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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의 또 다른 '시'-시는 그냥 줍는 것이다

탐독: 탐서/시와 케렌시아

by 카알KaRL21 2022. 2. 2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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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시집

 

나태주의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는 시라는 제목의 시가 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짤막한 감상을 남기고자 합니다. 이 시는 너무나 유명해서 할 말이 따로 필요없는 시이기도 하다.

 

 

 

<시>

 

 



그냥 줍는 것이다


길거리나 사람들 사이에
버려진 채 빛나는
마음의 보석들.


 

 

 

 

 

나태주의 또 다른 '시'에 대해 생각하다

이 시를 보니 너무 짧아서 반가웠다. 내 포스팅도 좀 짧으면 사람들이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다. 내가 블로그 주인장인데, 내 블로그를 떠날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일본의 하이쿠라는 쟝르가 있는 것으로 안다. '일본 고유의 단시형. 5·7·5의 17음(音)형식으로 이루어'지는 하이쿠는 읽어보면 감성적으로 톡톡 튀는 느낌이 있다. 물론 나태주의 시와 유사한 맛은 아닌 듯 하다. 짧다는 느낌이 하이쿠가 생각이 났다는 것 뿐이다.

 

 

 

시는 그냥 줍는 것이다?

시인 나태주는 시는 시인의 어떻게 대단한 것을 획득하고 전리품을 성취하듯이 챙겼다기 보다는 그냥 줍는다고 했다. 시는 시인이 줍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 왜 일반인은 왜 줍지 못하는 걸까? 내가 생각할 때 모든 사람들은 다 시를 줍는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줍는 것이 시인지도 모르고서 말이다. 그걸 알고 알지 못하고 차이일 뿐이다. 우리가 흔히 '생활의 발견'이라는 말을 쓰는데, 시도 '생활의 발견'이 필요하지 않을까? 삶을 다 똑같이 24시간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은 시를 발견하여 금을 줍듯이 줍지만, 어떤 사람은 시를 줍지 못한다. 왜 그런가? 그게 꼭 시라고 이름 붙이지 않아도 삶 가운데 잔잔한 파고와 여운이 있다면 그게 바로 시를 줍는 것이다.

 

 

 

 

시를 줍지 못하는 이유는 관찰의 힘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 왜 우리는 시를 줍지 못하는가? 그것은 '관찰의 힘'이 부족하고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레미 리프킨이었던가? 그 양반이 '패러다임paradigm'이란 말을 썼는데, 우리가 가진 패러다임, 일종의 worldview, point of view가 왜곡되거나 굴절된다면 영원히 우리의 삶에서 시라는 요소를 주을 수 없을지 모른다. 너무나 가혹한가? 문명의 이기에서 완전히 단절된 원시인이 문명사회의 종이조가리에 불과한 지폐의 가치를 알 수 있겠는가? 너무 열악한 대조와 비교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비유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시를 줍기 힘든 시대의 트렌드, 시를 대체하는 이미지 과부하의 시대

'관찰의 힘'에 대해선 이전에 글을 한번 쓴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때 무라카미 하루키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을 많이 했지만, 절대 여행을 가서는 사진, 인증샷 같은 것을 멀리한다고 한다. 그는 여행에 간 경험과 체험을 온전히 오감으로 받아들이고나서 여행에 돌아오면 그것을 글로 표현한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사진 한장이라도 있으면 더 여행기가 빛날 것 같지만,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이야길 들었다. 작가 마크 트웨인도 여행기를 적을 때, 그 당시에 사진기가 제대로 있었겠는가 마는. 그는 여행에서의 모든 순간순간을 기록으로 소화하는데 글이 주는, 기록이 주는 현장감이 어마무시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굳이 '매의 눈'이라는 표현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관찰의 힘'이 주는 강력한 맛은 사뭇 다르다. 그런 측면에서 이미지가 우리의 오감을 많은 부분에서 거세시키는 메커니즘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이고, 사진의 시대이다. 모든 것을 구현해버리고 비쥬얼화시켜 버린다. 아무리 장황한 글과 멘트가 있다고 해도 비쥬얼 하나가 거창하면 모든 것을 압도해 버리는 시대이고 트렌드이다. 이런 상황에 과연 시를 줍는 것이 가능할까? 하루에도 수많은 인구, 수많은 스마트폰 유저들이 사진과 이미지를 양산해낸다. 사진으로 포화상태가 될 수 있는 지구촌의 온라인 시장이다. 그 가운데 우리가 건진 시는 얼마일까? 우리가 건진 유의미는 얼마일까? 

 

 

 


길 거리나 사람들 사이에서
버려진 채 빛나는 
마음의 보석들.

 

 

무엇을 줍고 무엇을 버리는가?

우리의 일상을 스치고 지나는 것, 무수한 것들의 의미와 가치를 우리는 재발견하기 보다 그냥 소모하고 지나쳐간다. 그래서 일상이 시가 되기 보다 쓰레기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우리가 사용했던 블로그에 무수한 이미지들을 넘치고 넘쳐 또 소비하고 또 버리고 또 소비하고 또 버리고...나도 이미지를 좋아하고 사진찍는 걸 좋아해서 한때 분에 넘치는 DSLR을 구매해서 출사도 몇 번 나선 적이 있다. 나는 여기서 사진의 무용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의 인생의 배경과 그 속에 머무는 사람들과 일상들 속에 필요없다고, 쓸데없다고, 소용없다고 '버려진 채' 폐기처분해야 할 요소들이 오히려 시인의 눈에는 '빛나는 마음의 보석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시인은 하고 있다. 


우리가 매일 모으고 있고 수집하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가 수렴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버려야 할 것을 오히려 움켜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시는 그냥 줍는 것이다' 라고 나태주 시인은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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