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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만화 / 35년④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탐독: 탐서/Book Review

by 카알KaRL21 2021. 5. 7.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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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역사만화! 글짜 진짜 많아요 ㅋㅋ

 

  

 

1 강주룡

고무신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시기에는 대도시마다 고무신공장이 많았다. 평양의 고무공장 공장주들은 임금인하를 공동결의했다. 1930년 8월 5개 공장, 1,000여명의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을 감행했다. 나라가 일제치하에 식민지생활을 하던 때였지만, 노동자들은 생존권 투쟁을 위해 혁띠를 졸라맨 것이다. 기업주와 노동자의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했던 것이다. 이런 갈등 상황 가운데 한 사람의 여성이 등장했다. 바로 여성노동자 강주룡이었다. 강주룡은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연설을 했다. 8시간 만에 끌어내려진 강주룡은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모든 보이콧이나 파업이나 노동운동처럼 깔끔한 마무리가 되진 못했다. 주도자들 상당수가 해고되고 결국 임금 삭감안은 철회되었다.

 

 

 

 

강주룡은 어려서 간도로 이주해 20살에 결혼했고 남편과 함께 독립군 부대에도 얼마간 있었다. 남편이 병사하자 친정으로 돌아와 고무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적색노조 활동에도 참여했던 그녀, 단식 후유증으로 극심한 소화불량과 신경쇠약으로 고통받다가 1932년 8월 빈민굴에서 31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파업을 하고 난 지 2년 채 안된 시기에 그녀는 죽었다. 안타까운 생애이다.

 

 

 

 

2 나석주

1926년 12월 조선식산은행에 들어와 창구를 향해 폭탄을 던진 친구가 있었다. 그는 인근 동척 건물로 들어갔다. 남은 폭탄을 기관장실에 던졌지만, 역시 불발. 동척에서 나온 그를 경찰이 쫓았다. 경찰과 총격을 벌이던 그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천만 민중아! 나는 이천만 민중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분투했다. 이천만 민중아! 분투하여라!”

 

“탕! 탕! 탕!”

그리고서 자결했다.

 

그로 인해 동척 직원과 일본 경찰 등 3명이 죽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봐 이름이 뭔가? 이름?”

“나...석...주...”

 

나석주, 황해도 재령 사람. 3.1운동에 참여하고 난 뒤 상하이에 망명해 김구가 지휘하는 경무국 경호원으로 있었다. 중국 군관학교를 나와 중국군 장교로도 근무하다가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상하이로 돌아왔다.

<동아일보>는 호외를 통해 나석주의 의거를 알렸다.

대낮에 벌어진 이 대담한 의거에 총독부는 크게 충격을 받았고, 민중들은 격동되었다.

“이제 그만 독립에의 꿈을 접을 때가 안 됐니?”(200-204p)

 

10년...20년...30년...세월의 무게가 짓누르면 사람들은 희망을 내려놓고 절망을 벗삼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 절망 위에 자리를 깔고 앉아 거기서 안일한 편안과 쾌락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이 젊은이는 그 자릴 박차고 희망을 던졌다.

 

나석주의 용기있는 행동에 민중들은 격동되고 고무되었다.

    

  

  

 

3 윤희순

1860년생으로 16세에 결혼을 한다. 시아버지는 의병장 유인석의 재종형 유홍석으로 을미의병 당시 역시 의병으로 나섰다. 윤희순은 의병들에게 밥을 지어주고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부녀들에게 가르쳤다. 직접 부인들은 조직하고 남장을 하여 의병대열에 뛰어들기도 했다. 나라가 망하자 시아버지가 떠난 만주로 일가를 데리고 떠난다. 망명 후 시아버지, 시숙부(유인석), 남편, 시동생 등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가장이 된 그녀는 아들들 뿐만 아니라 일가 사람들을 모두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장남인 유돈상은 조선독립단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 군사훈련을 시켰다. 양세봉의 조선혁명군과 연계해 활동하다 1935년 6월 체포되고 한달 뒤 세상을 떴다. 그리고 10여일 뒤 윤희순은 항일 일생에 대한 기록(일성록)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매사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가길 바란다.’-자손들에게 훈계하는 글 중에서

 

 

 

 

4 남자현

남자현은 1872년 생이다. 안동에서 출생, 19살에 결혼했다. 1896년 남편이 의병투쟁에서 전사했다. 그러자 직접 의병이 되어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1919년 3.1운동을 경험하고는 김동삼 등 남편의 동지들이 있는 남만주로 망명했다. 서로군정서의 여자 대원으로 활동했다. 1925년 직접 총독 암살단을 조직해 국내에 들어가기도 했다. 1931년 10월 김동삼이 체포됐을 땐 친척이라 속여 면회하면서 연락책 역할을 했으며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국내 이송 전에 구출을 꾀했었다. 1932년 9월 국제연맹 조사단이 만주에 올 땐 손가락을 잘라 쓴 혈서를 조사단에 보냈다. 이듬해인 1933년,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식장에서 일본전권대사를 격살할 계획을 세운다. 죽은 남편의 피 묻은 옷을 몸에 두르고 작탄을 몸에 지녀 중국인 노파로 변장한다. 그러나, 불심검문에 걸려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3개월이 지나 그의 이야기는 신문에 크게 보도된다.

 

“망부의 복수를 하고자 무등 전권 암살 미수....남자현이란 노파는 20년 전에 독립운동자인 자기 남편이 일본인의 손에 죽은 것에 한을 품고 여자의 몸으로 전후 20년 동안을 두고 조선과 만주를 걸쳐 드나들며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중....”

 

남자현은 11일간 단식으로 항거하다 보석으로 석방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5권. 224-228p에서 발췌인용, 부분 편집).

 

남자현은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맡은 캐릭터이다.

 

5 윤봉길

우리가 잘 아는 윤봉길과 김구의 대화에서 마지막 그들의 인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윤군(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김구)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 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군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약간의 돈을 가지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소?”

“아닙니다. 자동차 요금을 주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목메인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5권. 287p)’

 

 

이 짤막한 대화의 내용에서 흘러내리는 비장함과 비애의 여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저는 이제 1시간 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윤봉길

 

" 저는 이제  1 시간 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 "-윤봉길

 

 

6 이봉창 

백범일지에는 이봉창과 김구의 대화도 나온다.

‘사진관으로 가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내(김구) 얼굴에 자연 처연한 기색이 있었던지 이씨(이봉창)가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저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5권. 286p)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저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

 

 

(사진출처: 영남신문)

 

 

7

대한민국의 독립과 해방은 국제정세와 정치판도에 의해 결정되었다. 우리의 자발적인 힘이 아닌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젊음과 인생을 던진 불나방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다. 한 사람...

 

 

 

 

8

“한 송이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알려지든, 알려지지 않든 간에 나라를 위해 수많은 소쩍새의 혼들이 그렇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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