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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기도-기도는 자신을 재발견, 재평가하는 것

탐독: 탐서/시와 케렌시아

by 카알KaRL21 2022. 3. 2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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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서 '기도'란 시를 같이 감상하고자 한다. 기독교인이기도 한 나태주의 기도는 과연 어떤 의미와 뜻을 담겨 있는지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 기도란 것이 가장 쉽기도 하면서 어려운 주제이기도 하지 않은가?

 

나태주의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서 기도라는 시에 대한 감상 포스팅이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나태주의 시집

 

 

기도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추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이나 내가 비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비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때때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기도는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주제이기도 하다. 인간이 유한하고 한계와 난제가 많기 때문에 인간은 절대자를 찾고 그에게로 향한 소원을 말하는 것이 기도이기도 하다. 기도의 출발점은 인간의 연약함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아킬레스 건은 인간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뜻대로 자신의 인생을 맘대로 컨트롤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물론 어떤 유능한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아주 성공작으로 만들 수 있는 재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질병 앞에, 재난 앞에, 죽음 앞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 같이 미동할 수밖에 없는 결핍된 존재이다. 이런 결핍이 기도를 하게끔 하는 바탕이 된다. 하지만, 그 결핍이 때로 욕망으로 둔갑할 때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 더 나은 것, 더 대단한 것, 더 넓은 것, 더 고급진 것, 더 탁월한 것, 더 유명해지는 것에 목을 맨다. 그래야만 세상이 그를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도는 인간의 유한을 무한으로 만드는 통로가 아니다. 기도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도구이다. 

 

 

인간은 상대적이다. 모든 소유와 평가와 크기와 형편과 상황에 따라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어떤 이에겐 20평 아파트가, 2000cc 자가용이, 2억의 자산이 넘사벽일 수 있지만, 어떤 이에겐 그것이 껌값일 수가 있다. 시인 나태주는 인간의 상대주의적 현실 앞에서 평가 기준이 '나 보다 더 나은' 기준을 생각하지 않고, '나보다 더 못한' 기준을 제시하면서 이 기도의 질문이 자신에게 향하게 하고 있다. 

 

 

-나보다 더 외로운

-나보다 더 추운

-나보다 더 가난한

-나보다 더 비천한

 

 

비교대상이 '나보다 더 나은'으로 나아가면 인간의 욕망을 더욱 확장되고 증폭된다. 인간의 욕망만큼 무서운 것이 어디에 있던가? 그런데, 나태주의 기도는 '나보다 더 못한 사람'에 기준을 맞추고 자신의 눈을 아래로 향하게 한다. 거기엔 외로움, 추움, 가난함, 비천함의 레벨의 저점 구간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향하게 한다. 인간은 '나보다 더 나은' 잣대를 갖다 대면 불평과 원망과 불만이 범벅이 되어 나올 것이다. 그러나 '나보다 더 못한' 것에 잣대를 맞추면 감사가 나오게 된다. 그러면서 시인이 마지막 연에서 질문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그래서, 기도는 일종의 '깨달음'이 동반된다. 기도는 가장 먼저 내가 욕망하는 그 어떤 것, 어떤 사람, 어떤 소유, 어떤 자리를 탐하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라 나의 자리와 position이 어떤 이들 보다는 더 외롭고, 더 춥고, 더 가난하고, 더 비천할 수 있지만, 그 높은 레벨의 잣대가 아니라 어떤 이들보다 덜 외롭고, 덜 춥고, 덜 가난하고, 덜 비천하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고 자족할 수 있다. 거기엔 여유가 생겨난다. 그 여유는 이런 자신에 자리에 대한 깨달음과 자각이 일어날 때 나올 수 있는 리액션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나의 포지션과 위치,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자신의 방향direction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자신의 현재와 관심사

-나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자신의 미래와 야망

 

 

 

인류의 진보는 현재에 대한 불만족에서 일어난 열망으로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도는 현재에 대한 불만족에서 출발하긴 하지만, 자신의 현재에 대한 자가진단과 겸손한 재평가를 통해 자신의 현실에서 나올 수 있는 새로운 평가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더 높은, 더 넓은, 더 긴, 더 깊은 무언가를 소유하기 위해 안달하고 욕망하는 상향성의 추구가 아니라 더 낮고, 더 좁고, 더 짧은, 더 얕은 어딘가로 자신의 존재를 쓸모 있게 만들어가게끔 만드는 하향성의 추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상향성, 하향성 이란 단어는 헨리 나우웬(앙리 누앙)이란 가톨릭 사제이자 심리학자가 사용한 단어이다. 자신의 현재의 리얼리티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긍정한다면, 더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더 겸허하게 자신의 쓸모가 필요한 곳으로 자신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도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재발견하고 재평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태주의 시 '기도'에 대해서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는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며 거기에 도태되는 이들은 열패감을 경험한다. 하지만 이런 현실 가운데 기도의 시는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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