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의 소설, 대표작품인 '인생'을 감동적으로 읽고 난 후,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같이 보았는데, 작품에 대한 이야기와 영화(1994)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해 보는 포스팅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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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인생』의 원제는 ‘살아간다는 것’이다. 위화는 그 살아가는 힘이 ‘절규나 공격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인내, 즉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과 현실이 우리에게 준 행복과 고통, 무료함과 평범함을 견뎌내는 데서 나온다’(8p)라고 했다. 이 작품은 고난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위화의 말은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의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살아간다는 것’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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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인의 부탁으로 알지도 못하는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여한 적이 있다. 지인의 친구 두 분과 나, 이렇게 3명이서 장례식을 치뤘다. 세상에나 그렇게 외롭게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언젠가 내가 페이퍼에서 영화 <밴드 어브 브라더스>에서 한 전우의 죽음에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객으로 참여했다고, 그 사람의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의 교훈을 읊조린 적이 있다. 물론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의 장면이 을씨년스럽지 않다면 그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내가 위화의 『인생』을 읽고 나서 느낀 것, 위화의 작가의 말을 보고서 느낀 것은 삶이란, 인생이란, 대단한 업적과 공적과 이름과 명성과 인기와 부귀영화를 누리고 떠나는 유명인의 삶도 중요하지만, 장례식장에서 가족친지 하나 없이 죽어간, 내가 참석했던 그 장례식의 영정에 걸린 사진의 주인공의 삶도 삶이고, 인생인 것이다. 그 삶도, 그 인생도 그 나름대로 유의미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모든 가족들의 장례식을 다 치른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 장인으로서의 푸구이, 그들보다 오히려 더 오래 세월을 살게 된 주인공 푸구이는 자신의 베개 밑에 자신의 장례비용인 10위안을 넣어둔다. 자신이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장례를 치러 달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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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구이는 잘 나가는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도박과 노름으로 집안 가산을 탕진하며 하루아침에 가난을 등에 걸머지게 된다.
“옛날에 우리 쉬씨 집안 조상들은 병아리 한 마리를 키웠을 뿐인데 그 병아리가 자라서 닭이 되었고, 닭이 자라서 거위가 되었고, 거위가 자라서 양이 되었고, 양이 다시 소가 되었단다. 우리 쉬씨 집안은 그렇게 발전해왔지.”
“내 손에서 쉬씨 집안의 소는 양으로 변했고, 양은 또 거위로 변했다. 네 대에 이르러서는 거위가 달이 되었다가, 이제 닭도 없어졌구나.”(52-53p)
하루 아침에 몰락의 길을 걸어가는 푸구이의 집안, 그러나 푸구이의 어머니는 이런 말을 날린다.
“사람은 즐겁게 살 수만 있다면 가난 따위는 두렵지 않은 법이란다.”(57p)
도박판에서 속임수로 푸구이의 재산을 몽땅 손에 넣은 룽얼이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토지개혁이 시작되었고, 공산당 정부가 정권을 잡았다.
‘옛말에 큰 재난을 당하고도 죽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복이 있을거라 했네. 그래서 난 내 나머지 반평생은 점점 더 나아질 거라 믿기로 했지. 자전에게도 그렇게 말했더니 그녀는 이로 실을 끊으며 이렇게 말하더군.
“저는 복 같은 거 바라지 않아요. 해마다 당신한테 새 신발을 지어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어요.”(111p)
...자전의 말이 맞아. 가족끼리 매일 함께할 수만 있다면, 복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112p).’
인생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이 행복인가? 행복의 중심에서 ‘가족’이 있는 셈이다.
“우리 모두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펑샤를 돌려보내지 않겠소.”
그 말에 자전은 배시시 웃어 보이더군. 웃는 얼굴 위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지(127p).
가족이란 것은 함께하는 데서 큰 기쁨이 있는 것이고,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인해 떨어져 있으면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사무치는 것이다. 농아인 펑샤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 그러했다.
“유칭이 이제 이 길을 달려올 수 없겠군요”(19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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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스토리는 대화체로 흘러가는데, 푸구이 가정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비극과 슬픔과 아픔과 고난을 기술함에 있어 아주 속도감 있게 전개해 나간다. 그 고통과 비극과 그 아픔이 얼마나 깊숙한 그늘을 지워지게 했을지라도, 우리가 버스를 타고 가면서 흘려 보내는 수많은 차창 너머에 보이는 풍경들처럼 그렇게 부여잡지 않고 놓아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월은 흘러가야 하는 것이고, 슬픔도, 고통도, 눈물도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인생도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 네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네.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잠은 아무데서나 자서는 안 되며, 문간은 잘못 밟으면 안 되고, 주머니는 잘못 만지면 안 되는 거야.”(200p)
5 작가의 말이다
‘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한다. 작가나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기가 느껴온 것 말이다. 문학의 신비로운 힘은 여기서 나온다. 모든 작품은 누군가가 읽기 전 까지는 단지 하나의 작품일 뿐이지만,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작품이 된다. 만 명이 읽으면 만 개의 작품이 되고, 백만 명 혹은 그 이상이 읽는다면 백만 개 혹은 그 이상의 작품이 된다'(머리말 중에서 5-6p).
‘내 한평생을 돌이켜보면 역시나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아.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아버지는 내가 가문을 빛내기를 바라셨지만,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신 게야.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라네...’(278p)
6 위화의 글쓰기는,
‘진정한 작가는 언제까지나 마음을 향해 글을 쓴다. 마음의 소리만이 그의 이기심과 고상함이 얼마나 두드러지는지를 그에게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다. 마음의 소리는 작가가 진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을 이해하면, 곧 세계를 이해한 것이다...따라서 글을 써야만, 쉬지 않고 글을 써야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고,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 마치 떠오르는 태양빛이 어둠을 비추듯, 영감은 이런 순간에야 불현 듯 떠오르는 법이다....나는 언제나 마음이 요구하는 대로 글을 쓴다. 냉철한 이성은 나의 글쓰기를 대체할 수 없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아주 오랜 세월 분노에 가득 찬, 또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작가였다...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속의 분노가 사그라지자, 나는 진정한 작가가 찾으려는 것은 진리, 즉 도덕적인 판단을 배격하는 진리라는 걸 깨달았다.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나 고발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내가 고상한 작품을 썼다고 생각한다.’(10-13p)
푸구이 노인의 아내 자전의 말이다. 이 말은 작가 위안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담고 있다.
“내 한평생도 이제 다 끝나가네요. 당신이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니, 나도 마음이 흡족해요. 나는 당신을 위해 두 아이를 낳았어요. 당신에 대한 보답인 셈이죠. 다음 생에서도 우리 같이 살아요.”
“펑샤와 유칭 둘 다 나보다 앞서 떠났으니 내 마음도 편안하네요. 더 이상 그 애들 때문에 마음 졸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어쨌든 나도 어미였고, 두 아이 모두 살아 있을 때 나한테 지극정성이었으니 사람이 그 정도 살았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죠.”
“당신은 앞으로 계속 잘 살아야 해요. 쿠건과 얼시가 있잖아요. 사실 얼시도 당신 아들이나 다름없고, 쿠건도 크면 유칭처럼 당신한테 잘할 거고 효도할 거예요.”(2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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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보통 남이야기를 하기를 즐겨한다. 그것이 뒷담화이다. 푸구이의 인생과 가족 내력을 본다면, 많은 이들이 그 집안에는, 그 가문에는 ‘마가 끼였다’, ‘저주가 가득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 위화의 삶을 바라보는 관용적 태도, 고난을 대하는 작가의 긍정적인 자세는 오히려 작가가 보여준 푸구이의 아버지가 빚을 탕감해주는 부분이나 푸구이를 용납하는 자전의 태도를 통해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아간다. 푸구이의 치열한 현실관계에서의 자신이 받았던 ‘화해의 힘’이 그를 앞으로 살아가게끔 만들어 준 것은 아닐까? 뭐 그런 생각도 해 본다. 아내 자전이 유언처럼 남긴 말, ‘당신은 앞으로 계속 잘 살아야 해요’라는 말이 독자들에게 작가가 주는 메시지로 들려지기도 한다. 인생이니깐.
-당신도 앞으로 계속 잘 살아야 해요!
여기까지
위화의 작품의 이야기에 대한 리뷰를 적었다. 소설작품은 푸구이를 남겨두고 자전이 죽는 것으로 엔딩이 되는데, 영화는 푸구이 부부가 살아남고 끝이 난다.
*소설을 읽고 paper는 예전에 작성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영화 <인생>이 무려 1994년,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영화를 늦게서야 관람한 후에 느낌을 적어보기로 한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따로 적었다. 소설과 영화를 제대로 비교하여 차이점을 지적하긴 힘들 듯 하다. 읽으면서 그 느낌을 받아들였음 좋겠다는 생각이다. 근래에 구글 애드센스 때문에 이전 글들을 편집하고 추가하고 삭제하는 일이 잦아서 약간 오버버닝 될 지경이니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게 뭐라고 ....ㅠㅠ
● 위화의 『인생』의 원제는 ‘살아간다는 것To Live’이다.
위화는 항상 작가를 전능자의 관점,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그 등장인물과 캐릭터를 완벽하게 조절하고 컨트롤하는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위치라기 보다는 작가는 그 등장인물과 캐릭터를 창조한 이후, 그 소설과 스토리를 창조한 이후 작품이 완결되어 자신의 손을 떠나면 이제는 자신은 이제 조물주의 자리가 아니라 또 하나의 독자의 자리로 포지션position이 이동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소설을, 작품을 읽을 때가 매번 새롭게 다가온다고 한다. 그 등장인물, 그 캐릭터들이 살아 있어 매번 새롭게 다가온다는 말인데, 우리가 작가라고 하면 모든 것을 배후에서 모든 것을 다 조절하고 감시하는 듯 하지만, 스토리의 인물들은 각자의 삶의 스토리를 풀어가는 살아있는 인물이 되는 셈이다. 위화의 이런 시선이 나는 참 도전적이고 신선할 뿐만 아니라 '작가라는 위치'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이 위화의 <인생>의 스토리는 푸구이와 자전이란 부부의 가정사를 다룬다.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보호받으면서 자유롭게 한량처럼 살아가는 푸구이가 도박을 하는 장면이 아래의 컷이다. 이런 푸구이가 인생의 풍랑과 고통의 시간들을 지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스토리로 풀어내는 데, 그 힘, 그 스토리의 힘이 넘친다. 그래서, 위화가 위대하게 보이고, 그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위화는 대학을 낙방하고서, 당시 가난하고 박봉인 치기공으로 6년의 시간을 보낸다. 치과의사라고는 하지만, 가난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그 6년의 시간동안 늘 위생원 차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풍경을 1-2시간 동안 멍 때리며 쳐다보았다고 한다. 자신의 인생이 위생원에서 쪄들어 살다가 죽을 것 같은 고통스러움이 결국 그를 작가로 만들었던 셈이다.
"1980년대 중국에서는 치과의사도 가난했고 작가도 가난했다. 그러나 치과의사는 고생하면서 가난했고 작가는 자유로우면서 가난했다. 나는 이를 뽑는 일보다는 글을 쓰는 게 좋았다."
그는 위생원에서 발치사(이 뽑는 사람)로 5년 동안 뽑은 이가 만 개가 넘었다고 한다. 하루종일 사람의 입안을 들여다 보는 그 일이 그에겐 고역이었고 고충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마음 속에 꿈틀대는 또 다른 삶의 열정,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그를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한 것이 바로 1983년이었고, 첫번째 소설 <첫번째 기숙사>였다.
인생이 언제나 우리의 뜻과 의도대로 되는 것은 없다. 푸구이가 평안한 가정을 완전히 파탄나게 만든 그 도박 습관은 영화에선 그의 부친을 숨지게 만든다. 영화에선 등장하지 않지만, 소설에선 푸구이의 도박 빚을 푸구이의 부친이 갚아주긴 하는데, 그 빚을 전부 동전으로 바꾸어 그것을 짊어지고 가서 빚쟁이인 룽얼에게 갖다주라고 한다. 엄청난 무게의 동전보따리를 가져가면서 푸구이가 느끼는 죄책감과 후회와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하지만, 인생이 하루 하루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오히려 도박으로 집을 날린 푸구이와 자전 부부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대목이 나온다. 공산당이 들어서면서 이제 부자 계급인 지주들을 죄다 잡다 들였고, 자신과 사기도박을 벌여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룽얼이 오히려 공산당에 의해 사형을 당하게 된다. 그게 인생이라는 것...모든 것을 잃었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었다고 해서 너무 기뻐하지 말라...
작가 위화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가족'이다.
어떠한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 다가온다고 해도 옆에 사랑하는 가족이 존재하고 의지하고 위로하고 함께 한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사랑하는 아들, 유칭을 사고로 떠나보낸 상실의 슬픔 가운데서도 말 못하는 딸, 펑샤가 있기에 위안이 되고, 부부가 서로 함께 하기에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을 읽고 영화를 보았기에, 스토리를 죄다 알고 있는데, 그 다음 장면, 그 다음 스토리를 생각하니 슬픔과 아픔이 몰려오는데, 이것은 위화 만이 만들어낸 스토리의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잠을 몇일 동안 자지 못한 아들, 푸구이를 업고 학교를 데려다 주면서 부자간에 나누는 아래의 대화 장면 이후에 벌어질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야기를 아는 나로서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등장인물이나 우리 인생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앞날을 작가처럼, 이야기를 아는 독자처럼 내다볼 수는 없는 것이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푸구이가 유칭을 업고 가는 이 장면은 너무 가슴 아픈,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고 감사한 대목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유칭을 그렇게 혼내면서도 부자간의 따뜻함과 정겨움이 몰려오는 이 대목,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엄마 자전과 유칭이 아버지에게 갖다 주는 냉수에다 장난을 쳐서 골려주는 대목은 가족에 대해 그려주고 생각하게 해 준다. 이 장면은 아버지와 아들의 마지막 만남이기 때문에 더 가슴 아픈 것이다...
유칭이 죽고, 벙어리였던 딸, 펑샤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결혼을 공장 홍위병 지도자 완얼시와 하게 된다. 완얼시는 홍위병 지도자이긴 했지만, 다리를 절었다. 펑샤도 얼시도 서로 호감을 보이면서 두 사람의 결혼은 속도가 붙었다. 부모로서 느끼는 그 기쁨과 감격도 잠시....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런 말이 생각나는 영화이다. 펑샤의 아들, 만터우를 찐빵이라고 부른다. 왜 찐빵이라고 불렀을까? 펑샤가 만삭이 되어 병원에 갔지만, 당시 문화대혁명 시대인지라, 의사들은 죄다 반동으로 분류되어 홍위병들에게 끌려갔다. 병원에는 졸업도 못한 의대생, 간호대생들이 지키고 있었다. 얼시가 겨우 손을 써서 솜씨좋고 실력있는 왕교수(의사)를 데리고 와서 펑샤의 출산을 도울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반동으로 불려간 왕교수는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기진맥진해 있길래, 푸구이는 왕교수를 위해 찐빵을 사 준다.
하지만,
먹은 것이 없던 왕교수는 찐빵을 너무 허겁지겁 먹다가 체하게 된다. 이를 본 푸구이는 왕교수에게 물을 갖다준다. 물 만난 찐빵(만터우)이 불어서 혼절해버린다. 찐빵을 너무 급히 먹어 체한데다가 너무 많이 먹었는데, 그게 뱃 속에 불어 버린 것이다. 문화혁명 당시에는 미식도 부르주아적인 행동으로 못 박았기 때문에, 음식점들도 죄다 문을 닫았고 고작 거리에 파는 것이라고 찐빵과 죽 같은 것 뿐이었다. 지금도 중국의 서민들이 찐빵을 차와 함께 같이 먹는 이유는 배를 값싸게 채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펑샤는 과다출혈로 위기 가운데 있는 왕교수는 찐빵 먹다 체하고 물을 마셔 빵이 불어 혼절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왕교수가 그러니, 펑샤는 어떻게 되었을까? ....
그런데, 푸구이 부부는 왜 손자 이름을 '찐빵'이라고 지었을까?
'옛 사람들이 말하길 음식 이름으로 사람 이름을 지으면 염라대왕이 음식으로 착각하고 수명을 일찍 정하지 않아서 그만큼 더 오래 산다'
그런데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푸구이와 자전 부부가 펑샤의 묘 앞에서 이렇게 웃고 있을 수 있다.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다. 옆에 사위 얼시가 있고, 손자 찐빵이 있고, 남편 푸구이가 있고, 아내 자전이 있기에 그래도 버텨내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 보다 먼저 떠난 아이의 묘 앞에서 그래도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만 오면 이렇게 말이 많아져..."
인생의 인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얽히고 설킨 것인가를 영화는 현실처럼, 현실은 영화처럼 보여주지 않는가! 전쟁터에 목숨을 같이 했던 춘성으로 인해, 아들 유칭을 잃었지만, 그것도 세월이 지나면서 닳아지고,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을 것 같았던 춘성에 대해서도 자전의 마음이 열린다. 춘성의 아내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떠나는 춘성을 향해 자전이 소리친다.
"아직 우리한테 목숨 하나 빚졌어!"
"꼭 살아 있어야 해!"
"(살기 싫어도) 꼭 살아야 있어야 해"라고 부부가 외쳐준다.
위화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의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살아간다는 것’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위화의 작품 '인생'에 대한 리뷰와 아울러 작품을 영화화한 '인생'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해 본 포스팅입니다. 이야기꾼 위화를 통해 가슴 가득한 감동을 안을 수 있는 작품 '인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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