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포크너의 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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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의 곰

탐독: 탐서/Book Review

by 카알KaRL21 2021. 4. 3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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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곰'에 대한 리뷰이다. 작품 '곰'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과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뜬다'에 대한 내용도 콜라보한 포스팅이 되겠다.

 

 

윌리엄 포크너의 '곰' 사진
윌리엄 포크너의 '곰'

 

 

 

자연에 갑질(?)하는 인간의 초상화

 

 


 

 

1 알베르 카뮈는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이다”라고 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포크너를 칭찬했다. 

 

윌리엄 포크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노벨문학시상 연설에서 

 

‘마크 트웨인은 문학의 지도에 미시시피 강을 그려놓았다면,

50년 후 윌리엄 포크너는 미시시피 주를 21세기 세계문학의 랜드마크로 창조해냈다’

 

 

고 격찬하기도 했다. 포크너는 아무튼 범접하기 힘든 경지의 작기임에는 틀림없다.

 

 

 

 

 

2 나의 사견을 밝히자면,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인이라는 것이다. 미국인이란 말의 의미에는 미국이란 나라는 청교도적인 세계관이 기저에 깔려 있다는 말이다. 헤밍웨이가 『태양은 다시 뜬다』의 도입부에서 구약성경의 전도서의 구절을 인용한 것 또한 헤밍웨이가 미국인, 미국작가이기 때문이다. 한국 작가가 만약 기독교적인 철학적 바탕을 깔고 소설을 썼다면, 독자들이 접근하기가 훨씬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유교적인 세계관이 본능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포크너의 『곰』은 이런 기독교적인 창조의 가치관이 배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구약성경 창세기 1:27-28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개역개정)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 최초의 인류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고 관리하라고 하셨다. 인간의 자연만물의 관리자, 정복자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 ‘정복하라’는 말엔 오해의 여지가 존재한다. 모든 자연 삼라만상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는 말 그대로 정복자가 인간이란 느낌과 뉘앙스가 풍긴다. 하지만, 창세기의 이 구절에는 인간의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2가지의 책임이 깃들어 있다.

 

 

첫째, 개발과 계발의 책임이다. 자연 만물을 발전시키고, 문화를 창조하고, upgrade시키라는 말이다. 영어의 cultivate(경작하다, 농사짓다)란 동사에서 culture(문화)가 나왔다. 땅을 경작하는 농경생활의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에게서 문명이, 문화가 시작된다.

 

둘째, 보존의 책임이다. ‘정복하라’는 의미에는 파괴시키고, 짓누르고, 억압하고, 무조건적인 군림의 의미가 다분하다. 하지만 인류가 神으로부터 부여받은 정복은 ‘보존’의 책임이 존재한다. 이 말은 발전시키고, 개발시킨다는 명목하에 자연의 질서, 생태계의 뿌리까지 파괴해가는 인간의 개발은 조물주의 뜻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자연만물의 정복자라는 의미는 ‘관리자’란 의미가 더 가미되어져야 한다.

 

 

 

 

 

 

4 포크너는 『곰』에서 이런 기독교적인 철학 위에 인간의 책임을 지적한다.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땅을 창조하셨는지 쓰여 있습니다....인간과 그 자손들에게 땅을 이리저리 조각내 대대손손 영원히 침범할 수 없는 명의를 붙이라 하신 것이 아니라, 형제애를 바탕으로 익명하에 공동으로 땅을 보전하고 사용하라 하셨어요.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 요구하신 유일한 사용료는 연민과 겸허, 관용과 인내, 그리고 땀 흘려 식량을 얻으려는 노력 뿐이었습니다.”(103p)

 

 

하지만 인간은 자연이 주는 모든 혜택, 땅이 주는 모든 유익에 감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연과 땅, 환경을 파괴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불청객으로 전락하고 만다. 포크너는 여기 작품에서 숲 속의 수호신, 숲의 정령과도 같은 곰, 올드벤을 등장시킨다. 숲 속의 터줏대감처럼 든든히 지키고 있던 올드벤(곰), 종종 마을의 여러 이웃들의 가축과 재산에 해를 끼치는 곰이었다. 곰 사냥의 목적은 결국 성취된다. 십수년 동안 온 몸에 수십 발의 총알 자욱이 박혀있던 올드벤은 그렇게 죽는다. 포크너는 이 작품의 1, 2, 3, 5장에서 사냥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인간은 자연을 사냥하고, 사냥하고, 사냥한다. 개발하고, 개발시키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 사진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

 

문득 100년 전의 일본의 인기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行人)』에서 피력한 대목이 생각난다.

 

“자네가 말하는 불안은 인간 전체의 불안이지. 유독 자네 혼자만 괴로워하는게 아니라고 깨달으면 그만 아닌가? 결국 그렇게 유전해나가는게 우리들 운명이니까.”

 

“인간의 불안은 과학의 발전에서 비롯되네. 앞서가기만 하고 멈출 줄 모르는 과학이 일찍이 우리에게 멈추도록 허락한 적이 없네. 도보에서, 인력거로, 인력거에서 마차로, 마차에서 기차로, 기차에서 자동차, 그 다음엔 비행선, 그 다음엔 비행기, 아무리 가봐도 쉬게 내버려두지 않아. 어디까지 끌려갈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참으로 두렵다네.”(327p)

 

소세키는 100여전에 이미 ‘인간 본유의 불안’을 감지한 것이다. 계속되는 문화의 upgrade로 인해 인간은 덜 불안해야 하는데, 더 불안해 한다, 더 고독해진다.

     

 

 

5 마크 맨슨의 최신작 『희망버리기 기술』에서 이것을 ‘진보의 역설’이라 했다.

 

‘사람들은 사는 게 나아지면 나아질수록 더욱 불안해하고 더욱 자포자기한다.’(17p)

 

마크 맨슨은 설문조사 이야기를 한다. ‘1980년대 실시한 설문조사에 지난 6개월 동안 자신의 개인사를 몇 명이랑 상의했느냐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은 3명이었다. 2006년 다시 같은 설문조사를 했다. 가장 많은 대답은 ‘0’이었다’(18p)고 한다.

 

‘공짜 와이파이와 침대의 안락함에 젖은 오늘날의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엄청나게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는 말이다.’(21p)

    

 

마크 멘슨의 '희망 버리기 기술'
마크 멘슨의 '희망 버리기 기술'

 

다시 포크너의 책으로 넘어오자.

곰에게 soul이 있는가? 곰은 자연의 소울soul로 상징된다. 인간은 자연을 박해하고, 사냥하고, 단맛만 빼 먹고 방치하다가 폐기처분해버린다. 그런 문명의 본질을 포크너는 이 작품을 통해 지적한다.

 

 

 

6 포크너는 이 작품에서 두 사람(유형)의 캐릭터를 대조시킨다.

 

샘 파더스(아이작 매캐슬린) VS 벤 호겐벡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자, 우주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혼혈인 샘 파더스는 곰의 죽음과 함께 자신도 유명을 달리한다. 반대로, 올드벤의 최후를 칼질로 목숨을 끊어간 분 호겐벡에게는 곰은, 자연은 단지 정복의 대상으로만 영점조준된다. 아이작의 할아버지, 그리고 세대의 세대들 또한 그런 라이프스타일에 익숙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분 호겐백은 다람쥐들에게 총질을 하면서 소리친다.

 

“여기서 꺼져! 만지지 마! 아무것도 만지지 마! 다 내거야!‘(205p)

 

분의 모습은 파괴적인 정복자, 욕망가의 표상이 된 인간의 초상화이다. 포크너는 이런 분의 모습을 통해 개발은 실컷 하지만, 정작 보존의 책임을 망각하고, 유기하는 인류를 향해 경종을 울린 셈이다. 작품 중에 아이작 매캐슬린은 할아버지의 탐욕에 의해 일군 유산을 상속받길 거절한다. 4장은 21살이 된 아이작과 친척형 매캐슬린 에드먼즈 사이의 대화가 심오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 4장에 대해 말이 많다. 사냥이야기의 『곰』이란 작품에 꼭 이야기가 필요하냐며 부류와 그 반대의 부류이다. 내가 생각건대 이 대목이 있어 작품이 더 궁극적인 가치에 도달하는 느낌이다.

 

 

 

 

7 앞에서 헤밍웨이 이야길 했는데, 그 작품 『태양은 다시 뜬다』의 첫 장에 실린 구약성경의 전도서 1:3-6이 박혀 있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여기 보면, 인간의 세대는 유한하지만, 땅은 영원하다고 이야기한다.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땅은 죽지 않는다. 사양화 되거나 황폐해지긴 하겠지만. 허나 사람은 죽는다. 세대의 반복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땅을 소유하고자 한다. 과연 인간이 땅을 소유할 수 있을까?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땅을 소유할 수 있느냐 말이다.

 

 

 요즘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우리가 과연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소유물의 실체나 물건이나 유형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얼마만큼의 돈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얼마나 큰 저택이나 집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냥 백년 안팎의 ‘시간’과 내 몸을 뉘일 수 있는 ‘공간’만 소유하고 떠나가는 것이 아닐까? 아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흘러가는 것Flow...flow...flow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뜬다'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뜬다'

 

 

 

8 미투운동이 대두되면서 ‘권력의 갑질’에 대해 여기저기서 이야기가 많다. 갑질? 정말 무서운 것이다.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인간은 자연을 향해 권력의 자리에 군림하여 자연이 가만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고 갑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개발(계발)’과 ‘보존’의 쌍두마차가 제대로 달려야만 인간과 자연이란 이 우주공동체는 더 조화로울 수 있지 않을까? 공존공생(共存共生), 동거동락(同居同樂)의 처지에서 인류는 오히려 자연에게 갑질하는 권력의 횡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윌리엄 포크너는 이 작품을 통해 곰에게 갑질하는, 자연에게 갑질하는 인류의 초상화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9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이 읽히기가 힘든 이유는 아마도 포크너의 글이 스토리의 줄기만을 가지고 치고 나가는 스타일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의 기억, 회상, 과거, 현재...등등.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번역자는 포크너의 영어 작품을 번역할 때 상당한 고충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결국 번역의 기준을 

 

‘의미전달을 중시한 번역’(213p)

 

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말은 포크너의 글이 주는 매력이 번역과정에 다소 거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만큼 포크너의 언어가 대단하는 말이다. 이래서 text는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인데. 영어실력도 실력이지만, 게으름 탓에 작품이라도 읽은 것이 어디냐며 스스로 위로해 본다.

 

 

윌리엄 포크너의 위대한 작품 '곰'에 대한 리뷰를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 마크 맨슨의 '희망 버리기 기술', 그리고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뜬다'의 내용들을 콜라보하여 포스팅해 보았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

1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는 5살 때 아버지(해양학자)의 진로에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고 영국에서 철학과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특별히 이 『남아 있는 나날』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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