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김영하는 소설가이다. 소설가가 에세이라니?
둘째, 김영하는 여행가가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김영하를 좋아해마지 않을 수 없었고, 그가 여행에서 만나는 ‘뜻밖의 사실’을 나도 재발견하게 되었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부부가 여행지에 갔는데, 상대가 아닌 다른, 이전에 사귀던 연인과 같이 간 여행지로 다시 가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상대방과 처음으로 가는 곳을 여행지로 삼은 부류가 있었다. 각기 자기들의 입장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최선the best이라고 생각하는 곳으로 여행 목적지를 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 다른 연인과 갔던 곳으로 다시 재탕(?)하는 남편에 대한 주위분들의 질문이 집요했다. ‘꼭 그곳을 가야만 하는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지는 장소이고, 그 장소는 추억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일단 경험해 본 최적의 장소로 그곳을 선택했지만, 아내의 입장에선 자존심 상할 수 있다. 근데 괜히 나 자신도 찔린다. 헐!
여행의 장소는 추억을 소환한다. 추억을 리멤버remember하게 한다. 작가는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대학시절의 추억을 소환한다.
그러면서 나는 이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희망도서 일빠로 주문했는데, 다른 분도 중복신청했다는. 그런데, 내가 먼저 선점을 했는데, 요즘 독서가 잘 안되서 여행에세이 같은 거 잘 안 읽을 것 같아. 도서관 사서에게 그분(중복신청했다는) 먼저 읽으시라고 양보하려고 했는데, 사서는 ‘2주면 다 읽지 않나요?’그 말에 어쩔 수 없는 권유에 업고 오긴 왔는데.
야! 근래에 들어 가장 흥미로운 산문인 듯 싶다. 김연수의 『언젠가, 아마도』도 흥미로워서 빌려 읽다가 말다가 읽다가 미루다 도저히 안 되서 반납하고 책을 구입했더랬는데. 김영하의 이 작품은 정말 부러울 정도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너무 팔방미인인거 아닌가? 부러우면 안도ㅑ!!!!
작가는 ‘삶의 안정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보통 한 곳에서 정착하여 거기서 익숙해지고 편안해져가는 느낌을 ‘안정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면에 한 곳이 아니라 이곳 저곳으로 여행을 하기를 즐기는 부류의 사람은 안정감이 없다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것을 ‘삶의 생생한 안정감’(60p)이라고 표현한다. 김영하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이곳 저곳 원치 않는 강제 전학을 당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 어린시절의 경험이 큰 트라우마와 콤플렉스가 될 수 있지만, 오히려 그런 삶의 배경, 백그라운드가 자신을 여행을 즐기는 이로 성장하게끔 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듯 하다.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207p)
재미난 이야기가 있었다.
‘이십대, 삼십대에는 일년 짜리 적금을 부어 여행을 다녔다. 때로는 신용카드 할부로 항공권을 구입해서도 나갔다. 그 돈을 모아서 집부터 장만하러던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의 부모는 강남에만 열 채가 넘는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다. 선배는 결혼하면서 그 중 하나를 증여받았다. 자기가 번 돈으로 청약저축 한 번 부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런 충고를 들었을 때도 나는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66-67p)
그러면서 김영하는 중국의 고대 병법서 『삼십육계』이야길 한다. 적의 힘이 강하고 나의 힘이 약할 때 마지막 히든 카드 <패전계>가 바로 ‘삼십육계’이다. 김영하는 여행지에서 호텔방의 낯설지만 기분 좋은 침대시트 위로 36계의 여행을 한 셈이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와 방랑벽에 대한 에세이에서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생각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방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82p)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우아!’이런 감탄사가 나왔다. 김영하!!! 절대 감탄사를 연발케 하는구나! 소설『검은꽃』을 읽을 때, 있을 법한 이야기를 사료를 참고하여 어우러지게 만든 작가의 솜씨에 혀를 내둘렀는데, 이 표현은 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참고로, 김영하의 『검은꽃』은 작가가 논문과 연구를 통해 상상력을 발휘해 만든 역사물 픽션이다. 그의 장대한 스케일에 감탄사를 연발했던 기억이 난다. 고종시대에 저물어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보면서 멕시코 난민의 길을 택했던 사대부 집안과 그 시대의 사람들의 고통스런 이야기인데, 참 작가란 그냥 작가가 아니다 싶다. 시오노 나나미는 '신은 세부에 깃든다'고 했는데, 세부detail이 살아 있어야 현장감이 있는 것이고, 거기에 스토리의 생생함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걸 꿰차 스토리로 만든 작업을 작가가 한다는 것인데, 작가는 위대하고 위대하구나!
김영하의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같이 방콕을 좋아하는 인간이 이 책을 읽을만한 무슨 동기가 있지는 않았는데, 여행에 대한 전방위적인 생각을 하게끔 하는 부분에서 별 다섯 개가 아깝지 않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고 명명했다. 저자가 언급한 BBC 다큐멘터리 ‘인간사냥꾼’을 나는 직접 찾아 뒤져서 아이들과 같이 보기도 했다. 다른 모든 동물과는 대별된 인간의 특별한 점은 바로 ‘지구력’이다. 그 지구력은 걷고, 움직이고, 이동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여행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동물들중에 가장 빠르다고 하는 치타가 120km까지 빠르게 달릴지라도, 계속 달리진 못한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한 번 오른 열은 쉬어주면서 열을 식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열이 오르면 땀으로 배출시키면서 열을 식혀주는 일종의 자가관리의 신체구조를 가짐으로써 ‘지구력’을 확보할 수 있다. 원시 인류가 사냥감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쫓아가서 사냥감을 포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간의 이런 감각 때문이다.
작가가 출연한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여행을 한 사람은 본인인데, 여행한 이야기를 편집하여 방송을 시청할 때의 느낌이 아주 남달랐다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1인칭과 3인칭’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일본의 한 코미디언이 비싼 포르쉐를 샀지만 막상 운전을 해 보니 자기가 모는 모습이 보이지가 않더라. 그래서 친구더러 운전을 하라고 시키고 자기는 택시를 타고 따라갔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그가 택시 기사에게 저기 가는 저 포르쉐가 자기 차라며 정말 멋지지 않느냐며 자랑을 하자 택시기사가 어이없어하며 그런데 왜 택시를 탔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바보 아니세요? 내 차에 타면 내가 안 보이잖아요?”’(102p)
이 짤막한 이야기는 굉장히 많은 것을 시사하는 듯 하다. 포르쉐를 타고 있는 1인칭은 자신이 얼마나 굉장한 차를 탄 것인지 제3자가 아니라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3인칭으로 접근했다는 에피소드, 어쩌면 우리가 셀카를 찍고 사진을 SNS에서 올리는 이유와도 상관이 있겠다...우리가 한 도시, 예를 들어 피렌체를 여행했다고 치자. 하지만, 피렌체를 다녀왔다고 해서 피렌체를 다 안다고도 할 수 없고, 작가의 말대로‘과연 그 도시를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피렌체를 ‘수박 겉 핥기’를 했는가? 아니면 거기서 영역표시용으로 ‘똥싸기’라고 하고 왔는가? 아니면 거기서 몇 개월 혹은 몇 년을 살았다는 말인가?
어떻게 보면, 우리는 끊임없는 여행자가 되어야 하는 부분인 것 같기도 하다. 한 도시, 한 마을, 한 공간을 안다고 할 때, 여행했다고 할 때, 과연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이것은 마치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관계를 맺었다고 치지만, 과연 그 사람은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또 다른 측면으로 1인칭인가, 3인칭인가 뭐 이런 질문들까지 해볼 수 있겠다.
김영하에 대해 내가 놀랍게 발견한 대목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여행이야기라고 하길래 여행 가서 체험하고 경험한 것을 감상 정도를 콤멘트하고 끝날 것이라는 나의 얄팍한 기대는 단숨에 무너지게 만들었다. 여행을 많이 다녀 본 자만이 가지는 그 묵직함과 깊이, 철학적인 성찰, 김영하의 내공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언젠가 김어준에 대해서 그는 독서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인데, 어떻게 그렇게 해박함과 통찰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해 어디서 들었는데, 정확한 출처는 기억 나지 않는다. 아무튼, 김어준은 어릴 적부터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한다. 그 여행감각과 경험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나 역시 시청자와 마찬가지로 다른 출연자들을 통해 한 도시를 간접적으로 여행하고 있는 셈이다. 분명 그들과 함께 아테네, 진주, 피렌체, 부산 등을 다녀왔지만 내가 다녀온 곳은 그 도시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그 도시를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금강산 유람을 떠난 조선시대의 양반이 높은 봉우리는 하인을 시켜 다녀오게 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실제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20세기 이전에는 힘든 여행은 아랫사람을 시키고 지체가 높은 이들은 유람의 범위를 벗어나는 모험을 삼가왔다. 21세기의 우리는 남을 시켜 좋은 구경을 하고 오게 하고 나중에 이야기만 전해 들었던 유럽의 귀족이나 조선의 양반을 비웃지만, 과연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를까?’(110-111p)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에 대한 이야기를 피에르 바야르의 입을 빌어 김영하는 이렇게 보여준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내내 자신의 선실 안에 머문다는 이 관념은 우리가 어떤 장소에 접근할 때 중요한 것은 상상력과 성찰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자신이 통과하는 나라들에 대해 포그는 그곳을 방문하여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더 강력하게 바로 그런 활동들에 완전히 전념할 수 있는 것이다.’(113p)
포그는 지리학에 통달한 인물이기에 여행지의 디테일에 함몰되지 않고 총체적인 시각을 갖는데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영어의 ‘armchair traveler’(방구석 여행자)도 여행자라는 이야길 한다. 우리가 몸소 발을 디디고 여행한 것만이 진짜 여행이 아니라 TV프로그램 하나를 보고 남은 강렬한 인상이나 임팩트가 축적되면 오히려 그것이 또 하나의 여행 경험이 되는 셈이라고. 그리하여 여행, 비여행, 탈여행...이 모든 것들이 다 여행인 셈이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스토리는 악마가 주인공 슐레밀에게 ‘행운의 자루’를 줄테니 그림자를 자신에게 팔라고 한다. 그림자가 무슨 대수냐 싶어 그는 도깨비방망이와 같은 ‘행운의 자루’를 거머쥐지만, 그림자 없는 사람이 당하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그는 점점 느끼게 된다. 후에 악마가 그림자를 돌려 줄테니 죽은 뒤의 영혼을 자기에게 팔라고 하지만, 갈등 후에 주인공을 거절한다는 이야기. 김영하는 이 소설 이야기를 하면서 김현경의 책 『사람, 장소, 환대』라는 이야기로 넘어간다. 김현경은 이 ‘그림자’라는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무엇’이라고 해석한다. 그림자가 있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환대받을 자격이 있는 ‘성원권’을 지닌 셈이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김영하는 여행에서 받는 낯선 사람으로부터의 ‘환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부분이 상큼하다. ‘환대’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인생이라는 큰 구도에서 여행자이기에 그 누군가의 환대로 인해 생존해가고 생활해가고 활력을 얻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저와 피더백하며 소통하는 그것 또한 ‘환대’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그 무언가 대단한 존재, ‘섬바디somebody’의 삶을 산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섬바디’가 아닌 ‘노바디nobody’의 체험을 한다. ‘아무것도 아닌, 노바디’가 되는 경험, 무명의 경험, 거기서 우연찮게 찾아오는 ‘환대’. 이 모든 것, 그래서 ‘길 위의 날들의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82p)는 이 문구가 더 다가오는 듯 싶다.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이란 챕터에서 김영하는 1968년 12월, 처음으로 달에 도착한 지구인의 이야기를 한다. 인류 최초로 지구란 행성을 벗어난 이들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달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은 칼 세이건이 말한 대로 ‘창백하고 푸르른 점’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지금 현대인들에겐 익숙한 장면이지만, 당시 지구인들에겐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그 작은 구슬 같은 지구에 인류가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아폴로 8호가 달 궤도에 진입한 다음날 크리스마스에 발행된 뉴욕타임스에 ‘저 끝없는 고요 속에 떠 있는 작고,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를 지구의 승객riders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썼다.‘(136p)
-우리는 3인칭으로 보면, 지구의 승객riders, 여행자이다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는 그리스어로 우티스Outis, 영어로는 노바디Nobody, 우리말로는 ’아무도안‘이라고 답한다고 천병희씨의 글을 작가는 인용한다. 자기 영역을 침범한 오디세우스를 키를롭스가 가장 마지막에 ’아무도안‘(인 놈을) 잡아먹겠다고 한 대목, 키클롭스가 오디세우스에게 두 눈이 찔린 채로 고통가운데 있을 때 부하들이 달려와 누가 당신을 괴롭혔느냐고 물었다. 키클롭스는 ’나를 죽이려는 놈은 아무도안이야‘라고, 영어로 ’Nobody is killing me’라고 번역할 수 있다. 얼마나 재미있는 대목인가! 김영하는 이 고전을 이렇게 연결시킨다.
‘그러니 현명한 여행자의 태도는 키클롭스 이후의 오디세우스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노바디로 움직이는 것이다. 여행의 신은 대접받기 원하는 자, 고향에서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자, 남의 것을 함부로 하는 자를 징벌하고, 스스로 낮추는 자, 환대에 감사하는 자를 돌본다. 2800여년 전에 호메로스는 여행자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오디세우스의 변화를 통해 암시한다. 그것은 허영과 자만에 대한 경계, 타자에 대한 존중의 마음일 것이다’(185p)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쇼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206p)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리뷰하고 글을 쓰는데, 혹은 내가 쓴 글로 인해 작가가 피해보는 일이 없었음 한다. 이미 이 책은 엄청나게 팔렸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의 책이고, 당연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이야길 하느냐? 때로 내가 너무 세세하게 리뷰를 해서 리뷰만 보고 책은 읽지 않아도 되겠다는 반응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분명 작가에겐 피해를 주는 행위가 되는게 아닌가!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할까? 역시 김영하의 글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베이스볼큐브닷컴에서 2000년부터 2011년까지 신인 드래프트 결과, 프로구단에 드래프트된 전에 아마추어 선수는 17,925명이었지만 메이저리그에 한 번이라도 뛴 선수는 1,326명에 그쳤다. 이는 약 7.4퍼센트에 불과하다. 마이너리거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원래 추구하던 것과 다른 것을 얻었다. 그들은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대박을 터트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불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인생을 살아냈을 뿐이다. 경기에 출천해 최선을 다했고, 사랑하는 파트너를 만나 가정을 이뤘고, 은퇴한 후에 코치가 되어 후진양성이나 다른 일을 찾았다. ‘어쨌든 살아남지 않았는가?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옆에 있고, 남 보기에는 보잘것없을지언정 평생을 들여 이룬 작은 성취가 있다.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24p)
우리도 작가처럼 그렇게 고백하길,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82p)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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