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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의 '시계청소'-모든 것이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나

탐독: 탐서/시와 케렌시아

by 카알KaRL21 2022. 3. 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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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의 '시계청소'라는 시이다.  제목부터가 낯설고 이런 시가 있었나 싶을 정도의 시입니다. 다소 주관적이고 지극히 뇌피셜일 수도 있지만 제가 가진 것을 해석해보고자 포스팅을 합니다. 

 

 

 

 

 

황동규의 시계청소

 

시계청소(視界淸掃)

-황동규

 



오랜만에 만난 참나리꽃 제대로 보기 위해
시계 청소한다고 발로 비빈 달맞이꽃들이
이틀 후 저녁에도 피어 있었다.
어떤 줄기 둘은 간신히 서로 기대어
비스듬히 일어서며 피고
어떤 줄기는 구두에 밟힌 그대로 누운 채
고개만 골똘히 들고 피고 이었다.
그냥 엎드린 채 딴청 부리듯 핀 녀석도 있었다.



밟히고 뭉개져도 끝까지 삶의 끈 놓지 않고
아픔을 초모던발레 동작으로 일궈낸 자들이 
여기 있군! 
하긴 살아 있는 것 치고
주어진 생명 채 쓰지 않고
선선히 내놓을 자 어디 있겠는가?
가만, 혹시 내가 없는 세상이 더 편안치는 않을까?
조심스러운 발끝걸음으로
나 아닌 내가 빠져나왔다. 


 

 

 

'시계청소視界淸掃' 해석

얼핏 시계라고 해서 이 시계(時計)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시를 가만히 읽어보면 이 시계는 watch가 아니고, 시계(視界) 즉, 시력이 미치는 범위를 이야기한다. 아마도 시인은 정원이나 자신이 눈에 들어오는 풍경 가운데 우거진 식물을 정리하려고 했나 보다. 이렇게 단어를 쓴다는 것도 참 시인스럽다 싶다. 시은 언제나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나를 초대하는 듯하다. 자신의 눈앞에 성가시고 거추장스럽고 그래서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싶은 시계청소를 하기 위해서 달맞이꽃들을 발로 비볐나 보다. 굳이 청소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발길에 걸리니깐 시인이 그냥 냅다 비벼 버렸을 수도 있겠다. 아마 그 발은 구둣발인 것을 1연 6행을 통해 알 수 있다. 자신은 자신의 시야에 거슬린다고 구둣발로 밟아버린 것인데, 달맞이꽃들의 줄기는 '고개만 골똘히 들고 피어 있었다 그냥 엎드린 채 딴청 부리듯 핀 녀석도 있었다'라고 표현한다. 마치 누군가의 감시자로부터 자신의 안전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피신해 있는 것처럼, 아니면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당당한 자세처럼 말이다. 

 

 

 

 

2연에서는 시인이 자신의 구둣발로 비벼놓은 생명체인 달맞이꽃들이 다시 재생하면서 일어선 모습에 가히 놀라워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찮은 미물인 식물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외부 상황을 시계청소하려고 했는데, 정작 시인은 이제 자신의 내부의 '시계청소'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깨달음을 가지게 된다.

 

 

'하긴 살아 있는 것 치고
주어진 생명 채 쓰지 않고
선선히 내놓을 자 어디 있겠는가?
가만, 혹시 내가 없는 세상이 더 편안치는 않을까?
조심스러운 발끝걸음으로
나 아닌 내가 빠져나왔다.'

 

 

 

 달맞이꽃의 모습에서 '주어진 생명 채 쓰지 않고 선선히 내놓'지 않는 것을 시인은 본다. 죽지 않고 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을 관찰한 것이다. 시인이 보기엔 자신의 시야에 가려지는 성가신, 불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없애버리고 싶어 구둣발로 밟아버렸는데, 달맞이꽃은 아니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엄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문득 시인은 자신이 없애버리고 싶은 그 달맞이꽃처럼,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없애버리고 싶은, 제거하고 싶은, 눈에 보이지 않게 시계청소하고 싶은 존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가만, 혹시 내가 없는 세상이 더 편안 치는 않을까?'란 자조 섟인 질문을 던진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깊은 겨울, 마침내 나는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여름이 내 안에 놓였음을 알았다'라고 했다. 무적의 겨울에 무적의 여름이 내 안에 존재하듯이, 무적의 여름 안에도 무적의 겨울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 안에 주관적인 시계청소가 제삼자에겐 시인이 시계청소의 대상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로 적용할 수 있겠다. 이런 섬뜩한 깨달음 이후에 놀란 시인은

 

'조심스러운 발끝걸음으로
나 아닌 내가 빠져나왔다'

 

 

발끝 걸음은 발 앞의 끝만 디디고 조심스럽게 걷는 걸음을 말한다. 발 뒤의 끝이 아니고 발 앞의 끝인 셈이다. 그런 걸음을 걷는다는 것을 달맞이꽃 앞에서 자신이 보여준 부끄러움과 수치를 알고 도망치는 모습인데, '나 아닌 내가 빠져나왔다'는 것은 '나'와 '내'가 똑같은 존재이지만, '나'는 달맞이꽃을 구둣발로 밟아서 시계청소를 하려는 자신이고, '내'는 그 시계청소를 하려는 또 다른 '나'인데, 1연의 행동에서 시계청소하려는 자신의 작태를 반성하면서 도망치는 듯한 시인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는 모습이라고 보고 싶다. 

 

 

 

 

모든 것이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나

황동규의 '시계청소'는 자잘한 여운이 있는 듯하다. '그믐밤'의 시에서 느낀 '마음이 쏟아질까...'이 대목이 가슴이 내려앉았다. 마음이 쏟아진다는 것, 그 표현이 너무 거대하게 다가온다. 오늘의 시는 소박한 정경을 다루고 있다.

최승호의 시집 중에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라는 제목이 있다. 언젠가 이 제목으로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그때 기억을 소환해 보자면,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발리앙(올랜도 블룸)이 살라딘에게 질문한다.

 

"당신에게 예루살렘을 무엇입니까?"


"Nothing"

정말 목숨을 걸고 성지탈환을 할려고 하는 살라딘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는 말이 조금 납득이 되지 않는 순간, 살라딘을 등을 돌리면서 두 주먹을 쥐고 부딪히면서 이 대사를 날린다.

 

"Everthing!"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시에 대한 해석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면서도 아무것도 아닌'으로 Reverse해서 표현하고 싶다. 한 문장으로 표현해보자면, '모든 것이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나'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모든 것인 주체이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객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Prologue...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가 흔히 지인들의 표정을 보고 질문을 던진다. “무슨 일 있니? 얼굴이 왜 그래? 힘든 일이라도 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상대방은 ‘아무것도 아니야

karl21.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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