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며 버티는 삶에 대하여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는가?
대학 때 연극공연을 한 적 있다. 그것도 <로미오와 쥴리엣>. 배역은? 당연히? 로미오였다. 의아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그때는 가슴에 터질 듯한 뭔가가 있어서 분출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는데, 학회장이 나더러 ‘로미오’를 하라고 했다. 그때 4년 사귄 여자친구를 떠나보내고 학교생활은 거의 불안불안했던 나였다. 마지막 학기에는 학사경고까지 받아서 코스모스 졸업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단번에 승낙했다. 그냥 뭐든지 해보고 싶었다. 이제껏 해 보지 않았던 영역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그런 엉뚱한 에너지원에 의해, 암튼 원어공연을 했었다. 연극을 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가 대사를 치면서 침을 많이 튀었다는 것이다.ㅋㅋ 하지만, 연기에 과도 몰입을 하니 관객들이 웃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로미오와 쥴리엣>, 사랑하는 연인이 죽은 것을 알고 같이 죽는다는 이야기. 사랑하는 사람이 부재하는 데서 오는 절망감이 죽음으로 결론이 난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 삶이 가능한가?’, ‘사람이 사랑 없이 살아 갈 수 있는가?’라는 것이 주제이다(<자기 앞의 생> 첫번째 컬러판은 일러스트가 들어가 있어 읽기가 쉬울 것이다. 로맹 가리를 쉽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니 추천!)
세상 천지에 마음 둘 곳 없는 고아와 같은 처지의 모하메드는 자신의 생을 ‘내 빌어먹을 생’(271p)이라고 했다.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로자 아줌마에게 맡겨진 자신의 생을 그렇게 표했다. 상처투성이의 이 14세 소년은 자신의 나이가 10세인 줄 알고 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요, 상처다발인 모하메드에겐 머리 속에 끊임없이 맴도는 질문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이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계속 그녀가 그리울 것이다....라몽 의사 아저씨는 내 우산 아르튀르를 찾으러 내가 있던 곳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필요로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343p)
이야기가 시작하기 전에 책 앞부분에 이런 말이 있다.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야피, 라우드 알 라야힌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남녀관계의 사랑에 국한되지 않는 듯 하다. 그 사랑은 하밀 할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인정’이란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만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137p)
어디 의지할 데 없는 모하메드에게 사랑, 인정은 인생을 버팀목이자 기둥이었다. 탁아소와 같은, 그리고 그곳에 모인 애들은 전부 고아와 다를 바 없는 집,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에서 함께 사는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았을까? 학교를 다니고 싶어도 갈 수가 없고. 정말 ‘빌어먹을 인생’인 모하메드는 자신에게 손 내미는 롤라 아줌마나 나딘 아줌마에게 아예 이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하메드의 마음에는 68세의 95kg의 거구의 ‘엉덩이’로 생계를 유지했던 전적이 있는, 유태인 포로 수용소에서 비참함을 경험한 적이 있는, '그동안 나는 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온갖 끔찍한 짓을 다 당했다'(304p)고 고백한 로자 아줌마가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애증관계가 아니라 그것은 ‘사랑’이었다.
소설을 읽고 소설의 기운이 내 전신을 감돌 때 느끼는 그 무엇...로맹 가리구나! 이런 느낌! 전율이다.
사진을 보면, 마호메트가 우산을 가지고 있다. 이 우산은 아르튀르이다. 이것은 단순히 마호메트에게 장난감이 아니다. 이것은 마호메트의 친구이자 동지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살 수 있을까? ‘누군가’를 사랑해야 살 수 있지 않을까?
로자 아줌마 곁을 끝까지 지키는 소년 마호메트의 마음이 너무 짠하다.
로맹 가리가 왜 에밀 아자르란 이름으로 이중 작가활동을 했는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에 대한 비난과 오해들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내 삶의 의미>리뷰에서 앞전 다뤄서 건너뛰겠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로맹가리는 『자기 앞의 생』에서도 한 사람, 로자 아줌마를 향한 사랑을 디테일하게, 그러면서도 지독하게 그려주고 있다. 14세 소년이었기에 가능한 설정이었다. 더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대방출 될 것 같아 멈춘다.
작가의 마음을 여행하는 것도 참 즐거운 일이구나 싶다. 로맹 가리를 향한 나의 이런 맘도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나?
사랑이 없다면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허지웅의 에세이 <버티는 삶에 관하여>에 보면
'마음속에 오래토록 지키고 싶은 문장을 한 가지씩 준비해놓고 끝까지 버팁시다'(5p)
라고 이야기한다. 버티는 것도 사랑해야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로미오와 쥴리엣>은 문학작품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로 인해 비극적인 결론이 났지만, 우리의 생은 그런 비극이 발생해선 아니 될 것이다. 사랑하면서 버티는 것이다. 가장 먼저, 나를 지독하게 사랑하면서 버티는 것이 <자기 앞의 생>에 대한 책임이 아닐까 싶다. 버티는 것 자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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