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 대한 책이다. 거기에 보면 ‘커피 반 잔’에 대한 일화가 있다. 수용소에서 매일 커피를 한 잔씩 포로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커피는 향긋한 향이 나는 아메리카노나 내가 매일 드리퍼로 내려 마시는 커피의 커피향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자랑꺼리인 맥심믹스 커피도 아니다(맥심믹스 커피를 외국인들이 그렇게 좋아한다고 한다).
수용소의 포로들은 목욕도, 심지어 세수할 물조차도 변변찮았다. 포로들 중에는 그 커피 한잔을 냉큼 다 마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커피 반잔은 마시고, 반잔은 고양이세수라도 하고 손도 씻고 그러했다고 한다. 수용소에서 세수는 무슨? 수용소에 있는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왜 그렇게 커피 반잔을 낭비한단 말인가? 수용소 내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들이 교차했을 것이다. 하지만, ‘커피 반잔’을 자신의 용모에 투자(?)한 사람들이 끝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다들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새삼스럽게 ‘커피 반잔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소통전문가인 저자 김창옥은 커피 한잔을 다 비운 사람들의 가슴에게 있었던 것은 ‘절망’이라고 했다. ‘커피 반잔’을 남겨두고 자신을 관리(?)했던 사람은 ‘희망’을 가슴에 담아두었다고 볼 수 있겠다. 굳이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갖다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절망은 희망을 좀먹는 좀비’와도 같은 것이다.
2
존 번연이 쓴 대작 『천로역정』을 읽었다. 크리스천들에겐 ‘성경 다음으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선전한다. 읽어 보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한다. 존 번연은 라이센스가 없는 설교자였다. 정식적인 신학수업 과정을 밟지 않았기에 당대의 교권에서 추방을 당한 셈이다. 그 결과는 그는 감옥에서 12년을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그 12년이 그에게 없었다면 과연 그의 작품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순례자인 ‘크리스천’(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이 동행자였던 ‘유순한’과 함께 처음 봉착한 위기는 바로 ‘낙담Despond’이라는 이름의 구렁텅이를 만나는 대목이었다. 같이 동행하겠다던 ‘유순한’은 이렇게 말한다.
“길을 떠나자마자 이처럼 험악한 사태에 맞닥뜨린다면 남은 여정이나 목적지에서 겪게 될 일은 더 말해 무엇하겠소? 살아서 이 늪을 빠져나가거든 그 멋지다는 나라에는 댁 혼자 가시꾸려. 난 이쯤에서 관두겠소.”(『천로역정』, 36-37p)
‘유순한’은 그 길로 낙담의 늪을 빠져나와 돌아가 버린다. ‘옹고집’은 처음부터 동행하기를 거부했는데, ‘유순한’도 ‘옹고집’의 길을 따라 가버린 것이다.
낙담이다. 낙심이다. 절망이다. 좌절이다.
우리 인생에 부딪히는 가장 큰 난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선 자리에서 내가 버틸 의지를 내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바로 낙담이고, 낙심이고, 절망이고, 좌절이 아닐까 싶다. 존 번연이 감옥생활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확신과 믿음에 따라 복음을 설교하다가 갇힌 절망적인 감옥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글을 썼다. 위화의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이란 책 제목처럼 그의 감옥은 ‘글쓰기의 감옥’이 된 셈이다.
3
잭 캔필드는 자신의 저서 『내 영혼의 닭고기 스프』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동의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두려움, 절망, 좌절, 낙담, 낙심, 트라우마, 실패감, 열패감 등. 그 모든 것들을 넘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는 우리다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존 번연의 주인공처럼, 낙담의 늪 너머에 멋진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다.
4
솔직히 나는 김창옥의 강의를 유튜브를 통해 많이 접했고, 중복된 내용도 많다. 그래서 더 빨리 속도감 있게 책을 읽게 된 지도 모른다. 김창옥은
라는 이야길 한다. 우리의 우여곡절의 사연들 뒤에 우리는 사연이 그림자가 되어 우리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언제쯤 ‘맨홀 뚜껑을 열고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내가 늘 애용하고 좋아하는 문구란 걸 여러분들은 아실 것이다)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해 댄다. 그 때 우리는 ‘커피 반잔의 힘’을 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5
문득 이전에 읽은 『헤밍웨이의의 말』에서 본 문장이 생각이 난다.
나는 작가는 아니지만, 종종 글과 글의 소재를 숙성시킨다는 대의명분(?)아래 글쓰기를 미룬다. 글쓰는 속도가 읽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는가! 하지만 헤밍웨이는 ‘규칙적인 양을 퍼내는 게 낫’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예는 존 치버의 생애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6
우리가 잘 아는 스티븐 킹은 그의 저서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자신이
라고 기술한다. 하지만, 그는
스티븐 킹은 세익스피어, 포크너와 예이츠와 쇼와 유도라 웰티 같은 작가들은 ‘천재이며 거룩한 우연의 산물이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재능을 갖기는커녕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다. 아니, 대부분의 천재들은 자기 자신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천재들이 불행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기들은 결국 우연이 빚어낸 괴물에 불과하다고(적어도 어느 정도는) 느낀다.’(172p)
“허파가 함몰됐군.”
“가슴에 튜브를 꽂아야 합니다. 스티븐. 약간 좀 아플 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319p)
그는 5주 후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꼬박 1시간 40분 동안 글을 썼다. 스미스의 승합차에 받힌 이후부터 그때까지 이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작업이 끝났을 때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으며 너무 지쳐서 휠체어에 똑바로 앉아 있을 기력조차 없었다. 골반의 통증은 숫제 재앙에 가까웠다. 그리고 처음 500개쯤의 단어를 쓰는 동안 유별나게 힘이 들었다. 마치 난생 처음으로 글을 써보는 것 같았다. 예전에 갖고 있던 글쓰기 요령도 내 머리 속에서 몽땅 사라진 듯했다. 나는 마치 시냇물 속에 비뚤비뚤 놓여 있는 미끄러운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힘없는 노인처럼 낱말 하나하나를 어렵사리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날은 영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오기를 가지고, 그리고 이렇게라도 계속하다 보면 곧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버텨낼 뿐이었다.’(330p)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을 이끌고 글을 써가기 시작한 스티븐 킹을 보면서 ‘역시 작가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커피 반잔의 힘’을 안 인물이었다.
7
‘글쓰기의 목적은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거나 데이트 상대를 구하거나 잠자리 파트너를 만나거나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글쓰기란 작품을 읽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울러 작가 자신의 삶도 풍요롭게 해준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글쓰기는 마술과 같다. 창조적인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생명수와 같다. 이 물은 공짜다. 그러니 마음껏 마셔도 좋다. 부디 실컷 마시고 허전한 속을 채우시기를.’(332p)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는 말은 그의 삶에서 녹아내린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글쓰기는 헤밍웨이처럼 매일 물을 퍼내고, 존 치버처럼 매일 지하실로 내려가는 일처럼, 스티븐 킹도 동일한 이야기를 한다.
글쓰기의 고전古典이라고 할 수 있는 스티븐 킹의 저서는 읽지 못하신 분이라면 추천한다. 왜 그 책이 고전인지 느낄 수 있다. 작가들이 다들 그렇지만, 유쾌한 재미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의 책의 <이력서>란 chapter에선 자기 이야기를 줄기차게 하고 있는데, ‘이 사람 괴짜 아니야?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이기도 하고...’ 뭐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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