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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탐독: 탐서/Book Review

by 카알KaRL21 2021. 6. 2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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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가 흔히 지인들의 표정을 보고 질문을 던진다.

 

 

“무슨 일 있니? 얼굴이 왜 그래? 힘든 일이라도 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상대방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대답이 ‘아무것도 아닐 수가 없다’. 여기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출처: https://www.deviantart.com/)

 

 

아무것도 아니면서도 모든 것인 성지(聖地), 예루살렘

올랜드 블룸이 주연하고, 리들리 스콧이 주연한 영화 <Kingdom of heaven>은 십자군 전쟁이야기를 다룬다. 이 영화에서 마지막 대목에서 주인공 발리앙(올랜도 블룸)이 이슬람군의 살라딘 장군에게 질문을 한다.

 

“당신에게 예루살렘은 무엇이냐?”

 

살라딘이 대답한다.

 

“Nothing.”

 

살라딘은 이슬람군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곧 이어 등을 돌려 다시 한 마디 더한다. 두 손을 주먹 쥐어 부딪히면서 덧붙인다.

 

“Everything!”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은 아무것도 아니면서도 모든 것인 장소이자 바로 성지인 것이다.

모든 전쟁이 그러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듯이,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이 전쟁의 대의명분이 감싸고 있는 본질적인 질문, ‘이 전쟁은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십자군 전쟁에 대한 관심이 생겨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전쟁>을 중고로 삼만원 구입하여 모셔두고 있다. 언젠가 읽을 것을....ㅋㅋ

 

 

내가 여기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살라딘이 남긴 말에 의미를 두고 싶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It's nothing, it's everything, it's me.”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 되어버린 이데올로기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었 때다. 이 소설이 다루고 이는 시대를 흔히 ‘민족사의 매몰시대’, ‘현대사의 실종시대’라고 한다. 코에 걸면 코걸이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던 시대였다. 소위 빨갱이라고 불리는 좌익 이데올로기에 의해 흡수되기 전, 등장인물 중 염상진은 지주인, 김범우의 부친에게 찾아가 자신에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도록 박토라도 빌려달라고 한다. 염상진의 태도에 김범우의 부친은 젊은이의 패기와 담백함에 흠모되어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염상진도 빌려준 농지에 대해 황송할 만큼 고마워한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가난에 쩔어 살았던 염상진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져든다. 그리고서 이전의 은인이었던 지주, 김범우의 부친도 인민재판에 세운다. 다행스럽게도 덕이 많았던 김범우의 부친은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염상진은 아버지의 목숨을 부지시키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정신은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염상진에게 결코 고마워할 것 같지가 않았다.’(1권, 165p)

 

 

이념은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아무것도 아닌 이념은 어떤 이들에겐 모든 것이 되어버렸다. 김범우의 부친은 이 일로 인해 얼마 후에 죽는다.

 

 

아무것도 아닌 이념과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시인 최승호의 시집에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라는 제목의 시는 없다. 하지만 그 특별한 메시지는 시에 녹아나 있다. 한번 읽었지만, 시집 제목만 기억이 또렷하지, 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최승호의 시집이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그리고 <너>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모든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시인 최승호의 접근은 사람과 사람 사이, 나와 너의 사이에서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라는 관점이 적용된다는 말이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너’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너’와 관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을 ‘모든 것인 나’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아닌 너’라고 대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최승호 시인은 이것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나라는 자신, 존재와 관계된 사물과 사람과 모든 것들이, 심지어 내 안에 머무는 세포와 조직과 뼈와 오장육부와 육체, 더 나아가 신(神)과의 관계에까지도 확대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시집이 옆에 있다면 들추어도 보고 싶은데, 빌려서 읽었던 지라 더 이야기하지 못함을 이해해주길 바라.

 

 

 

 

나는 여기서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와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너’가 만난다는 것을 기억해뒀음 한다. 우리는 아무리 고령화사회를 산다 하지만, 100년이란 경계선에서 얼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우리는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기에 더욱 소중한 나, 하지만, 저 너머에 ‘나와는 또 다른 나’인 ‘너’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면서도 모든 것인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우리나라>

김형석 교수가 쓴 『왜 우리는 기독교가 필요한가』에 보면, 종로에서 세무사를 하던 최 선생 이야기가 나온다. 세무사의 일을 보던 최 선생은, 우리나라 마라톤을 개척했던 손기정 옹(2002년 별세)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손기정 옹이 오셔서는 최근에 상을 하나 받아 상금이 약간 생겼다. 그 상금을 쓰기 전에 세금을 먼저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왔다며 납세 절차를 밟고자 했다. 최선생 왈,

 

 

 

 

“선생님은 연세도 높으시고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시니 신고 안 해도 괜찮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한평생 사는 동안 대한민국이 주는 혜택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 공자 돈이 생겼을 때 세금 좀 내고 가면 내 마음이 편할 것 아닌가. 날 좀 도와주게.”

 

 

 

 

최 선생이 세금을 계산해서 그 내역을 내밀었다. 손기정 옹은 왜 이것밖에 안 되냐면서, 좀 더 많이 내는 방법도 있지 않느냐고, 그렇게 계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그가 많이 내는 쪽으로 계산해서 내역을 보여드렸더니, 그제야 그만하면 됐다고 기쁜 얼굴로 만족하셨다고 한다.

 

 

 

 

최 선생은 김형석 교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선생님, 사실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제가 나라에서 주는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어른이 와서 그런 얘기를 하고 가시니까, 나라 없는 때에 사신 분들은 우리하고 생각이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더니 저한테도 일제강점기를 사셨으니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나는 해방 후 2년을 북쪽에 있다가 나왔습니다. 그때 대한민국이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내가 대한민국의 품으로 오지 못했다면 지금쯤 내가 세계 어디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때 대한민국이 날 받아줬으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비록 대한민국을 위해서 도움을 주지는 못해도 그 사실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이 대목을 대하면서, 참 우리 세대는 조국을 잃어 본, 나라를 잃어 본 경험이 없기때문에 나라와 국가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손기정 옹 같은 분이나, 김형석 교수는 ‘대한민국의 소중함’을 아시는 분들이시다. 나라와 국가는 어쩌면 너무나 우리에겐 당연하게 존재하는 배경인 셈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감사함이 없을 수 있겠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인 나의 나라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봤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인 인생, 삶

한번씩 소통전문가 김창옥씨의 <포프리쇼>를 본다. 김창옥 교수가 영화배우를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알게 된 영화감독이 그의 강의를 들으러 왔다. 강의를 진행하던 중에 김교수가 영화감독에게 어떻게 해서 영화감독이 되었고 영화감독을 하고 있느냐고. 무언가 대단한 비전과 이야기가 튀어나올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김 교수가 이 의외의 대답을 해석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란 말은 <생존>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말이고, 그 생존과 생계를 위해 감독을 한다는 말이다. 그 단순명쾌한 대답에 김창옥 교수는 <가장 기초적이고 먹고 살기 위한 일이 가장 숭고한 일이고, 거룩한 일이다>라고 했다. 근데, 그 말이 내게 굉장히 울림 있게 다가왔다. ‘밥 먹고 살기 위해서’우린 살아가지만, 삶은 여전히 경이로운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먹고 사는 문제’까지 아주 중요하게 거론했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먹고 사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거룩하고 경이로운 일이다.

내가 그로테스크한 대의명분과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하는 그 무엇도 나름 위대하겠지만, 가장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며, 별볼일 없게 느껴지는 먹고 사는 삶이 가장 위대하고 존엄한 사명이 아닐까 싶다.

 

 

 

 

삶은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다. 그 인생의 큰 그림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우리는 지금도 하루의 퍼즐을 끼우고 있는 셈이다.

 

 

 

 

Epilogue...

 

오늘 하루,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모든 것인 나의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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