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와 기괴한 라디오(feat. 존치버,하라리)

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투명사회와 기괴한 라디오(feat. 존치버,하라리)

탐독: 탐서/Book Review

by 카알KaRL21 2021. 5. 18. 18:55

본문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와 존 치버의 <기괴한 라디오>를 콜라보로 엮어가면서 한병철이 이야기한 우리 시대의 '투명사회'의 징후를 진단해보고자 한다. 너무나 투명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어가볼까 한다.

 

 

* 이 paper를 쓸 당시에는 알라딘블로거로 활동할 때였고, 이 책 저 책을 독서하면서 받은 느낌과 통찰을 콜라보래이션 하는 글을 많이 썼다. 오늘 이 paper도 그러한 글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유발 노아 하라리의 &#39;호모데우스: 책 썸네일사진
유발 노아 하라리의 호모데우스

 

호모 데우스 시대의 데이터교

노아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인류가 새롭게 신봉할 종교로 ‘데이터교’를 이야기한다. 데이터교도들은 '만물인터넷Internet-of-All-Things’이라 불리는 새롭고 훨씬 더 효율적인 데이터 처리 시스템을 선호한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사라지고 데이터교가 인류를 장악할 것이라는 진단을 내놓는다. 데이터교의 최고의 가치는 ‘정보의 흐름’이다. 

 

 

 

 

*오늘 우연히 유튜트 알림이 와서 보았던  영상에서 중국에서 만든 어플들이 우리의 정보를 빼내간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에 애플과 중국정부가 협의를 했는데, 애플의 가장 큰 장점은 개인정보의 보호와 보안인데, 중국정부와의 협의 장에서 그 룰을 깨버린 것이다. 중국시장이 워낙 크고 수익의 20%이상을 차지하니, 애플 측에서도 중국정부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할 수가 없었나 보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고, 통제사회이니 모든 국민들의 사생활과 정보와 데이터를 통제하고 규제하려는 시스템이다. 중국정부가 이렇게 하는 것은 '정보의 흐름'  즉, 오늘날의 시대가 데이터를 무시할 수 없는 형국이기에 자체적인 검열과 검증을 통해 권력의 구조와 시스템을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그만큼 개개인이 가진 스마트폰 안에서 벌어지는 데이터, 정보의 흐름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은 중국 정부라 하겠다. 하지만, 애플이 그렇게 '돈 앞에 장사 없다'고 자신의 원칙을 져버리다니, 미국 경찰이 범죄수사를 위해서도 요청한 개인정보 보안의 룰을 들어주지 않은 애플이었는데, 참 헛웃음이 나온다.

 

 

 

하리라는 이런 이야길 한다.

"자본주의가 냉전에서 승리한 것은 적어도, 기술 변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에는 중앙집중식 데이터 처리보다 분산식 데이터처리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509p)

 

라고 했다. 중국 공산주의(사회주의)의 이런 구시대적인 발상과 통제 시스템이 점점 다원화되고 다변화되는 사회와 과연 얼마나 어울릴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이 내용은 수정본에 추가내용입니다).

 

 

 

 

데이터교의 생명-정보data의 흐름

데이터교도들의 첫 번째 계명은 ‘가능한 한 많은 매체와 연결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함으로써 데이터 흐름을 극대화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 계명은 연결되기를 원치 않는 이단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시스템에 연결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것’은 단지 인간만을 뜻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뜻한다...데이터교도들은 가장 큰 죄악은 데이터의 흐름을 차단하는 것이다. 정보가 흐르지 않는 것이야말로 죽음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데이터교는 정보의 자유를 최고선으로 친다(523p).

 

 

 

 

 

‘만물인터넷’으로 데이터를 접속하는 신인류

우리의 몸은 물론이거니와 자동차, 부엌의 냉장고, 닭장의 닭과 정글의 나무까지 모든 것이 만물인터넷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득 『Factfulness』란 책의 내용이 떠오른다. 우리가 소위 세상인류를 구분 지을 때 부자와 빈자, 라는 극단적인 기준으로 그룹핑grouping한다. 하지만, 저자는 인류를 4단계로 구분 짓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물을 길으러 가야 하는 아주 극빈층, 전기는 들어오고 하루에 4달러를 버는 그 다음단계, 전기에 냉장고까지 갖추고 하루에 16달러를 버는 그 위의 단계, 마지막으로 1,2,3 그룹이 갖추지 못한 모든 것을 갖춘 그룹은 4번째 그룹으로 최상위 그룹으로 친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최상위 그룹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데이터교도들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인터넷을 사용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4번째 그룹 위에 5번째 그룹을 새롭게 생성할 수 있겠다 싶다.

 

 

유발 노아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21세기에는 이 만물인터넷, 정보의 흐름, 그리고 그에 기반한 알고리즘을 통해 새로운 계급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데이터의 가장 큰 힘은 바로 공유의 힘力

‘만물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수많은 인류, 우리는 데이터교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이 데이터교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공유’이다.

 

 

 

2013년 1월 11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살한 26세의 미국인 해커 애런 스위츠란 인물이 있다. 그는 데이터교의 첫 순교자이다. 무슨 말인가? 그는 스위스의 보기 드문 천재였고, 그가 접속한 수많은 수십만 편의 과학 논문을 이용로를 받지 않고 모든 사람이 무료로 읽을 수 있도록 인터넷에 올릴 작정이었다. 그는 놀라운 정보와 과학적 데이터를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위스는 그를 체포하고 재판을 받게 된다. 유죄 판결을 받고 죄수의 운명이 되자, 그는 스스로 목을 매고 만다. 이 사건에 대해 분노한 해커들은 스위스 정부를 압박했다. 스위스의 비극에 대해 정부는 사과를 했고, 지금은 대부분의 모든 데이터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해놓았다고 한다. 미국인 해커 애런 스위츠가 싸운 것은 바로 ‘정보의 자유’, ‘데이터의 자유’였다. 그것은 곧 ‘공유’란 광대한 ‘만물인터넷’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경험하면 기록하고, 기록하면 업로드하고, 업로드하면 공유하라?

하라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데이터 흐름의 일부가 되기를 바란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사생활, 자율, 개인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상관없다...위키피디아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우리 모두이다. 개인은 점점 누구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거대 시스템 안의 작은 칩이 되어가고 있다...자기만의 일기장에 일기를 쓰는 것(이전 세대들이 흔히 했던 인본주의적 관습-나는 아직도 이런 습관에 젖어 사는 1인이다!)은 요즘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완전히 쓸데없는 짓으로 보인다. 아무도 읽을 수 없는 것을 왜 쓰는가? 새로운 모토는 이렇게 말한다.’

 

“경험하면 기록하라. 기록하면 업로드하라. 업로드하면 공유하라.”(529-530p)

 

 

 

 

 

 

공유의 힘이다

우리는 인류가 경험한 모든 소소하고 시시하고 조잡한 기억들과 체험들을 공유하면서 거대한 데이터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네이버의 지식백과를 예를 들지 않더라도, 구글에서 단어 하나만 검색하더라도, 다음지도에서 지구상의 한 지점을 찍어 그 지역의 도로사정이나 환경을 직접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내가 예를 들지만, 지금의 만물인터넷의 진보속도는 엄청나서 내가 이렇게 기록한 것도 out of date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되니 이 정보의 양과 공유의 사이즈는 어마무시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공유의 힘이 호모 데우스 시대에 언제나 생산적인 영향력만을 발휘할지, 아니면 파괴적인 효과를 가져올지는 사용하는 유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전에 논란이 되었던 인기가수의 단톡방 동영상 공유사건만을 보더라도 그렇다. 우리의 개개인의 사소한 역사의 기록물이 이제는 세계의 무대에 언제든지 공유될 수 있는 것은 굉장히 파워풀하면서도 악마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사건인, 아버지의 추문으로 인해 자살을 한 딸의 이야기, 요근래의 한 사건만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아버지의 추악한 행위에 대한 판결 유무를 떠나서 한 인간이 그렇게 공유되어진 결과물로 인해 자살을 하는 비극은 어쩌하겠는가! 이런 일화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음 한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공유의 힘’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참고: 이 paper를 쓸 당시 부친인 공직자의 비리로 인해 딸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저서 『투명사회』에서 이런 이야길 한다(나는 한병철을 보면서 그의 통찰과 식견에 늘 도전받고 놀랄 따름이다).

 

 

 

 

 

투명사회의 투명성의 정체는?

‘오늘날 사회 시스템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조작 가능하고 신속하게 만들기 이해서 투명성을 강요한다...이러한 시스템의 강제로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 사회가 된다. 바로 이 점에 투명사회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

“획일화를 표현하는 새 단어: 투명성.”(15p)

 

 

 

내가 이 내용을 처음 접했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긍정사회(투명사회)를 지배하는 것은“더 이상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하나의 구조 속에 놓인 정보의 투명성과 외설성”이다. 투명성에 대한 강박은 인간마저 평준화하여 시스템의 기능적 요소로 만든다. 이런 점에서 투명성은 폭력이다.’(16p)

 

 

 

 

투명성이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인터넷 필드에서 수 많은 정보들에 대해 평가를 내린다. ‘좋아요’와 ‘싫어요’로 구분 짓는다. 페이스북은 ‘싫어요’버튼을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일관되게 그 정책은 반대한다. 한병철 교수는 이것은 투명사회는 일차적으로 긍정사회이기 때문에 ‘싫어요’란 부정성, 부정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장애가 된다고 말한다. ‘좋아요’가 ‘싫어요’보다 더 빠르게 후속 커뮤니케이션을 유발하는 것이다. 거부에 담긴 부정성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효용성이 없다. 이전에 아버지 K의 동영상이 뉴스에 보도되자 자살한 딸의 이야기에서 ‘투명성은 폭력이다’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동영상에 대해 ‘싫어요’라고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그 동영상의 ‘공유 자체’가 자살이란 ‘싫어요’로 대두된 것이다. 애석할 따름이다. 

 

 

한병철의 투명사회750

 

 

 

투명성이 주는 긍정성 VS 진리가 주는 부정성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 진리의 부정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것이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한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을 제거하지 못한다.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불명료함은 오히려 더욱 첨예화된다(26-27p).’

 

 

    

 

투명사회의 기괴한 라디오

존 치버의 단편소설집 『기괴한 라디오』를 보면, <기괴한 라디오>의 이야기가 너무나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기괴한 라디오>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한 가정에서 라디오가 고장이 났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를 위해 제법 비싼 라디오를 거금을 들여 하나 장만한다. 그런데, 그 라디오가 보통 평범한 라디오가 아니라 옆집, 이웃집의 모든 사정들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인 셈이다. ‘훔쳐듣기’가 되는 ‘기괴한 라디오’인 셈이다. ‘몰래카메라’가 아니라 ‘몰래녹음기’정도 될까? 이웃집의 사생활을 우연찮게 염탐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부부의 감정과 기분의 동선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은 현대사회에서는 너무나 흔하디 흔한 스토리이다. 세계에서 가장 CCTV가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고 하던데.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수많은 우리의 동선을 염탐당하고 있고, 기록되어 저장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몰래카메라를 다룬 영화 <웰컴 홈>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휴가를 떠난 두 연인, 새로운 재출발을 위해 휴가 온 연인에게 비추고 있는 수많은 몰래카메라들...일종의 ‘기괴한 카메라’가 되겠다.

 

몰래카메라의 위험성을 드러내준 영화 웰컴홈 포스터
영화 CCTV
영화 웰컴홈의 포스터사진
영화 웰컴홈 포스터

 

 

 

'투명성이 폭력이 될 수도 있다'...이 말을 생각해보니, 갑자기 우리가 범죄를 저지르진 않았지만, 우리의 스마트폰이 경찰에게 압수되어 포렌식 수사를 하였다고 치자. 그러면 그 스마트폰 안에서 까발려진 우리의 무수한 사생활과 프라이버시가 폭로되어진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엄청난 프라이버시 침해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망각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과거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스마트폰 안의 축척된 기록은 오히려 망각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업악과 압박을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지나가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존 치버는 <기괴한 라디오>를 35세 때 잡지에 게재한다. 그렇다면 그 때가 1947년이란 말인데, 그때 존 치버는 이 기괴한 이야기, <기괴한 라디오>를 글로 썼다는 것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현대사회는 ‘공유사회’이다. ‘공유의 힘’을 통해 ‘투명사회’를 강조한다. 그런데, 존 치버는 1940년대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역시 문학가의 저력과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이래서 나는 존 치버를 좋아한다. <기괴한 라디오>는 현대사회의 무수히 공유되고 흩어져있는 ‘정보의 흐름’, ‘데이터의 자유’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결과와 영향력을 주는지 물음표를 던져 준다.

 

 

 

'교외의 체호프'라 불리는 존 치버는 66세(1978년)에 <존 치버의 단편선집>으로 퓰리처상과 전미비평가협회상, 전미 도서상을 받았다.

 

기괴한 라디오 책을 들고 있는 저의 손 사진
존 치버의 기괴한 라디오

 

 

 

 

투명사회에서 불투명성을 주는 의미

엠제이 드마코가 쓴 『부의 추월차선』에서 부의 추월차선의 첫 번째로 ‘명성’을 들고 있다.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이름을 퍼트리는 것이다. 오늘날은 투명사회이니, 만물인터넷이 수많은 인터넷 유저들에게 돈방석을 앉게 만들었다. 그것도 쉽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보다 더 빠르게 자신의 이름을 확장시키는 좋은 도구가 바로 ‘데이터 사회’인 것은 확실하다.

 

 

 

 

‘서행차선을 벗어나는 방법: 비밀의 출구

첫째, 명성이다. 명성을 얻으면 내재가치의 수학적 한계를 깨뜨릴 수 있다. 서행차선을 벗어난 사람들은 대부분 유명인으로서 문화계 곳곳에 얼굴을 알린 경우가 많다. 이들은 운동선수, 가수, 뮤지션, 배우 또는 연예인이다. 서행차선이 지닌 약점을 극복하고 싶다면 유명해지면 된다. 왜냐고? 명성이나 악명 모두 내재가치를 높이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당신과 당신이 제공하는 가치를 매우 높은 가격에 사려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부자고 되고자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추월차선을 통해서가 아니라 서행차선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그 길을 찾으려 한다...

 

 

서행차선의 한계를 극복하는 또 다른 방법은 스스로를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부각시켜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수백 명의 군중이 당신을 원하게 만들면, 수백만 달러를 벌게 될 것이다... 특별한 재능이 특별한 수입을 부른다.’(128-129p)

    

당연한 소리인가? 당연한 소리이지만, 저자의 이야기는 심지가 굵다. 나는 이런 사회의 트렌드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더 많은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만큼 그 자유가 우리에게 제약과 한계를 쥐어줄 것도 틀림없다. 이런 공유의 힘이 적절하게 잘 사용되길 바랄 뿐이다. 『부의 추월차선』이 책은 사업을 구상하고 새로운 자영업을 시도하는 이들에게 놀라운 통찰력과 혜안을 제공해준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자기계발서로 일축하며 폄하하는 우는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Epilogue...

마지막으로, 한병철의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싶다.

 

 

‘인간의 영혼은 분명 타자의 시선을 받지 않은 채 자기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불투과성은 영혼의 본질에 속한다. 영혼의 내부를 훤히 비춘다면, 영혼은 불타버릴 것이며 특별한 종류의 소진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오직 기계만이 투명하다. 즉흥성과 우발성, 자유처럼 삶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들은 투명성을 용납하지 않는다.’(16p)

 

 

페터 한트케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문득 헤밍웨이가 작가로서 명성을 쌓으면서 성공을 거둔 후에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 것을 보았다. 그는 유명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괴롭고 귀찮은 일이라면서 자신은 은둔하게 무명인으로 살아가면서 자유롭게 글을 쓰고 낚시나 즐기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투명시대에 때때로 불투명하게, 무명인으로 살아가는 자유가 없다는 것은 굉장히 괴로운 일임을 예상할 수 있겠다.

 

 

 

투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끔은 기괴한 라디오를 끄고 살아가는 것도 좋을 법하다. 호모데우스 시대에 투명성, 데이터라는 ‘기괴한 라디오’는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자질, 인격, 그리고 책임이 뒤따른다.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