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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 /좁은 문 "진리는 숨막히지 않는다"

탐독: 탐서/Book Review

by 카알KaRL21 2021. 6. 20.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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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 대한 저만의 해석을 해볼까 하는데요. 주인공와 알리샤와 제롬의 애틋하면서도 간절한 그러나 결국은 갑갑한 구도에 대해 '진리는 숨막히지 않는다'고 제목을 달아 보았습니다. 저만의 리뷰를 공유해 봅니다.

 

 

1 좁은 문, 두 개의 충격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읽었다. 읽은 후 충격은 굉장히 두껍고 무거웠다. 내가 신앙을 가져서 더 그러할 것이다. 책을 읽은 후의 충격 하나!

 

 

 

 

충격 두나!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기 위해 한글로 열심히 글을 적었다. 이제 4/5를 쳤다. 이제 글의 피날레만을 남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한글이 뻗어버렸다. 항상 키보드 왼쪽 아래쪽에 버튼을 잘못 누르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건 무슨 오류인지?(아시는 분 댓글 달아주세요! 진짜!!!) 그래도, 다시 한글을 클릭하면 임시저장한 파일이 남아있을 것이란 기대와 함께 클릭! 어어어어....asv파일 맞나? 그 파일로 남아겠지....그래야 할 파일을 불러오는가 싶더니 그 메시지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아....안돼! 안돼!!!!!

멘붕!!! 아...어찌 할꼬!

(마음을 가다듬고 샤워를 하고 애들을 재우고 컴터 앞에 앉아 다시 글을 쓴다)

 

 

 

 

커피한잔과 좁은문 책과 메모노트 그리고 만년필 3개가 놓여진 사진입니다
좁은문

 

2 충격은 꿈으로 나타나

독서의 여파는 꿈으로도 나타났다. 지드의 작품이 내겐 충격이 컸나보다.

꿈 이야기이다.

대학원 동기들과의 모임에서 여차저차해서 내가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꿈이었다. 수군수군거리고 조롱당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비천한 지경에 처해진 모양새였다. 피부로 확 느꼈다. 그러면서 잠을 깼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던진 질문은?

 

 

‘내 인생이 비천하게 멸시당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을까?’였다.

 

 

그러면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고난의 대가, 욥Job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성경을 좀 아는 분이라면, 욥은 자신의 잘못과 죄악으로 인해 고통의 담금질을 당한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꿈을 깬 후에 내 삶이 이대로 흘러가 죽음을 맞이한대도 그리스도로 만족할 수 있을까? 란 질문을 곱씹는다.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는데... 내 삶이 계속 시궁창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 있는가’란 테제가 머릿속에서 감돌았다.

 

 

<내 모든 것을 잃고서도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을까?>

 

 

비천하기 짝이 없는 내 글이지만, 내 사랑하는 글이 쓰레기취급을 당하고 내 인생이 맨홀 뚜껑 아래, 한없는 나락으로 추락할 때도 내가 믿는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들이었다.

왜 이런 질문들이 연달아 나왔는가?

 

 

바로 『좁은 문』의 알리사 때문이었다. 알리사는 제롬의 연인이었다. 하지만, 알리사는 끝내 처절한 구도자의 고행의 길을 선택한다. 그 알리사를 보면서 나는 이런 꿈을 꾸었고, 이런 생각들이 내 존재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내가 신비주의자인가? 그렇게 봐도 어쩔 수 없다. 이건 내 삶의 스토리이니.

 

 

 

 

 

3 왜 <좁은 문>인가?

좁은 길, 좁은 문, 왜 그럴까?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길은, 주여, 좁은 길이옵니다. 좁아서 둘이서 나란히 걸을 수도 없는 길이옵니다.”(178p)

 

 

<좁은 문>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해석을 밝혀본다.

 

 

첫째, 좁은 문이란 것은 혼자서만 가는, 둘도 셋도 아닌, <혼자서만 가야 하는 길과 문>이기 때문에 ‘좁은 문’이다. 그 길은 <영원하고 전능하신 神이신 하나님과 나>라는 존재만의 관계에서만 유통되어지는 길이요, 문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죄렌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神 앞에선 단독자’라는 말이다.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죽음 이후의 영원한 심판, 그 영원한 심판대 앞에 설 때는 모두가 혼자서 오롯이 그 case by case를 감당해야 한다. 그것은 에누리가 없다.

 

 

둘째, 좁은 문이란 <죽음의 문>이기도 하다. 죽음은 혼자서 죽기 때문이다. 로미오와 쥴리엣처럼 동반자살하는 경우도 있지만(그 커플도 시간 차는 있었다), 사람은 모두다 자신의 죽음을 혼자서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 죽는다는 리얼리티 앞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

 

 

 

셋째, 좁은 문은 고독한 한 영혼의 <존재Sein로서 들어가는 문>이다. 한 사람, 한 영혼이 한 평생 가졌던 업적과 공로와 성취와 재력과 사람들을 안고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벌거벗은 한 가련한 영혼Soul이 자신의 존재만을 가지고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에 좁은 문인 것이다. 존재의 모든 악세사리를 벗기고 벌거벗은 채로 들어가는 ‘또 한 사람의 아담이자, 이브’가 되는 셈이다. 위대한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죽을 때는 빈손으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죽는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는 관 밖으로 자신의 빈 손으로 내놓은 채 장례식을 치뤘다고 하지 않는가! 역시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다운 위대한 장면이다. 좁은 문은 한 존재의 벌거벗은 상태로 가는 문이기에 좁은 문이다.

 

 

 

 

 

 

4 알리사의 구도자의 행보에 동의할 순 없다

이 작품을 흔히 청교도주의적 이상주의라고 명명한다. 그 안에 바로 알리사가 있고, 제롬이 있다. 제롬이란 이름은 초대기독교 교회 신학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거기서 앙드레 지드가 따왔는지는 모르겠다. 알리사와 제롬의 끊임없는 평행선 긋기! 알리사는 여동생 쥴리에트에 대한 부채의식 외에도 당여한 행복, 당연한 연애, 당연한 결혼, 당연한 인생을 의도적으로 브레이크를 걸고 거부한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5 Not 고행, But 훈련

알리사의 인생에 필요한 것은 고행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청교도적 이상에 목을 맨다. 쥴리에트에 대한 트라우마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나아간 것 같다. 쥴리엣은 표피적으로라도 행복하게 잘 살아나갔다. 물론 그것은 표피적인 모습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인생에게 필요한 것은 고행이 아니라,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알리사는 하나님께 더 나아가기 위해 당연한 모든 행복의 요소들과 거리를 둔다. 제롬이 아니면 안 되는 알리사였지만, 제롬을 포기한다. 의도적으로, 계속적으로, 의지적으로 포기한다. 결국 남는 것은 두 사람 가슴에 남는 상처였다. 알리사도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구도자의 길을 끝까지 간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 필요한 것은 억지스럽고 억압적인 고행이 아니다. 신앙을 가진 구도자라면, 그런 자학적인 고행이 필요한 게 아니라 계속적인 훈련(discipline)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앙드레 지드는 알리사와 제롬은 그런 구도로 설정한다. 그 시대에 그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융통성 없는 이상이 두 사람을 질식하게 만들었고, 결국 알리사는 정신적인 피로 끝에 쓸쓸하게 죽어간다. 읽는 독자는 숨이 막힌다. 두 사람의 애정 전선에는 늘 불안의 현이 튕긴다. 그것이 지드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6 수고하고 무거운 짐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자주 ‘자기 부인’, ‘자기 희생’을 강조하셨고, 심지어 자신도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하지만, 알리사가 이야기한 이런 방식은 아니다. 내가 이 고전을 읽고 느낀 점은 바로 <진리가 무엇인가>이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은 진리를 문서, 텍스트, 율법의 텍스트라고 생각했다. 그 율법은 yes 아니면 no의 삶이었고, 그것은 규칙이었고 법칙이었다. 거기에 매달리면 사람이 숨을 쉴 수가 없다. 종교지도자들은 그 텍스트 위에(over)에서 기득권에 목맸고, 백성들(종교가들은 백성들을 ‘땅의 사람들: 암하레쯔’라고 율법도 모르는 무식한 이라고 조롱했다)을 무시하면서도 토라의 텍스트, 그 율법을 강요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알리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고행스런 구도자의 삶이었다. 하지만 알리사는 신적사랑으로 가기 위해 에로스가 거세된 그 길을 억지스레 끌고 간다. 제롬도 알리사가 걸어간 그 길, 쥴리에트가 말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랑’(196p)에 목매는 것을 보고 울부짖는다. 결코 고행이 답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No Cross, No Crown이란 말이 있다. 하지만, 알리사와 제롬에게 이렇게 대입,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도 본다. 비평가들은 이 구도를 가지고 앙드레 지드의 ‘도덕주의의 편견’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알리사란 인물은 앙드레 지드가 어릴 적 사랑했던 사촌누이의 상징이기도 했다.

 

 

 

 

 

 

7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진리는 정형화되고, 고착화되고, 문서화된 율법덩어리였다. 그 덩어리는 사람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워줬다. 알리사와 제롬의 고통스런 이상을 향한 구도자의 길은 말 그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었다. 좁은 길, 좁은 문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도그마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진리는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일어나게 하며, 생명을 움트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앙드레 지드는 엄격한 그리스도교의 윤리에 지친 을씨년스런 그림을 이 작품을 통해 보여줬다.

 

 

앙드레 지드의 작품을 보면서 내가 내린 결론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

 

 

진리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시달린 수많은 알리사와 제롬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율법덩어리가 아니라 사랑덩어리이시다.

 

 

 

 

 

8 진리는 숨 막히지 않는다. 진리는 날 숨쉬게 한다.

나는 그 진리 속에서 때론 일탈과 방황과 방랑의 삶을 살기도 했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그러하다(내 글을 보면 아시겠지만, 나는 충분히 탈선의 여지가 많은 죄인이다...). 어떡하다 보니, 글이 자전적 고백형식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이 내 스타일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 작품은 大作이다.

 

 

앙드레 지드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읽고 받은 충격은 사뭇 남달랐는데요, 특별히 제롬과 알리샤의 행보가 너무 안까웠는데, 그런 구도를 보면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성경구절이 떠올랐던 리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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