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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크눌프Knulp(feat.D.H.로렌스, 레이먼드 카버)

탐독: 탐서/Book Review

by 카알KaRL21 2021. 6. 28.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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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크눌프Knulp' 그리고 그가 인생에 경험한 좌절과 불행, 슬픔을 작가 D.H.로렌스,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가 겪었던 고통이라는 공통점을 이야기하면서 옴니버스형식으로 '슬픔에 대한 공부'란 주제로 한번 포스팅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시인이기도 했다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를 읽었다. 대학 초기에 헤르만 헷세의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세월이 20년이 넘게 흘렀다. 헷세의 인생여정을 들여다 보았다. 헷세가 말년에는 시를 썼구나! 문득 류시화의『시로 납치하다』에 나온 헷세의 시를 본다.

 

 

편집부에서 온 편지

‘귀하의 감동적인 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옥고는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면에는 약간은 어울리지 않음을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편집부에서 오는 이런 거절 편지가

거의 매일 날아온다. 문학잡지마다 등을 돌린다.

가을 내음이 풍겨 오지만, 이 보잘것없는 아들은

어디에도 고향이 없음을 분명히 안다.

 

 

그래서 목적 없이 혼자만을 위한 시를 써서

머리말 탁자에 놓인 램프에게 읽어 준다.

아마 램프도 내 시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없이 빛을 보내 준다. 그것만으로 족하다

-(시로 납치하다, 168p).

 

 

 

 

시인 헤세의 좌절

헤세는 10대에 이미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소설을 펴내고 지금 이 시를 쓴 시기가 50세였다. 당대의 이름있는 작가의 시를 출판사가 거절했다. 왜? 바로 전쟁 때문이었다. 헤세는 독일인이다. 헤세(1877-1962)는 히틀러의 제국주의적 전쟁을 반대한 전쟁반대론자였다. 독일의 전쟁 발발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하지만, 전쟁에 대해 헤세는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배신자, 매국노란 지탄을 받으면서 자신의 시 뿐만 아니라 모든 저서가 출판금지를 당했다.

 

 

 

‘아마 램프도 내 시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없이 빛을 보내 준다. 그것만으로 족하다.’

 

 

작가에게 시란, 글이란 작품은 자식과도 같다. 헤세는 이 시에서 ‘이 보잘 것 없는 아들은 어디에도 고향이 없음을 분명히 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 보잘 것 없는 아들’은 시인 헤세 자신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오롯이 글쓰기를 감행했던 헤세

히틀러 사망 후 69세가 된 후에야 그는 문학적 인정을 받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류시화는 오롯이 자기만족을 위해 시를 쓰고, 글을 썼던 헤세의 심장을 이야기한다. 출판사는 끊임없이 ‘거절편지’를 보냈지만, 그는 오롯이 글을 썼던 것이다. 류시화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보다 더 큰 것은 바로 <내면의 포기가 주는 고통>(시로 납치하다, 171p)이라 말한다. 나 스스로 글쓰기를 포기하는 내면적인 황폐함,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맨홀 뚜껑 아래에 쳐박혀진 느낌, 그것이 바로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절망 즉,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야길 하니, 헤세의 소설 『동방순례』에 보면 ‘죽음에 이르는 병(모르비오 인페리오레 Morbio Inferiore)’이라는 뜻의 이탈리아 북부의 계곡이름이 등장한다. 헷세의 내면은 포기를 몰랐다. 그의 사후에 히틀러가 죽었다면, 그의 작품의 출판은 더 미뤄졌을 것이다. 다행이다. 히틀러가 헤세보다 일찍 죽어서.

 

 

 

류시화의 『시로 납치하다』는 말 그래도, 못 다 핀 꽃과 같은 시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읽으면서 많은 위로를 솔직히 받았다. 그의 지독한 고통, 죽음에 이르는 병, 영적, 정신적, 육체적 모르비오 인페리오레를 경험했던 수많은 시인들의 아득한 절망이 엿보인다. 그 사람들의 절망이 꽃으로 피어 시가 되었다. 그래서 그 시가 너무 가슴뭉클하게 다가온다.

 

 

 

 

모든 이의 꿈은 감옥에서 큽니다

오늘 우연히 김미경 강사의 강의를 들었는데, 문장 하나가 훅 하나 내 가슴에 들어왔다.

 

 

<모든 이의 꿈은 감옥 속에서 큽니다>

 

 

뭐 그런 문장이었다. 감옥같은 현실, 환장할 것만 같은 절망 속에서 꿈이 핀다는 자기계발 냄새가 물씬 풍기는 멘트가 나를 위로한다. 때때로 그런 말들도 우리 인생에겐 필요하다. 구약성경의 요셉이 그러했다.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요셉은 결국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가 어처구니 없는 감옥행 신세가 된다. 그런데, 그 감옥에서 요셉의 꿈이 커졌다. 딜레마의 감옥에서 희망의 꽃이 핀다는 말로 자위해 본다.

 

 

자고로 절망적인 환경에 처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문학을 보면서 위로받는다. 나보다 더 큰 절망을 경험한 이들이 그 텍스트 위에 울고 있다. 그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어 내 가슴에 희망의 싹을 틔운다.

 

 

 

 

레이먼드 카버의 자전적 이야기, <열>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에 보면, <열>이란 단편소설이 있다. 그 단편을 읽고 적었던 느낌을 그대로 옮겨본다.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한다. 가정을 이룬다. 자녀들이 태어난다. 그런데, 한쪽에서 균열이 생긴다. 독박육아와 직장까지 병행해야 하는 남편의 처지. 받아들일래야 받아들일 수가 없는 처지였다. 베이비시터를 구하다가 진짜 괜챦은 늙은 웹스터부인을 만난다. 웹스터 부인의 케어는 주인공 칼라일에게 활력을, 두 아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남자에겐 이제 애인도 생겼다.

 

 

 

남편 칼라일이 잘 아는 직장동료와 바람나서 딴 살림을 차린 아내 아일린이었지만, 아일린의 도움으로 훌륭하고 탁월한 베이비시터, 웹스터부인을 얻게 된 칼라일이다. 하지만 칼라일은 갑작스럽게 큰 열에 휩싸인다. 홍역처럼 다가온 열병을 겪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웹스터부인이 남편과 함께 유모의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어쩔!

 

 

아일린에 의해 자기 가정에 구원자같이 왔던 웹스터 부인이 떠나게 되고, 열병에 걸린 남편에게 아내는 남편의 생체리듬에 대해 조언을 하면서 아플 때 기록을 꼭 남기라고 충언(?)까지 한다. 웹스터 부인이 떠난다고 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칼라일은 이제 두 아이, 세라와 키스를 둔 이혼남으로 남아야 하는 것이 그의 현실이다. 가정의 모든 리듬과 흐름이 또 다시 혼돈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그런데, 작가 레이먼드 카버는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바로 그때, 창가에 서 있을 때, 그는 그렇게 뭔가가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일린과의 관계된, 이전의 삶과 관계된 그 무언가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 적이 있었던가? 물론 그랬을 것이다. 그랬다는 것을 안다. 비록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하지만 그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이해했고 그녀를 보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들이 함께한 인생이 자신이 말한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 인생은 이제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지나침은-비록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는 싸우기까지 했지만-이제 그의 일부가 됐다. 그가 거쳐온 지난 인생의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대성당, 254p)

 

 

 

 

칼라일의 decision

애기들 내팽개치고 떠난 아일린, 그러면서도 애기들 때문이라도 계속 연락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일린,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칼라일은 이 대목에서 결정을 내린다. 결정decision는 명사이고, ‘결정을 내린다’, ‘결단하다’의 동사는 영어로 decide이다. 이 말은 de(~로부터from)라는 접두어와 cide(자르다to cut)의 의미를 담고 있다. 칼라일의 새로운 결단은 ‘아일린으로부터 잘라내는 삶’이다. 재수없는 여자를 만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크눌프Knulp의 존재적 의의

카버의 이야기에서 다시 헤세의『크눌프』의 이야기로 가보자.

 

폐결핵이 걸린 크눌프에겐 지금 아무런 희망도, 소망도 없는 처지이다. 그때 신과의 대화를 나눈다.

 

 

“이제 그만 만족하도록 해라...그 모든 한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모든 일이 선하게 그리고 제대로 일어났고 그 어떤 것도 다르게 흘러가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정말 보지 못하는 것이냐? 그래, 너는 지금 어엿한 신사나 기술자가 되어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또 저녁에는 잡지를 읽고 싶다는 것이냐? 당장에 도망쳐 나와서 숲 속의 여우들 곁에서 잠을 자고 새덫을 놓거나 도마뱀을 길들이게 되지 않겠느냐?”

 

 

이 말에 크눌프는 기분이 다소 좋아지고 자기 삶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보아라...나는 오직 너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필요로 했다. 너는 나의 이름으로 방랑을 했던 것이고, 정착하려는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향수를 조금씩은 일깨워 주어야 했다. 나는 나의 이름으로 어리석은 일을 했던 것이고 조롱받기도 했다. 네 안에서 내가 조롱을 받는 것이고, 내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나의 형제요, 나의 일부다. 네가 무엇을 누리든, 무엇으로 고통을 받든지, 나는 항상 너와 함께했었다.”(크눌프, 140p)

 

 

 

 

 

크눌프는 방랑자였다. 어디 정착하지 못하는 떠돌이, 나그네였다. 크눌프에겐 사생아도 있다. 그 아이가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고 그런 여력도 없는 크눌프였다. 그러나, 신은 크눌프에게 ‘정착하려는 성향을 지는 사람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향수를 조금씩은 일깨워 주’었던 게 바로 크눌프였다.

 

 

헷세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 Knulp

젊을 때 크눌프는 목적 없이 떠도는 방랑자로 비쳤다. 라디오 광고방송에선 비행청소년들을 선도하는 듯한 메시지로 헤세의 크눌프 이야기의 결론부분을 아주 구슬프게, 그것도 팬플루트 배경음악까지 깔아가면서 메시지를 던졌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크눌프는 단순히 방랑자의 삶을 살다가 비극적인 돌싱으로 죽어가는 인물이 아니라, 크눌프의 삶도 타인들에겐 필요한 존재였고 필요한 역할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물론 크눌프는 헤세의 심장을 많이 닮아 있다. 그는 어디에도 얽매이길 싫어했던 인물이다. 집안이 전부 개신교 선교사, 목사의 집안이었고 그 또한 목사수업을 위한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얼마 되지 않아 튀어나왔다. 탈출했다. 그의 삶의 수레바퀴가 그에겐 너무 무거웠던 것일까? 종교적인 굴레들과 수레바퀴 속에서 그는 언제나 크눌프처럼 유리하고 방황하는 자유를 탐닉했다.

 

 

 

 

新크눌프적 존재, 아일린

레이먼드 카버의 <열>에서 나오는 칼라일의 아내, 아일린은 新크눌프버젼으로 볼 수도 있겠다. 또 한 작가의 스토리를 보자. 그 작가는 스승의 부인과 사랑에 빠져 도피행각을 했다. 세 자녀와 교수인 남편을 내팽개쳤다. 그리고서 새롭게 사랑에 빠진 작가와 인생을 향유한다. 그 작가는 바로 『채털리부인의 사랑』의 D.H.로렌스이다. 불륜남이 바로 로렌스였다.

 

 

D.H.로렌스는 흔히 외설작가로 알려져있지만, 그가 고전의 대열에 서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의 진가는 드러난다.



新크눌프적 작가, D.H.로렌스

하지만, 로렌스의 생애의 새로운 국면은 프리다(Friede)라는 독일 여성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노팅검 대학 시절의 스승인 위클리(Weekley) 교수에게 취직알선을 부탁하러 갔다가 그의 아내인 프리다와 만나게 되었다. 중상류의 가정에서 하녀를 거느리고 안정된 생활을 하던 프리다는 답답하고 무료함까지 느끼던 터였다. 예리한 눈에 당돌하기까지 한 27세의 청년에게서 프리다는 새로운 삶의 돌파구를 찾았고, 로렌스는 프리다야말로 그가 이제껏 찾았던 여자였음을 직감했다. 프리드리히 본 리히토(Friedrich von Richthofen) 남작의 딸인 독일 태생의 프리다는 사회적 지위, 연령, 인생의 경험 등에서 그를 능가했다. 지성적이고 개성이 강한 프리다는 이 청년과의 사랑을 위해서 곧 세 자녀와 남편을 버리고 고향인 독일의 메쯔로 떠났다.

 

 

로렌스의 새 연인, 프리다는 카버의 <열>의 아내 아일린과 비슷한 인물이다. 아일린, 그녀는 미술을 전공했고 그림으로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는데, 불륜남을 만나면서 해소된 것이다. 무슨 막장드라마 같은 이야기냐고?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크눌프에게 있어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린 그 옛날 첫 사랑, 프란치스카의 존재나, 더 나아가 크눌프 자신의 존재도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이며, 카버의 단편에 나오는 칼라일의 아내, 아일린의 존재도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냥 아일린은 칼라일에게 新크눌프Knulp적인 존재였다. 인생을 각성시키는 존재였다. 카버가 그걸 적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인지, 레이먼드 카버는 작품 속에서 이런 문장을 남긴다.

 

 

 

“암시가 가장 중요한 거야.”(237p)

 

 

레이먼드 카버의 일상의 힘

레이먼드 카버(1938-1988)는 가난한 제재소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세에 3살 연하의 소녀와 결혼을 하여 그 다음해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카버의 삶은 생계를 위해 피 말리는 삶을 살아야 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의 현실과 작가가 되고자 하는 꿈, 이상 가운데서 그는 30대에 생활고와 아내와의 불화로 인해 알코올중독에 빠지게 된다. 단편 <열>은 두 아이를 혼자서 양육해야 하는 아버지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가 단편소설을 썼던 것은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장에 생활비가 없기 때문에 짧게 쓴 소설을 팔아 원고료로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했던 제재소 일꾼, 집배원, 주유소 직원, 화장실 청소부의 생활 가운데 부딪히는 일상들을 다룰 수 밖에 없었다. 그의 글이 힘이 있었던 것은, 그의 일상에 힘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생계를 위해 피말리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 하나의 힘이 있었는데, 바로 그것은 <관찰의 힘>이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또 다른 힘, 관찰의 힘

작가 김중혁은 『무엇이든 쓰게 된다』에서 ‘믿음과 소망과 관찰, 그 중에 제일은 관찰이다’(무엇이든 쓰게 된다, 10p)라는 말을 남겼다.

 

 



오기렌의 관찰의 힘

'관찰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라는 단편 소설이 생각난다... 브루클린의 담배 가게 주인인 ‘오기렌’은 12년 동안 매일 아침 7시 정각에 똑같은 프레임으로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는 사람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매일 똑같은 시간의 그물에 담긴다. 어느 날 그는 단골손님인 소설가에게 자신이 찍은 4천 장이 넘는 사진을 보여주게 되는데, 소설가가 사진집을 너무 빨리 넘기자 이렇게 말한다.

 

 

“너무 빨리 보고 있어. 천천히 봐야 이해가 된다고.”'(김중혁 10-11p)




 

치열했던 카버의 삶

카버는 치열한 생계의 현장에서 사물과 사건을 제대로 매일 관찰하면서 글을 써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그런 인생을 살면 많은 것을 양보해야만 해요. 자기 인생을 살 수가 없어요.”

 

카버가 1982년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의 글에 대해

 

“한 번도 자전적인 것을 쓴 적은 없지만, 내 작품은 대부분 나 자신에 대한 것들입니다.”

 

고 했다. 카버는 단편 <보존>이란 이야기에서 냉장고가 고장났는데 돈이 없어 기사를 부를 수가 없는 내핍의 고충을 이야기했다. 카버는 그런 삶을 소설로 썼던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는 ‘더러운 리얼리즘’의 작가이다?

20세기의 영국의 문학계는 미국 문학의 동향에 대해 비위가 거슬린 모양이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에 대해 ‘더러운 리얼리즘’이라고 했다. 내면의 것을 터트려주지 않고 밖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모든 것을 독자들이 결정해야 하는 것을 영국의 비평가들은 ‘더러운 리얼리즘’이라고 했을까! 이런 영국과 미국간의 문학적인 거리감과 냉기서린 감정의 기운은 문외한인 나에게 일종의 ‘자존심 싸움’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국문학에 대한 편견을 벗고 바라본 영국작가, 로렌스

하지만 이 자존심을 과감하게 내려놓은 이가 바로 D.H.로렌스이기도 하다. 당시 영국인이었던 로렌스가『미국고전문학연구』란 책을 출판했다는 것 자체가 영국문학계로선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로렌스는 문학을 순수문학 그 자체로 대하면서 미국고전문학을 훑어주는 비평가로서의 진수를 그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이 책은 비평서이다. 외설작가 로렌스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할 정도의 탁월한 책이라고 개인적으로 평가해본다. 로렌스의 이 책을 보고 내가 로렌스란 작가에 대한 편견을 벗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레이먼드 카버가 시를 쓰다

아무튼 카버의 단편이 주는 미학의 힘은 카버의 일상의 힘, 관찰의 힘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레이먼드 카버가 시를 썼다는 사실이 또 다시 심쿵하게 했다. 레이먼드 카버는 비가 많이 내리는 동네, 오리건 주에서 태어났다. 이 시의 제목도 <비>이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하루 종일 이대로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잠시 그 충동과 싸웠다.

 

 

그러다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항복했다. 비 내리는 아침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기기로.

 

 

나는 이 삶을 또 다시 살게 될까?

용서할 수 없는 똑같은 실수들을 반복하게 될까?

그렇다. 확률은 반반이다. 그렇다.

(시로 납치하다, 106p)

 

 

 

어떻게 이렇게 현실적인 고백이 있을까? 이 시는 10대에 첫눈에 반해 결혼을 한 첫사랑인 아내, 하지만 육아와 생계의 무거운 짐,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를 술로 풀려다 알코올중독이 되고 결국 그 아내와 이혼하고서, 이제 자신의 인생의 굴레에서 조금 벗어나 안정을 찾았을 때 쓴 시라고 한다. 그의 인생은 실수투성이였다. 10대에 결혼을 하다니....부터 시작해서 끝이 없는 실수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실수, 우리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 불행? 우리도 예외일 수는 없다. 많은 이들이 카버가 폐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비평가들의 ‘절반 이상’이 말한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실제로 받진 않았지만, 내겐 레이먼드 카버는 이미 노벨상 작가인 셈이다. 치버와 함께 릴레이소설을 쓰기도 했던 카버, 너무 탁월하다. 단편 <기차>가 바로 치버에게 바치는 그 릴레이소설이다.

 

 

“암시가 가장 중요한 거야.”(237p)

 

 

 

No pain, No gain

카버에게 ‘불행’이 없었다면, 진정한 카버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카버의 인생에 불행이 암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인생 중간에 어찌 알았겠는가!

 

 

헤르만 헤세는 종교적인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세 번이나 결혼을 했다. 전쟁반대론자로서 당해야 할 무수한 출판금지, 헤세는 히틀러 집권 기간인 1933-1945년 사이 독일에서 총 20권의 헤세 저서가 나왔지만, 고작 481권의 문고본 밖에 팔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동생 한스가 자살을 했다...하지만, 헤세는 그래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그리고 85세에 세상을 떠난다. 카버는 노벨상도 못 받았고, 중년의 나이에 죽었는데, 그래도 헤세는 좀 더 낫다. 하지만, 그 누구의 불행의 경중을 가타부타하며 논하겠는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작가들의 불행을 철저하게 존중한다!!! 레이먼드 카버가 담배꽁초를 들고 있는 사진
나는 작가들의 불행을 철저하게 존중한다!!! 레이먼드 카버의 사진출처: http://lagoazul.tistory.com/9>

 

 

레이먼드 카버도, 헤르만 헤세의 스토리도 우리에겐 新Knulp 적인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작품도, 삶도, 인생도 거울과 같이 우릴 비추며 각성시키는 존재, 크눌프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가 그런 이야길 했는데, 누구인지는 기억을 못하겠다.

 

‘그 사람의 성공의 요인은 바로 불행이었다’

 

 

 

Epilogue...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그러니 평생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19p)

 

 

 

우리는 모두 크눌프Knulp와 같은 존재이다.

크눌프Knulp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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