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나는 단편소설은 좋아하고 자시고 뭐 그런 생각이 평소에 없었던 인간이다. 좋으면 읽고, 그런거지 굳이 찾아서 읽지 않았는데, 체호프S(체호프와 친구들?)의 단편은 그렇지가 않다. 이 맛은 또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관리의 죽음>
체호프의 맛은 1883년에 발표한 <관리의 죽음>에서 확실히 맛볼 수 있겠다. 회계원 이반 드리트리치 체르뱌고프는 오페라 공연을 관람 중에 재채기를 한다. 불가항력적인 재채기였다. 근데 그게 하필이면 운수성에 근무하는 브리잘로프 장군에게 침이 튀긴 것이다. 체르뱌고프는 장군에게 계속 사과를 한다. 사과를 한번 하고 끝나면 좋은데,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제가 침을 튀겼습니다, 각하....용서하십시오....전 그저...다만...’
‘허, 정말....나는 벌써 잊어버렸다니까. 아직도 그 얘기요!’
<잊어버렸다고 하지만 눈에는 원한이 담겨 있는 걸.>
체르뱌고프의 생각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자신의 실수를 아내에게 이야기했지만, 아내는 대수롭지 않게, 가볍게 여겼다. 아내는 브리잘로프 장관이 다른 부서 사람임을 알고 안심했던 것이다. 아내는 세심하게 구는 남편에게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내일이라도 사과할 겸 장군을 찾아뵈라고 한다.
브리잘로프 장관은 자길 찾아와 또 사과하는 체르뱌고프를 보고 의아해한다.
‘여보세요, 날 놀리자는 겁니까, 뭡니까!’
.......
‘꺼져!!’
‘뭐라고요?’
‘꺼지라니까!!’
체르뱌코프의 뱃속에서 무언가가 터져버렸다.....집으로 돌아온 그는 관복을 벗지도 않은 채로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죽었다(12p).
마지막에
'그리고....죽었다'
이 문장으로 단편이 끝이 나는데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 단말마적인 표현이 독자들로 하여금 생각하게하고 여운을 길게 준다. 아 이게 체호프였구나! 싶었다.
<내기>
부자 은행가와 젊은 변호사가 내기를 한다. 핵심만 말하자면, 젊은 변호사는 자신의 자유를 걸고, 은행가는 200만 루블을 건다. 15년 동안 감금생활을 견디면 변호사는 내기에서 이기고, 은행가의 200만 루블을 자신의 상금으로 받게 된다. 1885년 11월 14일 12시까지만 버티면 된다. 변호사는 자신의 젊음을 저당 잡힌 대신에 200만 루블을 받게 되는 것이다. 변호사는 감금상태에서 세상의 수많은 서적들을 탐닉하고 지혜와 지식을 쌓게 된다.
‘지칠 줄 모르는 인간의 사고 능력으로 몇 세기에 걸쳐 이룩해 낸 모든 것들이 나의 두개골 속에서 작은 언덕으로 쌓였다.’(145p)
변호사는 이제 몇 시간만 버티면 200만 루블의 상금을 받으면서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나는 그대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한 때 천국을 꿈꾸듯 갈망했으나 이제는 하찮게 보이는 이백만 루블을 거부하겠다. 그 돈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기 위해 나는 약속한 기한이 다 되기 다섯시간 전에 여기에서 나갈 것이며, 그럼으로써 스스로 계약을 위반하는 바이다....’(145p)
변호사의 이 편지를 읽은 은행가는 평생 느끼지 못한 자괴감과 자기혐호와 수치심을 경험한다. 이백만 루블을 줘버리면 자신은 파산하게 되는 처지가 되어 염려하고 있었는데, 젊은 변호사가 의외의 반응을 보여 그는 흥분한 눈물을 훔치며 잠을 설쳤다....
보편적인 내기의 수위라면, 15년을 저당잡힌 변호사의 동선은 당연히 금전적인 보상이 주어져야겠지만, 체호프는 여기서 반전을 취한다. 그게 체호프의 백미!
현대판 커콜드, <베짱이>
체호프는 의사였다. 단편 <베짱이>는 자신의 의사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바람피우는 아내 올가 이바노브나, 그리고 곁에서 죽어가는 의사 드이모프의 이야기이다.
‘...디프테리아균이 코로 전이됐다는 걸 그 사람이 발견했죠. 나 참, 슈레크가 다 뭡니까! 요는 슈레크래 봐야 별 수 없다는 겁니다...’(75p)
커콜드란 단어가 있다.
‘아내가 공공연히 바람을 피우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참고 지내는 멍청한 남편’을 일컫는 말이다.
과거 유럽 왕실에서 귀족 부인들을 첩으로 삼고 그 남편들에게 작위를 주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들이 대표적인 커콜드의 사례였다(존 치버의 『팔코너』,42p). 의사 드이모프는 근대판 커콜드인 셈이다.
<공포>
<공포>는 한 부부의 집에 남편의 친구가 방문한 이야기이다. 마리아 세르게예브나가 남편(드미트리 페트로비치)이 외출한 틈에 남편 친구와 사랑을 나눈다. 두 사람의 애정행각이 끝나고 방을 나설 즈음에 새벽 세시에 남편이 모자를 놔두고 왔다며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다.
‘그는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나는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놈이었던 모양입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이해한다면...그렇다면 당신에게 축하를 드리지요. 내 눈에는 사방이 컴컴해 보여요’(33p)
남편이 아내의 외도를 눈치챘을까? 자신의 친구이기도 한 드미트리 페트로비치와 자신, 둘 다 공포를 느꼈다.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드미트리 페트로비치의 공포는 나에게도 옮겨졌다....’
‘나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어째서 꼭 이런 식으로 끝나게 되었을까? 다른 방식은 없었나? 그녀는 무엇 때문에 나를 심각하게 사랑해야만 했고 그는 왜 모자를 가지러 내 방에 나타나야만 했을까? 그런데 모자가 여기서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날 그는 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그리고 그 이후로 다시는 그 부부를 만나지 않았다. 그 부부는 지금도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여운을 줄려고 해도 이렇게 줄 수가 있을까 싶다. 체호프, 체호프...단편소설의 완성자라고 하는데, 단편이 이런 강렬한 맛을 주는구나!
‘미국의 체호프’를 만나다.
늦가을에 단편소설은 어떤지. 내가 왜 체호프S라고 했는지 이해할 것이다. 체호프의 계보를 잇는 레이몬드 카버이다. 어쩌다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읽었는데, 아...이게 정말 이런게 ‘카버의 백미구나!’싶었다. 이렇게 연결과 상징과 메타포와 상상력을 흩어 뿌려놓아 독자를 추리하게끔 하는구나 싶다! 왜 레이먼드 카버를 ‘미국의 체호프’라고 하는지 알 것 만 같다. 체호프의 단편소설집의 맛을 조금 맛보았는데, 그 맛이 레이먼드 카버에게서 현대판 버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기에>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 단편소설집에는 <너무나 많은 물이 집 가까기에>이 이야기가 묘한 매력을 발하고 있다. 스튜어트와 고든 존슨, 멜 던과 번 윌리엄스는 포커를 치고 볼링을 하며 낚시를 한다. 그들은 가정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텐트를 치기 전에 한 소녀를 보았다. 그들은 머리를 식힐겸 힐링 낚시, 힐링 여행을 온 것이다. 그런데, 소녀의 사체를 발견한다.
“그들에게도 친구들이 있겠죠. 살인자들 말예요. 그렇지 않다고 할 순 없겠죠.”(136p)
“제기랄, 자기들 일에나 상관할 것이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얘기해봐. 들을테니니까! 나만 거기 있었던 게 아냐. 우리는 얘기를 했고 결론을 내렸어. 뒤집을 수 없는 노릇이야. 우리는 차에서 오 마일이나 떨어져 있었어. 당신 판단은 인정할 수 없어. 내 말 듣고 있어?”(124p)
나머지 사람들은 모래를 발로 차며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들은 피곤하며, 늦은 시간이고. 어쨌든 이 여자애가 어디 다른 곳으로 가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나일론 줄을 찾아 그녀의 손목을 묶은 다음 나무에 걸었다....그날 밤 그들은 물고기와 감자 요리를 했고, 커피와 위스키를 마신 다음 요리 기구와 접시들은 챙겨 강으로 내려가 여자애가 있는 그곳에서 설거지를 했다....스튜어트가 전화를 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햇빛 아래에서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는 보안관에게 그들의 이름을 말했다. 숨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부끄럽지 않았다. 그들은 누군가 오면 방향을 알려주고 진술서를 작성하기 위해 기다리겠다고 했다(126-127)..
어떻게 이 짧은 이야기 가운데 이런 많은 메타포와 복선을 깔아놓을 수 있을까?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짜릿함을 군데군데 박혀 있다. 이 이야기에서도 살인자가 낚시꾼들이란 말인지, 낚시꾼 중에 한 사람이란 말인지...기묘하다. 미국의 중산층의 보이지 않는 아픔들, 사회상을 반영해주는 소설이다. 살인사건이 났는데,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처럼의 힐링 여행, 휴가를 방해받고 싶지 않아 했다. 미국 사회의 ‘무관심의 냉기’는 그 나라만의 것이 아니다.
스튜어트가 범인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내 가슴과 다리를 바라본다. 그가 그렇게 했다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이봐요, 예쁜이.”
그가 말한다.
“단지 도우려는 것뿐이오.”(134p)
그런데,
“그래, 그를 붙잡았대요. 그게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오늘 아침에 체포했어요. 오기 전에 라디오에서 소식을 들었어요. 이곳 읍에 사는 남자애래요.”(135p)
살인사건이 났고, 나중에 알고 보니 살해당한 소녀는 스튜어트의 아내가 어릴 적부터 아는 애였다. 스튜어트 부부는 아들 딘이 오기 전에 부부관계를 하기 위해 서두른다.
“딘이 오기 전에. 서둘러요.”
....하지만 나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그토록 많은 물이 흐르니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137p)...
이 시큼한 분위기, 문장의 구성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복합적으로 구성하였다. 그래서, 몇 페이지 안 되는 짤막한 이야기인 데도 메시지는 장중하다. 여운이 깊다. 단편을 읽는데, 문장을 몇 번씩 읽었는지 모른다. 이게 카버의 매력이구나 싶다. 마치, 김영하의 추리소설을 보는 느낌, 영화 <살인의 추억>같은 느낌이랄까! 이 단편의 느낌은 그러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그런데 끔직한 건, 정말 끔찍한 건, 한편으로는 좋기도 한 건데, 우리를 구원할 은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 만약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이런 말을 해서 미안해요-바로 내일 우리 중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상대, 그러니까 다른 한쪽은 한동안 슬퍼하다가도 다시 기운을 차리고 곧 다른 누군가를 다시 만나 사랑을 하게 될 거라는 거야. 그러면 이 모든 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모든 사랑이 그냥 추억이 되겠지. 어쩌면 추억조차 되지 않을 수도 있어. 내 말이 틀렸어? 근거가 없나? 내 말이 틀렸다면 바로 잡아봐. 난 알고 싶어. 내 말은, 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거야.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인정하는 바일세.’(215-216p)
사랑에는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 이별에는 상실감과 상처로 인한 슬픔이 있지만, 그 슬픔 후에는 과거는 추억이 되든가 아니면 레테가 되던가 그리고서 우리는 새로운 사랑을 마주하게 된다. 20대 때 연인이었던 여친은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사람으로 인해 치유될 수 있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남겼었다. 당시 그녀와 나는 둘 다 이별로 인한 상처로 아파하는 중이었다. 그 이별에 대한 공감이 두 사람의 애정에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후에, 『대성당』과 『제발 조용히 해요』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단편집은 김겨울이 귀로 읽으면서 지하철이던가 거기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단편이 바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인데, 이것도 또 기대가 됐는데, 역시나였다! 난 김겨울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김겨울을 이렇게 자주 언급하게 되는 걸 보니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마도 내가 보지 못했던 양서들을 추천하는 바람에 내가 읽고 받은 것들이 많아서 더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교외의 체호프’를 만나다
'교외의 체호프' 존 치버의 장편, <팔코너>
어떤 이는 ‘카버보다는 치버가 더 좋다’는 말을 했다. 카버의 매력을 알고 있는 내가 치버의 일기만 맛보고, 그의 단편집이 어떤 매력을 발산할지 너무 기대가 되었다. 그래서 결국 『기괴한 라디오』를 빌려서 읽다가 결국은 구입해서 완독했다.
존 치버의 장편소설 『팔코너』는 정말 빠져드는 마력이 대단한 작품이다. ‘카버보다 치버가 더 좋다’는 말을 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팔코너, 맛있었다는!
체호프의 느낌을 주기에,
카버를 ‘미국의 체호프’라 하고,
치버를 ‘교외의 체호프’라고 했을 것이다.
조소에서 보면, 사방에서 감상할 수 있는 것을 ‘환조’, 한쪽 방향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부조’라 한다. 하지만 카버와 치버를 <환조 VS 부조>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 그냥 <양각 VS 음각>, <음각 VS 양각>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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