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튜버 김겨울의 책소개를 보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다. 흥미롭다 싶었다.
2.
나는 독서를 미루고 있다. 허툰 짓을 하면서 독서를 미루고, 글쓰기를 미루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생산적인지 알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내 지적 축적감을 느끼게 하는 줄 알면서도 나는 비생산적인 대도서관이 말한 ‘쓸데 없는 짓’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유튜버 대도서관은 그래도 ‘자기 인생의 8할이 쓸데 없는 짓인데, 그 쓸데 없는 짓이 자길 먹여 살린다’고 했는데, 나는 뭔가? 젠장!
3.
이 책은 미루기의 천재들이 모여 있는 책, 말 그대로 미루는 인간들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이라고 볼 수 있겠다.
첫문장이다.
‘할 일을 미루는 사람도 어딘가에는 시작을 해야 한다(시작을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13p)
4.
나는 잘 미룬다. 그래서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무감하다. 무신경하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얼마나 올까? BBC에서 제작한 전쟁드라마? 다큐멘터리? <밴드 어브 브라더스>에 보면 죽은 전우의 장례식에 몇 백명, 몇 천명이 왔다고 하면서 그 전우의 인격과 삶을 칭찬하던데. 지금! 신경쓸 것을 쓰자!
5.
나하고 별로 안 친한, 찰스 다윈도 미루기의 천재였단다. 그는 『종의 기원』을 쓰기 위해 다른 모든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쓸데없어 보이는 따개비 , 지렁이 연구와 같은 일로 인해 정작 중요한 연구와 발표는 연기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쓰잘데기 없는 일에 허투루 쓰인 시간의 물리량이 결국은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거름이 된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따개비가 있다.’(22p)
우리가 정말 해야 할 일, 의무의 to do list만을 마구마구 해치워가면서 인생을 살면 참 착실하다고 평가받겠지만, 정말 재미없고 지루한 인생살이가 아닐까? 저자의 말이 그렇다. 수많은 종교와 의무와 질서는 우리에게 미루지 말 것을, 그것은 범죄요, 극혐의 행위임을 주지시킨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 그런 reasonable한 인간이 아니지 않는가! 심지어 성인 聖 아우구스티누스조차도 순결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옵고.”(29p)
도덕적이며 윤리적이며 보편적인 룰이 아닌 미루기의 룰을 따르는 이들이 의외에 많음에 미루는 나같은 사람에겐 이 책이 참 위로가 된다. 이 책도 저자가 미루다 미루다 겨우 나온 결과물이다. 저자는 ‘나는 미루는 행위를 사랑하고 또 싫어한다. 일을 미루며 죄책감을 느끼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미루기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34p) 왜냐? 우리는 마치 기계처럼 바지런하게 움직이는 꿀벌이 아니지 않는가! 하하하
6.
모처럼 사촌 형님을 만났다. 우연찮게 대학원을 3년 내내 같은 기숙사를 사용하면서 룸메이트로 지냈다. 그 형님과 모처럼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많이 변했다고 했다. 뭐가 변했을까?
이미 십수년이 흘러버렸네. 대학원 수업을 들어가기 전에 아침에 축구를 하고 샤워를 하고 빵과 커피를 들고 수업에 느지막히 들어가면 교수에게 딱 찍힌다. 그리고서 허기진 배를 채우면 곧 식곤증이 몰려온다. 수업은 웬걸, 졸음수업을 한바탕하고 돌아온다. 여가 시간에는 게임을 한다. 그리고서 레포트가 다가오면 닥치면 한다. 밤을 새워서라도. 형님은 언제나 미리 미리 레포트나 공부를 해치우고 여유를 즐겼다면, 나는 항상 여유를 즐기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움직인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성향, 기질, MBTI의 유형별로 원래 선천적으로 그런 유형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위로했다(정확한 팩트체크는 안 된 것으로).
그리고서 나는 이성재와 고소영이 주연했던 영화의 한 대사를 내게 날린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7.
내가 리뷰를 적으면서도 참 저자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미루는 습관>에 대해 어떻게 역사적으로, 학문적으로 고찰해서 글을 쓸 생각을 했을까? 사료도 많고, 등장인물도, 역사적인 재료도 많은 것이 이 책이다. 할 일이 많으니 미루는 건가? 애드거 앨런 포도 열심히 일을 미루는 사람이었다. 제임스 로웰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는 지나치게 나태하고, 그러다 아주 가끔씩 놀라울 정로도 부지런해진다네.”라고 쓰기도 했다(87p). 포poe도 그러했는데, 나도 그런가? 이러면서...
′우리 앞에는 재빨리 해치워야 할 일이 있다. 이 일을 미루면 파멸이 닥치리라는 걸 안다. 우리 삶에 가장 심각한 위기가 닥쳐오고, 그 위기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즉각 에너지를 내어 행동하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달아오르고, 작업을 빨리 시작하고 행동하라고 명한다. 우리의 영혼은 영광스러운 결실을 기대하며 온통 불타오른다. 그 일은 반드시 오늘 끝내야 하지만 우리는 일을 내일로 미룬다. 어째서? 이 질문에 답은 없다. 우리가 심술이라는 단어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심술을 내고 있다는 말밖에는, 내일은 찾아오고, 그와 함께 의무를 대해야 한다는 불안에 더욱 초조해지지만, 불안이 점점 커지는 동시에 이름 없는, 이해할 수 없기에 더욱 두려운, 일을 미루고픈 갈망이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갈수록 이 열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 머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안의 격렬한 갈등에, 한계 없는 한계에, 어둠을 지닌 본질에 전율한다. 하지만 지금껏 이어져온 경쟁의 승리자는 어둠이다. 우리는 부질없이 몸부림친다. 시계는 종이 울리고, 종소리는 행복의 끝을 알린다. 또한 종소리는 우리를 그토록 오랫동안 억누른 유령에게 밤의 끝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이기도 하다. 걱정은 날아간다. 사라진다. 우리는 자유다. 예전의 에너지가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지금 일할 것이다. 아아, 하지만 너무 늦었다!′(88p)
8.
미루기의 천재중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다. 그가 완성한 그림은 생전에 20점 뿐이었는데, 그 중에 두 개는 <암굴의 성모Vergine delle Rocce>로 제목이 같다. 1483년 밀라노의 무염수태 성도회가 레오나르도에게 예배당에 걸어놓을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그림을 제작해달라고 부탁했다. 계약직으로 일한 레오나르도는 7개월 안에 그림을 완성하겠다고 했지만, 이 그림이 예배당에 걸린 건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후였다(110-111p).
푸하하하! 아무나 미루지 않습니다. 천재만이 미루기를 합니다. 하하하! 레오나르도는 참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이였다. 그래서 그는 다방면에 너무나 재주가 많아 고민도 많았고 그러기에 더없는 ‘미루기의 천재’가 되지 않았나 싶다. 잘 미룬다면, 자신의 재능이 너무 많아서인 탓도 있는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죽을 때까지 <그란 카발로>를 완성하지 못했다. 1493년, 7미터가 넘는 점토 모형을 만들 때까지는 성공했지만 얼마 안 가 궁수들이 말을 대고 활쏘기를 연습하면서 파괴되었다. 스포르차가 프랑스군의 위협을 느껴 기마상 재료인 청동 80톤을 대포 만드는 데 써버린 이후, 초대형 기마상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새까맣게 잊혔다. 레오나르도의 디자인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1965년 마드리드에서 그의 오래된 수첩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미국의 미술품 수집가인 찰스 덴트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읽다가 이 무산된 프로젝트를 알게 되어 두 번째 시도를 위해 자금을 모으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덴트가 고용한 조각가 니나 아카무Nina Akamu가 마침내 레오나르도의 기마상은 완성했다. 레오나르도의 디자인과 정확히 똑같지는 않지만 높이는 7.7미터, 무게는 15톤에 달했다. 이 기마상은 레오나르도가 제작한 점토 모형이 파괴된 지 500년이 지난 1999년, 밀라노에서 처음 선을 보였다.
나는 이 기마상이야말로 미루는 사람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싸움을 보여주는 기념비라고 생각한다. 참을성을 가질 것, 비록 지금부터 500년이 지난 뒤에라도, 누군가가, 어디에선가, 내가 해내지 못할 일을 마무리해줄지도 모르니까.’(117p)
-레오나르도는 청동으로 기마상을 만들지 못한 것을 보고 자기 인생이 실패라고 생각하고 '나의 인생은 헛되이 낭비했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500년만에 니나 아카무에 의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꿈을 이뤄진다(구체적인 이야기는 뮤럴아트 블로그 https://blog.naver.com/fillart/120163882021에서 흥미로운 다빈치 꿈 이야길 참고하시길!)
노벨상을 수상했던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는 미국의 친구에서 보낼 소포를 며칠이 지나도록 부치지 못했다.
“8개월 동안 나는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스티글리츠에게 소포 보내는 건 내일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8개월 내내 소포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114p).
자기 합리화와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너무 일을 미룬다고 해서 자책하거나 자기혐오하지 말기를 바란다. ‘산만함은 천재성의 원천’(149p)일 수도 있다는 사실!
문득 책을 읽으면서 미루기가 보통 습관인 사람들의 모임을 책에서처럼 한번 가져볼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서 책의 문구가 나를 웃겼다.
“미루는 사람들의 모임: 내일로 미뤄졌습니다.”(167p)
9.
‘어떤 면에서 미루기는 일종의 농담이다.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하는 것, 또는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을 하지 않는 것. 또는 해야 할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는 것. 이건 코미디다. 미루기가 우스운 이유는 장례식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우스운 이유와 같다. 터무니없이 부적절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미루기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웃어버림으로써 그 심각함을 날려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일련의 순간이 다닥다닥 쌓이고 쌓인 것이 인생이며, 그러다 더 이상 순간이랄게 남아 있지 않는 날이 다가오리라는 안다. 이런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고, 이 냉혹한 사실에 맞서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미루는 사람들이다. 맞저 싸우는 건 나중으로 미뤄도 된다.’(170p)
인간의 심성에 <미루기>가 등장하는 것을 파악한 대목인데, 이보다 더 적확하고 냉철한 분석이 있을까 싶다. 인생은 유한하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죽음도 미루고 싶다. 죽음은 미루기가 안 되니 일이라도 미루는 것! 저자는 버킷리스트를 싫어한다고 했다. 뭔가 해야 하는 강박, 죽기 전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강박기제로 작용하는 듯 하다. 어쨌든 미루기에 대한 저자의 성찰은 탁월하다.
10.
일상의 미루기의 천재들인 우리는 일을 미룸으로써,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그 일이 너무나 능력 밖의 벅찬 일이거나, 너무 어렵거나 트라우마나 콤플렉스가 있어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저자의 고백이 위안이 된다.
‘당연히 나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미 후회 머신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분히 체계적이고 이성적으로 살아간다면 100퍼센트 만족스러운 상태로 죽을 수 있다고 믿는가? 나는 결코 스스로 원하는 만큼 완벽할 수 없을 것이고, 스스로 원하는 만큼 끝내주게 멋질 수도 없을 것이다. 나에겐 둘 다 필요하다. 해야 하는 일에서 도망가는 것도, 흠잡을 데 없는 착실함도, 후회도, 실천도.
나는 인간이다. 나의 결점은 나의 가장 훌륭한 점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226-227p)
‘후회 머신이다’이 솔직한 작가의 표현이 너무 좋다. 이 사람 좀 멋있는데, 재치도 있고. 햐...
미루기의 천재들이여, 후회머신의 미루다 미룬 리뷰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뷰 보는 것과 구독과 좋아요를 누르는 것을 미루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좀 미루어도 큰 일나지 않습니다! ㅎㅎ
*나도 이 리뷰를 쓰다가 삼천포로 빠질 뻔했다는. 미루기의 천재들이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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