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의 신간시집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는 시집에 게재된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시가 가슴에 다가와 이 시에 대한 느낌과 감상을 공유해 보고자 한다. 2022년 6월에 출간된 가장 따끈따끈한 그의 시집의 시를 한번 들여다 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사람들 너나없이
살기 힘들다, 지쳤다, 고달프다,
심지어 화가 난다고까지 말을 한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도
우리가 마땅히 기댈 말과
부탁할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일을 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낌없이 사랑해야 하고
조금은 더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소망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다림의 까치발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날마다 아침이 오는 까닭이고
봄과 가을 사계절이 있는 까닭이고
어린것들이 우리와 함께 하는 이유이다.
나태주의 최신간이다. 22년 6월에 나왔으니. 나태주가 2년 동안 하루에 하나씩 시를 쓴 것을 모은 것이라고 하는데. 책 띠지에 적힌 글귀이다.
"닿지 못한 2년, 하루 한 편씩 써내려간 나태주 신작 시집"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많은 이유와 핑계와 변명과 회피를 할 수 있지만, 나태주는 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이야기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말해준다.
지금 사람들 너나없이
살기 힘들다, 지쳤다, 고달프다,
심지어 화가 난다고까지 말을 한다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그냥 풀어헤치는 대목이다. 다들 힘겹다. 코로나팬데믹, 그 이후로 원숭이 두창이 발발했고 아직은 경미한 상황이다. 쉽지 않은 인생이다. 세계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아직 진행중이다. 인플래이션에다 인제 스태그플래이션까지 덥쳤다. 날씨도 폭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기 힘들다
-지쳤다
-고달프다
-화가 난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도
우리가 마땅히 기댈 말과
부탁할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나태주 시인은 이 대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를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기댈 말과 부탁할 마음'을 제시해 준다. 근데 말과 마음이라고 했다. 우리의 마음 속에 기대야 할 것이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일을 해야 하고
삶의 무게감이 너무 무겁고 힘들고 지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다. 밥맛도 없고 밥 먹을 의지조차 없다. 잠을 자고 싶은 욕구조차 사라진다. 잠이 와야 말이지. 마치 <나의 해방일지>의 구씨(손석구 분)처럼 매일 소주를 마시고 집 안에 소주병이 방안에 가득하게 진열해 놓은 것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때 시인은 떠올려야 할 단어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일을 해야 하고
밥을 먹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지만, 우리의 삶과 몸과 마음을 힘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신성한 일이기 때문에 밥 먹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삶이 너무 힘들면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자는 것도 모든 게 귀찮다. 그냥 삶을 확 놓아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숟가락을 들어야 한다'. 어차피 인생을 굴러가야 하는 것이고 조금 더 일찍 삶이 정돈되기 위해서라도 숟가락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이 굉장히 듣기 싫을 것이다. 왜? 뭐뭐를 해야 한다 이런 말이 절망에 빠진 사람에겐 가장 듣기 싫은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죽을 것 같은데 옆에서 충고하고 조언하는 인간은 정말 밥맛이고 꼴 보기 싫은 부류이다. 그때는 그냥 '숟가락을 들게 해 주는 일', 그걸 거들어주는 것만으로 고마운 노릇이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이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구도이다. 잠을 못 자면 미치고, 밥을 못 먹으면 죽는다. 그래서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리고 아무생각없이라도 일을 해야 한다.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위의 고통이 찾아 온다.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고,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노동이 주는, 일이 주는 행복감과 만족감이다. 일을 하면 찾아오는 결과물이 바로 성취감의 열매이다. 힘들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놓으면 안 된다. 숟가락을 들어야 하고 베개에 잠을 청하고 일을 해야 한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밥먹는 식사시간도 신성하다. '밥 먹는 데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다. 개라는, 동물일지라도 먹는 것을 방해해선 아니 된다. 먹는 것은 삶을 유지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동물조차도 생존본능을 무시해선 아니된다. 존중해 줘야 한다. 먹는 것, 자는 것, 일하는 것을 무시해선 아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낌없이 사랑해야 하고
조금은 더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
먹고, 자고, 일하는 것 외에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며 존재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누구도 무인도로 살아갈 순 없다. 인간은 섬이 아니라고 했던 영국시인 존 던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홀로 서야 하긴 하지만,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순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아낌없이 사랑해야' 한다. 왜 아낌없이 사랑해야 할까? 대충, 그냥 고만고만, SOSO하게 사랑하는 것은 표가 잘 나지 않는다. 사랑을 마음껏 하고, 아낌없이 해야 함께 하는 사람, 상대방이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그만큼 무감각하기도 하고 때론 무심한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유전자적인 본능이나 환경에 의해 이타심을 배워가는데, 그 배운다는 것은 책을 읽고 학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받아본 사랑의 경험과 용서의 경험과 용납과 포용의 경험이 있어야 만이 그걸 밖으로 표출할 수 있다.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자신이 직접 체득한 것이어야 한다. 때론 그런 것이 체득되지 못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론 사랑을 온전히 베풀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조금은 더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 아낌없이 사랑하려면 조금은 더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 '아낌없이'라는 말은 베푸는 대상을 위해 자신의 입장과 생각과 사견을 접는 것이다. 자신의 유익과 안전장치를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내 꺼를 조금 참을 줄 알아야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무엇보다도 소망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다림의 까치발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현실은 비록 절망적이고 비극적일 수 있지만, 거기에 함몰되지 않겠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시인은 '무엇보다도 소망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소망의 끈'...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둘째 아들이 밤에 잠을 잘려고 누웠는데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제 2주만 견디면 된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의 입에서 방학을 앞두고 하는 굳은 결의(?)의 문장이다. 너무 우습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그렇다. 아이에겐 방학의 소망이다. 방학이 소망ㅋㅋㅋㅋ 어린 아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모든 이들이 소망의 끈이 저마다 있을 것이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정말 금요일 오후만 기다린다. 휴일만 손 꼽아 기다린다. 힘들어도 연인을 만나는 데이트 시간만을 간절히 기다린다. 물론 그런 기대는 또 다른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배태하지만, 그래도 소망의 끈이고, 희망의 지푸라기이기도 하다. 비록 그게 한시적이고 임시적이고 순간적인 찰나의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순간순간의 바램들이 모이고 모여 조금 더 나은 하루 하루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기다림의 까치발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까치발이 뭔가? 뒷꿈치를 들고 발놀림이다. 우리가 뭔가를 기대하고 고대하면 목이 빠져라 기다릴 때 까치발을 하고 기다린다. 시인은 '기다림의 까치발'을 포기하지 말고 '내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준다. '기다림의 까치발'이 우리에게 있어야 우리가 '소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날마다 아침이 오는 까닭이고
봄과 가을 사계절이 있는 까닭이고
어린것들이 우리와 함께 하는 이유이다.
시인이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는 그 이유를 마지막 연에서 표현해주고 있다.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왜 절망적인데도 희망적으로 하루 하루 기대감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그 이유는 바로?
"내일은 또 다시 태앙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작품 <태양은 다시 뜬다>라는 제목처럼, 태양이 다시 뜨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에는 정말 아침이 올 것 같지 않지만, 매일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찬란한 태양은 자신의 존재를 보여준다. 폭염으로 인해 정말 너무 더워서 고생하고 있는 여름이 정말 계속 될 것만 같지만, 계절의 순환은 어김없이, 사계절의 순서는 변함없이 우리를 관통해 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태주 시인은 왜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가야 하고 희망을 노래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주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대목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어린것들이 우리와 함께 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자녀들, 다음 세대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어렵고 힘들고 자빠지고 무너진 삶이 현실이 있더라도 우리가 소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림의 까치발을 내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어린 것들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 곁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앞에서 인생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했다. 부모가 자녀에게 많은 것을 아낌없이 사랑하고 퍼주고 케어하기에 부모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모에게 자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위안이고 기쁨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부모는 삶을 한 번 더 놓고 싶을 때 그 부모를 잡아주는 존재가 바로 자녀, 어린 것들'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너무 힘겨울 때 누군가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6개의 까만 눈동자가 너를 지켜 보고 있다"
자녀들, 더군다나 미성년 자녀들은 부모의 돌봄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지속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구도가 그렇게 되어 있다. 서로에게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고 그렇게 영위하는 관계이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를 말해주는 듯 하다.
오늘은 무심코 들여다 본 나태주의 신작시집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에 게재된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시에 대한 감상과 해석을 나름대로 해 보았습니다. 나태주의 고백이 저의 고백입니다. "두 손에 아직 시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나태주 내상 브루투스 너마저도? (11) | 2022.07.13 |
---|---|
나태주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11) | 2022.07.08 |
서두르지 않아도 꽃은 핀다(자작시) (13) | 2022.06.30 |
나태주 시장길 (6) | 2022.06.27 |
나태주 그런 사람으로 (7) | 2022.06.23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