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작가이자 맨부커상 작가인, 존 쿳시(존 쿠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에 대한 리뷰이다. 존 쿠시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문명과 자연에 대한, 그리고 야만인에 대한 관점, '과연 누가 야만인인가?'란 주제로 한번 포스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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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쿠시가 『마이클 K』,『추락』라는 작품으로 한 작가에게 두 번 주지 않는데, 이 룰을 깨고 두 번씩이나 맨부커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또한 노벨문학상까지 거머쥔 작가인지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참으로 세상은 넓고 작가들과 그들이 펼쳐놓은 세계는 무한하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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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당시 알려진 세계의 변두리에 살던 “야만인들barbarians”에 의하여 고안되었다. 뒤에 희랍인과 로마인에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이것은 지금까지 행해졌던 모든 처형 방법 중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이 극도의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죽음을 늦추기 때문이다. 거기에 달린 사람은 여러 날 동안을 죽지 못하고 고통을 당할 수도 있었다. 로마인이 이 처형 방법을 택했을 때에도, 그들은 살인, 반란, 혹은 무장 강도의 죄를 범한 범죄자, 그중에서도 노예나 외국인 혹은 사람 취급을 못 받는 사람들(nonpersons)에게만 이 형벌을 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로마의 장군 바루스(Varus)가 주전 4세기에 자기네 동족 2,000명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에 크게 분노했으며, 예루살렘을 약탈할 때에 장군 티투스(Titus)는 그 도시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세워 놓을 만한 공간도....사람을 달 십자가도”찾을 수가 없었다.
로마 시민들은 극단적인 국가 반역죄를 제외하고는, 십자가형에서 면제되었다. 키케로가 행한 연설에서 십자가를 “crudelissimum taeterrimumque supplicium,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이라고 비난했었다. 조금 더 내려가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로마 시민을 결박하는 것은 범죄이고, 그에게 매질을 하는 것은 가증한 것이고, 그를 죽이는 것은 거의 살인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로마 시민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도 끔찍한 행동을 묘사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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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죄로 고발된 고참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라비리우스(Gaius Rabirius)를 키케로가 주전 63년에 변호해서 성공한 적이 있는데, 그때에 그가 한 말은 더욱 분명하다. “십자가”라는 단어는 로마 시민에게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 그들의 눈과 그들의 귀에서까지도 멀리 사라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일(즉 십자가 처형 절차)의 실제적인 발생 혹은 그것을 견디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예상, 아니 그것을 단순히 상상하는 것까지도 로마 시민과 자유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처형법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극혐의 살인도구, 처형도구였다. 이것은 존 쿠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나오는 소위 말하자면, <야만인>에 의해서 고안되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존 쿠시의 야만인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할 때의 야만인과 다른 그룹이겠지만, 존 쿠시가 말하는 ‘야만인’의 범주에는 모두 포함된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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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쿠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소설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그런 걸 본 적이 없다.”(7p)
앞에서 이야기한 예수의 십자가 처형도 전무후무한 일이지만, 존 쿠시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야만인을 고문하며 다루는 방식에 대해 주인공의 입을 빌어 ‘나는 그런 걸 본 적이 없다’고 표현한다. 이 한 문장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문의 방식이 극혐이라는 사실이다. ‘한가로운 변경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소일하고 있는,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책임감 있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인 주인공의 이야기는 소위 말하는 <야만인>이란 존재가 누구인가를 질문한다. 소위 문명인이라고 하는 제국의 사람들은 ‘야만인 히스테리’를 가지고 있다. 야만인들이 갑자가 쳐들어와 자기의 아내와 딸들을 강간하고 불을 지르고 곡식을 수탈해가며 때론 홍수까지 동원하여 삶의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지는 않을까, 목숨을 빼앗아가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가득한 소위 ‘문명인’들이다. ‘야만인 히스테리’를 가진 ‘문명인’들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야만인 소탕작전을 쉼 없이 지속시킨다. 우리는 문명인이기에, 야만인에 대한 그 어떤 형벌도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야만인에게 격렬한 고통과 죽음과 수치와 부끄러움과 분노를 선물해준다. 존 쿠시는 제국의 사람들이 야만인들을 죽인 시체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시체가 반듯이 누워 있다. 시체의 배와 음부 그리고 사타구니까지 화살처럼 수북한 음모가 흑빛과 금빛으로 번들거린다. 내가 손을 뻗어 털을 만지려 하자, 그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건 털이 아니라 서로를 타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벌들이다. 꿀에 젖어 끈적끈적한 벌들이 사타구니에서 나와 날개를 파닥거린다.’(26p)
‘아이는 죽어 어머니의 옷자락 속에 있다고 한다. 여자는 아이를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강제로 아이의 시체를 빼앗을 수밖에 없다.’(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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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살 길을 찾기 위해 떠돌아다니며 유목민을 생활을 하는 문명인들이 이야기하는 ‘야만인’의 행태는 전설적으로 과장되었고 소문 또한 ‘야만스럽게’조작되기도 했다. 그들은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들의 땅에 정착지가 더 이상 확신되기를 바라지 않을 뿐’이지만, 제국주의자들은 ‘제국의 안보’를 염려하며 그들을 혐오하고 경계한다. 하지만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아직도 우리를 잠시 머무는 방문객으로 생각’(87p)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호수의 염분이 점점 많아지면서 무기물이 증가하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을 우려하면서 자신의 생계와 부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자연동화적이며, 자연친화적인 그들이 야만인일까? 아니면 유목민들에겐 ‘이방인’에 불과한 제국주의자들이 살인무기를 들고 협박하며 고문하고 소탕해가는 그들이 더 야만스러운가? 작가 존 쿠시는 『야만인을 기다리며』이 작품을 통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집단과 시스템이란 이름으로 자행한 수많은 인류의 폭력에 대해 은근히 고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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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힘을 가진 시스템이나 메카니즘은 언제난 ‘적’을 찾는데 몰두한다. 자신이 소유한 그 모든 것으로 단죄할 수 있는 ‘적’말이다. 일종의 ‘희생양 콤플렉스’이다. ‘적이라는 희생양’이 있어야 내가 소유하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이 온전한 보호감과 하나됨과 안전감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적을 내부에서 찾지 못하면, 결국 외부에서 찾아야만 한다. 이런 구조의 프레임은 굉장히 고무적이긴 하나 서글프고 아픈 현실이다. ‘적’을 외부에 두면, 내부가 하나가 될 수 있다. 마치 침략을 스스럼없이 감당했던 일본의 임진왜란이 좋은 예이다. 국론을 통일시키기 위해서 희생양이 바로 ‘조선’이 된 것이다. 제국주의, 전체주의, 파시즘, 권력 메카니즘, 독재자들의 횡포는 언제나 이런 노선을 띠고 있다. 제국이 자행한 모든 비극적인 행위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카테고리에 ‘적’(상대편)을 지목하고, 그들을‘야만인’이라고 언도한 후 융단폭격을 퍼부은 셈이 된다. 인류가 걸어온 전쟁과 수탈과 파괴의 역사가 그러했다.
‘야만인들이 강둑을 은폐물로 사용하니, 강둑이 깨끗해지면 그쪽을 방어하기가 한결 쉬워질 거라고 누군가가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덤불에 불을 질렀다. 불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낮은 계곡 전체로 번졌다. 나는 이전에 들불이 난 것을 본 적이 있다. 갈대밭이 순식간에 타고, 포플러 나무는 횃불처럼 타오른다. 영양, 토끼, 고양이같이 잽싼 동물들은 도망친다. 수 많은 새들이 질겁하여 날아간다. 모든 게 다 타버린다. 그러나 강변에는 불모지가 너무 많이 불길이 번지는 일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이번 경우에는, 사람들이 강변을 따라 불이 계속 번지도록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사람들은 땅에 아무것도 없게 되면, 바람이 땅을 따먹기 시작하고 결국 그곳이 사막화되리라는 건 개의치 않는다. 이렇게 원정대는 땅을 유린하고 우리의 재산을 못쓰게 만들며 야만인들을 섬멸할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1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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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불모지로 만들어 사막화시키고 자연생태계를 파괴시키는 문명이란 이름의 제국주의자들이 더 야만스럽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상대를 향해 ‘야만인’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자연보호>란 말을 쓴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자연을 파괴해가면서 자연을 통해 온갖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있는 인간이 어찌 ‘자연을 보호하려는’생각을 하는지, 오히려 ‘자연이 인간을 보호하는’<인간보호>가 더 적절한 말이 아닌가?
“야만인들이다!”(170p)
제3제국의 사람들, 군대와 군중들이 외치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누가 누구더러 ‘야만인들이다’라고 외칠 수 있단 말인가! 예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하신 메시지가 떠오른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요한복음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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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에게도 망치를 사용해서는 안 되는 거다! 짐승에게도!”(176p)
제국의 졸 대령과 군인들은 망치를 사용할 줄 아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문명인인가? 망치를 사람에게도 사용하는 야만인인가?
“대령, 적은 바로 당신이야!...당신이 적이란 말이야! 당신이 전쟁을 했고, 당신이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순교자들을 만들어줬소. 그것도 지금 시작된 게 아니고. 당신이 더럽고 야만스러운 짓을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작했던 일 년전부터 이미 시작된 거요! 역사가 내 말을 증명해 줄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역사는 없을 거요. 이건 너무 사소한 일이거든.”(188p)
어린 소녀를 자유롭게 해준 대가로 오히려 죄수의 처지가 되어버린 치안 판사는 그들을 향해, 그리고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격렬하게 외치고 있다.
“사람들이다!”(17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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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제국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와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국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역사에 반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제국은 낮에는 적들을 쫓아다닌다. 제국은 교활하고 무자비하다. 제국은 사냥개들을 이곳저곳에 파견한다. 밤이 되면, 제국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강간당하고,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드넓은 땅이 황폐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상상이지만 전염성이 강하다.’(219-220p)
존 쿠시는 작품에 깊게 배인 ‘제국주의가 자행한 야만인들을 향한 토끼몰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너와 내가 잠을 자고 있는 밤사이에 끔찍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고? 자칼은 토끼의 내장을 찢어발기지만, 세상은 계속 굴러간다.’(41p)
‘일종의 중개인, 양의 탈을 쓴 제국의 자칼!’(121p)
존 쿠시가 우리에게 하고픈 주옥같은 메시지가 군데군데 박혀 있다. 이것이 문학의 매력이요 백미일 것이다.
“우리 안에 죄악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우리 자신에게 가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럴 게 아니란 말이다.”(2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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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치안 판사는 대단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도 않다. 그는 공직자이면서도 그 마을의 여러 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그것이 작은 마을에 소문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부엌에서 치안판사의 침대까지는 열여섯 계단밖에 안 돼.”(56p)
치안판사는 고문으로 인해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자리에서 실명까지 가게 되고 몸이 불편한 한 야만인 여자 소녀를 데리고 같이 살게 된다. 그가 그녀에게 끌린 것은 그녀가 당한 고문의 상처와 흔적 때문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끌린 것은 그녀의 몸에 난 상처 때문이었는데, 그 상처가 충분히 깊지 않다는 걸 알고 실망했던 것일까?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걸까? 내가 원하는 건 그녀일까, 아니면 그녀의 몸에 배어 있는 역사의 자취들일까?’(108p)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러한 입장에서 행정업무를 수행했다.(지금은 야만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66p)
“나는 역사에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사라져버린 백성들에게좌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 나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것이 치욕의 원인이라고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254p)
‘나는 바보가 된 기분으로 그곳을 떠난다. 오래전에 길을 잃었지만 어디로 통하는지 모르는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 사람처럼.’(2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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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판사는 늙고 추하고 더러운 욕정에 휩싸인 퇴화해가는 인간이다. 그가 야만인 어린 소녀늘 데리고 산다는 것 자체부터가 더티dirty하고 추한 것이다. 플레이보이 잡지 사장이 몇십 년이나 어린 여자들과 사는 것이 대단해 보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관점에선 용납하기가 힘든 풍경이 아닌가! 인간의 욕망은 언제가 그렇게 추하다. 존 쿠시는 늙은 치안 판사의 입을 빌어 인류라는, 국가라는, 민족이라는 제국주의의 비극과 참상을 고발한다. 또한 이 늙은이와 야만인 어린 소녀라는 구도를 통해 새로운 관계개선을 하려고 하는 현재의 문명사회, 제국, 인류 문명의 현재를 그려주고 있다.
나는 이 작품이 거시적으론 인류 전체까지 나아갈 수 있지만, 미시적으론 개인의 내면까지도 추적하며 탐색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내 곁에 있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 지인들과 관계에서도 상대를 적이나, 야만인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새로운 희생양을 찾기도 하는 ‘개인이란 제국(제국주의)’가 우리 내면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 그 야만인이 외부가 아니라 '나我라는 제국'의 내부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안에 죄악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우리 자신에게 가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럴 게 아니란 말이다.”(241p)
문득 이 paper를 정리하고 무심코 든 류시화의 시집<마음챙김의 시>에 이런 시가 있었다. 그래서 옮겨본다.
그 순간
-마거릿 애트우드
오랜 세월 동안 당신이
고된 일들과 긴 항해 끝에
자신의 나라, 자신의 섬, 수만 평의 땅, 수백 평의 집,
그리고 자신의 방 한가운데 서서
마침내 자신이 어떻게 그곳까지 왔냐를 돌아보며
이것은 내 소유야, 하고 말하는 순간,
그 순간 나무들은
당신을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팔을 풀어 버리고
새들은 다정한 언어를 거두어들이고
절벽들은 갈라져 무너지고
공기는 파도처럼 당신에게서 물러나
당신은 숨조차 쉴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니야, 하고 그들은 속삭인다.
넌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어,
넌 방문객일 뿐이었어, 매번
언덕에 올라가 깃발을 꽂고 자신의 것이라 선언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너의 소유였던 적이 없어,
넌 한 번도 우리를 발견한 적이 없어,
언제나 우리가 너를 발견하고 소유했지.
노벨문학상 작가,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에 대한 리뷰였는데, 마지막 결론은 마거릿 에트우드의 '그 순간'이란 시를 통해 이야기했는데, '과연 야만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우리 모두, 개개인 자신이 바로 야만인이 될 수도, 제국이 될 수도 있단 이야기를 해 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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