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의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 게재된 "연애"란 시에 대한 감상을 올려보고자 합니다. 이 짤막한 시에 또 어떤 뚱딴지같은 해석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해 보겠습니다. 시 제목이 '연애'군요. 흥미롭습니다만 과연?
연애
날마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당신 생각을
마음 속 말을 당신과 함께
첫번째 기도를 또 당신을 위해
그런 형벌의 시절도 있었다.
이 시를 읽고 피식 웃었습니다. 시인이 모든 것을 통달한 듯, 아니면 어떤 분들은 시인의 생각과 견해에 반기를 들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연애'가 얼마나 좋은데 말이죠? 갑자기 <애로부부>프로그램이 생각이 납니다. 결혼한 커플이 불륜이나 스캔들을 일으키는데요. 그것도 다 연애입니다. 사내연애도 있고 혼외연애도 있고 말이죠. 연애란 단어는 참 상큼하기도 하지만, 때론 비릿하기도 하죠. 왜냐하면 끝 맛이 반드시 좋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연애를 하면 두 남녀의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면서 매일 일어날 때마다 서로를 생각하고 사랑을 속삭이며 안부를 묻기도 하고 생각도, 관점도, 포커스도 모든 게 상대방에게, 연인에게, 연애의 대상에게 집중됩니다. 오! 완전히 속된 말로 '자신의 영혼을 갈아 넣어도 좋을만큼' 상대방을 위해 헌신하고 노력하고 애쓰고 집중하는 게 연애인데요. 그 연애 중에는 아침에 눈 뜨자말자 '첫번째 기도'가 2행의 '당신 생각', 3행의 '당신과 함께', 4행의 '또 당신을 위해' 라고 오로지 "Only You"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당신만을 생각하는 그런 연애, 그 연애 빠지면 다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데요.
그런데, 시인의 끝맺음의 통찰이 시큼합니다.
"그런 형벌의 시절도 있었다."
푸하하하하! 무슨 이런 결론을 나태주 시인이 내린단 말입니까? 아찔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말이 구라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나요? 여기서 연애는 '나와 너'의 연애입니다. 너와 너가 함께 하는 것이 연애인데요. 이 연애란 것이 때론 쉬운 길만은 아닙니다. 연애는 솔직히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인데요. 그런 가운데 자아가 희석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온전한 자아와 온전한 자아가 만나더라도 서로의 욕망이 부딪히면 한 쪽이 양보를 하고 양해를 구하고 포용하고 가야 연애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왜 하필이면 행복의 관문이기도 한 '연애'에 대해 이렇게 시크한 대답,
"그런 형벌의 시절도 있었다."
이런 불청객같은 말을 하는 걸까요? 곰곰히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나와 너가 만나는 연애이지만, 언제나 나는 너일 수 없고 너는 나일 수 없기에 언제나 갈등을 유발합니다. 상대를 통해 행복을 찾는 것이 연애이기도 한데요.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납하고 자긍심과 자존감이 온전한 자아에게 어쩌면 연애는 사치로 보일 수도 있고 액세서리로 비칠 수도 있겠다 싶네요. 온전한 인격과 자아가 갖춘 남녀가 연애를 한다면 또 다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어떤 연애를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연애를 하면 자아를 혹사시킬 수도 있고, 자신을 갈아넣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게 오히려 형벌의 시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싶네요. 연애가 마냥 즐거운 천국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때론 연애는 지옥의 쓴 맛을 보기도 하거든요. 이에 대한 반응이 다들 갈리겠지만, 중요한 것은 연애가 '형벌의 시절'이 되기도 한다는 나태주 시인의 말을 그냥 흘려 들으면서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싶어 이 시를 해석해 보았습니다.
나태주의 '연애'란 시를 감상하면서 연애를 오히려 '형벌의 시절'라고 표현한 시인의 충격적인 표현이 어색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연애가 서로를 구속하기도 하고 부자유스럽게 하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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