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학이 좋은 것은 문학의 프레임frame에는 한계limit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엔 무한대의 포용과 허용의 게토ghetto가 존재한다. 문학이란 우주는 끊임없는 용납과 얼싸안음으로 독자를 품고 위로한다. 문학은 보여주는 것이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은 나를 도덕으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로, 기타 그 어떤 매개를 통해 단죄하거나 비판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문학의 인물들이나 캐릭터들은 텍스트 위에 살아있어 내게 공감의 눈물과 동감의 쾌락과 위로의 전율을 선물한다.
문학은 그래서 위대하다.
인생이 문학이고, 문학이 인생이지만,
여전히 문학은 텍스트라는 지면 위에 영혼의 날개를 펼쳐 자유를 만끽하게 해 준다. 그것이 문학이 주는 카타르시스다.
2
존 치버의 단편소설집 『기괴한 라디오』에 보면, <애절한 짝사랑의 노래>란 이야기가 있다. 잭은 남성편력이 대단한 조앤을 세월이 지나도 늘 한결같은 시선으로 설레어 하고 흥분된 태도를 유지한다. 시간이 지나도 그 감정의 tension은 늘 한결같다. 조앤은 지나칠 정도로 이 남자, 저 남자에게 기웃거렸고, 심지어 아주 점잖아 보이는 노신사가 ‘외설스러운 제안’(259p)을 할 정도였다. 자신의 몹쓸 평판에 대해 조앤은 자신을 돌아보기보다 자신을 도마질하는 이웃들을 향해 “그 사람들이 내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어”(260p)라고 책임을 회피한다.
3
조앤은 그런 남성편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남성을 바꿀 때마다 지인들을 파티에 초대해서 자기 연인을 자랑질한다. 하지만, 조앤이 만나는 이들은 늘 그렇듯 그저 그렇고 그런 인물들이었고, 지나치게 말하면, 사회적인 쓰레기들이었다. 구제불능남들이었다. 더 가관인 것은 조앤이 만난 연인들 중 생존해 있는 이들이 드물다는 현실이다.
‘어둠 속에서 조앤은 자기를 떠나간 애인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말에서 잭은 그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을 겪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닐스, 그 수상쩍은 백작은 죽었고, 휴 배스컴, 그 술정뱅이는 상선을 탔다가 북대서양에서 실종되었다. 그리고 프란츠, 그 독일인은 나치가 바르샤바를 폭격한 날 밤,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우리는 라디오를 통해 그 뉴스를 들었어.”....
“아 피트.”
“뭐랄까, 그 사람은 언제나 많이 아팠어. 그래서 사라낙 호숫가로 가야 했지만 그러기를 미루고 또 미루고....” 층계에서 발소리가 들려오자 그녀가 혹시나 랠프(또 다른 연인)의 발소리가 아닐까 해서 말을 멈췄다.’(267-2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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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첫대목은 이렇게 시작된다.
‘잭 로리는 뉴욕에서 조앤 해리스를 알게 된 지 몇 년부터 그녀를 미망인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언제나 검은 옷을 입었고 또 그녀가 사는 아파트의 이상한 무질서 때문에 그는 언제나 장의사들이 막 다녀간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악의적인 느낌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앤을 좋아했다.’(2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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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은 두 번이나 이혼했지만, 여전히 ‘조앤바라기’이다. 근데 잭이 직장을 나오고, 실업자 신세를 지내다 병까지 얻게 되자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만화영화의 주제가처럼 ‘갑자기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니 나타나는 조앤이었다. 잭은 병상에 누워 누추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몰골을 자신의 짝사랑 앞에 보이길 수치스러워한다. 이런 곳에서, 이런 몰골과 행색을 보이는 것이 견디기가 힘든 것이다. 잭은 조앤이 ‘연인들의 죽음의 사신’, ‘연인의 저승사자’인 것처럼, 조앤을 늘 따라다니는 ‘남자의 죽음의 그림자’라는 인상에 간호하겠다는 조앤을 한사코 돌려보낸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나기가 싫었던 것이다. 좋은 곳에서, 좋은 모습으로 보자는 말을 남긴 채...
<애절한 짝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잭의 뒷모습은 을씨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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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없다...그냥 존 치버의 단편을 읽고 있으면 그가 내뱉는 스토리의 배경background가 느껴진다. 과연 ‘교외의 체호프’라 할 수 있구나 싶다. 도시 생활, 미국인들의 평범한 삶을 이리저리 훑으며 레이먼드 카버와는 또 다른 느낌과 체취를 느끼게 해 주는 존 치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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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다다르며 밑바닥의 지형을 훑고 살핀 고통의 파편과 흔적이 작품에 녹아나 있다. 그것은 특출나게 튀어나온 돌기처럼 생겨 먹은 것이 아니라 삶의 자잘한 일상 가운데 순간 순간 찌르는 머리 아픈 일들, 골치 아픈 일들, 편두통의 압정 같은 일상의 일상이다. 권투선수가 무너지는 것이 한방의 강력한 KO주먹이기도 하지만, 계속 치고 들어오는 잽, 무수한 잽의 충격이 누적되면서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생의 링 위에서 우리가 다운되거나, KO되지 않기 위해선 잽을 되도록 맞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 잽들을 우리가 무슨 수로 피할 수 있단 말인가? 고통이 없는 링이 어디에 있는가?
몇년 전이었던가? 16전 16승의 전승의 무패복서가 링 위에서 펀치를 맞고 실신했는데 그날 죽었다고 한다. 그 무패의 승리자, 챔피언이 어찌 그리 무너졌는가?...인생은 모를 일이다.
8
문학은 인생의 링 위에서 휴식시간을 제공하는 복서의 벤치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3분 경기에 1분 휴식시간’과 같은 것. 그 숨 고르는 휴식시간조차 없다면, 복서는 더 지치고 더 빨리 자주 무너질지도 모른다. 어릴 적 시골에서 권투장갑을 끼고 친구와 권투를 한번 한적이 있었다. 근데 주먹에 맞은 느낌은 아찔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다!!! 권투선수들의 2,3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숨 쉬기에도 벅찬 1분, 1초이다.
문학은 숨 고르기 할 수 있는 벤치와 같다. 문학은 숨 고르기를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문학은 스토리를 통해 인생을 위로한다.
9
그 스토리가 자전적이든, 비자전적이든 간에 인생을 쓰다듬는다. 그 스토리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스토리가 무슨 힘과 내공이 있냐고?
존 치버는 말했다.
“훌륭한 작품의 한 페이지는 그 어느 것에서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막강한 힘을 지닌다.”
인생도 스토리이다. 이야기이다.
10
위화는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학의 가치는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것들은 뉴스가 해야 할 일들이지요.”(8p)
문학은 조앤을 욕하지 않는다.
문학은 잭을 욕하지 않는다.
문학은 인생을 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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