀 세상과 고립되어 살았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그와 아버지의 관계가 마치 주인과 노예를 보는 것 같았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기생충 같은 삶을 살았다. 결국 변신 후에 가족에게 학대받는 그레고르의 일생은 작가인 카프카의 인생과 닮아 있다.
그가 작품을 통해 세상에 하고 싶었던 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역으로 카프카를 살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보면 된다. 바로 상처다. 그가 위대한 작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안에 빛나는 상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고통 그리고 가족 안에서도 언제나 고독했던 삶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자신의 상처를 받아들이며 비로소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글쓰기라는 도구로 자신의 상처와 세상의 모든 상처를 연결시켰다. 세상에 상처 없는 사색은 없다. 그는 자신의 글로 세상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상처를 숨기지 말고, 세상에 당당하게 내보이라. 사람은 상처를 통해 성장하는 거니까. 사색이란 결국 나의 상처와 세상의 상처를 통해 이뤄지는 거니까.”(김종원, 191-192p)
작품의 주인공 그레고르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지만, 작가 카프카는 『변신』의 그레고르를 세상에 표현해냄으로 상처를 덜어낸 결과가 된 셈이다. ‘신도 들여다볼 수 없는 골짜기’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상처가 아닐까? 남에게 내보일 수 없는, 도저히 끄집어낼 수 없는 상처! 하지만, 그 상처는 끄집어내는to drag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걸 앞에서 이야기한 텍스틀 읽는 것은 ‘머묾’, ‘잠시 산다’는 말로 이해했는데, 조금 더 확대하자면, to read는 to live가 되고, to live는 다시 to drag가 되어야 한다는 걸로 나아갈 수 있겠다. 내가 독서를 통해 작품을 읽으면서 잠시 간접적인 경험과 체험을 통해 그 작품 속에 머물지만, 그 ‘잠시 머묾’은 내가 망각했고 잊혀졌던 모든 상처와 트라우마와 콤플렉스와 신조차 건드릴 수 없는 골짜기를 체크하고 드래그해내는 것이다. 그게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우리가 독서를 하면서 그런 경험 있지 않은가! 저자의 체험이나 작가의 작품을 통해 내가 경험한 그 어떤 무언가가 교집합처럼 만났을 때 우리의 영혼에 미세한 울림의 신호가 온다. 그리고 그게 더 나아가면 to drag의 순간(momentum)이 되는 것이다.
김종원의 “상처를 숨기지 말고, 세상에 당당하게 내보이라. 사람은 상처를 통해 성장하는 거니까. 사색이란 결국 나의 상처와 세상의 상처를 통해 이뤄지는 거니까.” 이 말은 참 공감되는 대목이다. 쉽지 않은 것이지만, 인생은 그런 쉽지 않은 과제task를 해결하면 또 나아갈 수 있고, 해소되면 전진할 수 있고 그런 것이 아닐까!
6
‘한때 크고 좋은 말들을 가져다 아무 때고 헤프게 쓰는 정치인들을 보며 ‘언어약탈자’라 생각한 적이 있다.’(김애란, 263p)
‘언어약탈자’...진짜 멋진 말이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규모와 행태를 지지하고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데 그게 ‘언어약탈자’의 작태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언어의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언어를 욕되게 하진 않는지. 뭐 언어숭배자가는 아니지만. 그런 생각...주절주절 해 본다.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경청이, 공감이 아슬아슬한 이 기울기를 풀어야 하는 우리가 할 일이며...그 때 우리가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다는 건 수동적인 행위를 넘어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될 것이다....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과 불행을 구경하는 것을 구분하고, 악수와 약탈을 구별해야 하는 까닭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김애란, 269p)
7
김애란이 영화 <서편제>이야길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눈먼 송화가 산간 벽지에 들어가 매일 <심청가>를 연습하는 장면을 보자 얕은 탄식이 나왔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데, 아무도 청하지 않는데, 스스로 어떤 수준에 도달하고자 하는 수준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 어쩌면 거기에 문학의 앞날이 조금은 겹쳐 보여 그랬는지도 모른다.’(272-273p)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데, 아무도 청하지 않는데, 스스로 어떤 수준에 도달하고자 하는 수준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그런 모습이 인생에게 필요하다. 김애란이 이야기한 ‘문학의 앞날’도 그러하지만, ‘우리 인생의 앞날’도 그러해야 하리라. 나를 비롯한 요즘 세대와 시대가 너무나 얄팍한 명성과 인기에 목매어 정말 진득한 깊이를 가지지 못한다면, ‘신도 들여다 볼 수 없는 골짜기’의 상처, 나의 상처는 끄집어낼 수 없는 것이다. 언제나 그 골짜기는 ‘깊이 내려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기에 얄팍함으로 어림도 없는 것이다. 우리의 상처가 우리가 영광이 되려면 말이다.
8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 짧은 편지』를 오랫동안 읽었다.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었다. 분량이 길어서가 아니라 스토리의 전개나 문체가 그러했다. 아마도 이런 스탈의 글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페터 한트케의 작품을 읽고 작품해설을 읽으면서 그의 일생을 들여다보면서 그의 문학적인 스타일에 조금은 공감하게 되었다.
페터 한트케는 1942년 오스트리아 작은 마을에서 아들을 낳았다. 당시 2차 세계대전 당시 한트케의 어머니는 경리장교와 사랑에 빠져 페터 한트케를 가졌지만, 그는 이미 유부남이었다. 사생아를 낳게 할 수는 없다는 집안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어머니, 그러던 중에 그녀에게 강한 연민의 정을 느낀 하사관 브루노 한트케가 그 모든 조건을 감수하면서 그녀와 결혼식을 올린다. 이런 가정배경이 페터 ‘한트케’의 예사롭지 않은 운명을 예견했다. 아니나 다를까 1971년 페터 한트케의 어머니는 51살에 자살하고 만다. 불행했던 결혼생활과 인생살이의 어머니, 페터 한트케도 그러한 음울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스토리라인이나 컨텐츠에 집중하기 보다는,
“문학의 존재 근거는 언어 그 자체이지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인식에 있지 않다.”(페터 한트케, 206p)
고 했다. 한트케의 초기 사상적 토대였던 러시아 형식주의, 언어의 관계성에 주목한 프랑스 구조주의, 언어의 유희성을 강조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이 있다. 세계대전의 큰 재앙은 철학사와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의미’ 찾기 보다는 오히려 ‘형식’, ‘언어’ 그자체에 집중하는 분위기는 철학뿐 아니라 페터 한트케 개인 가정사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은 분명하다. 순전한 내 생각이고 내 해석일 뿐이다. 하지만, 그 페터 한트케의 ‘신도 들여다 볼 수 없는 골짜기’가 그를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상을 받기 위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to drag하려고 몸부린 친 결과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과연 상처가 영광이 될 수 있도록 처음부터 글을 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최근에 읽은 책들 내용을 기억하다가 보니 이것저것 끄적였다. 내 상처가 영광이 되진 않더라도, 내가 살아가고 숨을 쉬기 위해서라도 글쓰기는 계속 되어야할 것 같다.
여러분도 그렇게 살고 쓰기를 바라. 마침내는 ...상처가 영광이 되길 바라~
오늘은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의 리뷰와 함께 작가의 인생을 살펴보았고 김애란, 스티븐 킹, 이은대, 박종혁, 카프카, 김종원의 글을 인용해 가면서 '상처가 영광이 되길 바라'라는 주제로 글을 포스팅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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