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의 시집에 게재된 '꽃.2'라는 시에 대한 감상과 해석을 포스팅해 보고자 합니다.
언제나 읽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는 단말마적인 단어, 그러나 깊이 있는 공감과 감동, 한번 볼까요?
꽃.2
예쁘다는 말을
가볍게 삼켰다
안쓰럽다는 말을
꿀꺽 삼켰다
사랑한다는 말을
어렵게 삼켰다
섭섭하다, 안타깝다,
답답하다는 말을 또 여러 번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리고서 그는 스스로 꽃이 되기로 작정했다.
시를 대하면 우리가 흔히 살아가면서 지나치는 것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 시인들 중에 제대로 수입이 좋은 사람은 상위 몇 %에 불과할 것이다. 그만큼 작가라는 직업이, 시인이란 직업이 박봉이기 때문일 것이다.
<파친코>의 저자, 이민진은 26살에 변호사 일을 그만두었다. 건강상의 문제로 일을 그만두고 그토록 쓰고자 했던 소설쓰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는 예일대학교의 역사학을 전공한 이력도 있다.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전 세계 속에서의 한국인'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면서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쓰고자 했던 소설을 쓰기만 하면 변호사 수입을 보상하고도 남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소설을 썼지만, 뒤돌아 볼때 그는 자신이 '분별이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의 성공적인 첫번째 장편소설<백만장자를 위한 공짜음식>이 나오기까지 무려 11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민진 작가의 경우는 드문 성공적인 케이스이다. 요근래 TV에서 박준 시인을 보았다. 그 시인도 성공한 케이스이다. 그의 부친이 트럭운전을 하는데, 이게 돈 좀 벌었으니 주위에 형편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라고 항상 주문한다고 하더라. 시인 나태주도 성공적인 경우이다. 시의 감수성을 가지고 문학의 감수성을 가지고 돈을 벌고 성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도 이런 글의 감수성을 통해 먹고 살 수 있다는 사회가 멋진 사회인 것 같다. 블로거들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문자letter와 글, 텍스트가 스마트폰에 가득 들어 있다. 사람들은 그 문자를 보기 위해 매일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거기에 있는 문자를 보기 위해서 말이다. 문자의 힘이 대단함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은 꽃을 보면서 '예쁘다', '안쓰럽다', '사랑한다', '섭섭하다', '안타깝다', '답답하다' 등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참았고 삼키고 또 삼켰다고 한다. 표현하고 싶었지만 표현할 수 없었던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이다. '너'를 두고 '나'가 어쩔 줄 몰라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돌연 이 시에서 시인은 또 다른 선포를 한다.
그리고서 그는 스스로 꽃이 되기로 작정했다.
이 말이 무슨 말일까?
뇌피셜로 해석해 본다. 꽃이라는 타자에 대해서 끊임없이 동경하고 사랑하고 애착을 가지던 시인이 '스스로 꽃이 되기로 작정'했다는 것인데. 이건 우리의 인생에 있어 누군가를 동경하고 부러워하고 그리워하고 그럴 수 있다. 평생 그러고 살 수도 있다. 평생 꽃에 대해 운운하기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이 꽃이 되기로 한 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흠모하고 동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이 그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자기가 꽃이 된다는 것은 굉장히 멋진 아이디어인 것 같다. 물론 그게 쉽지 않겠지. 우린 일평생 남의 꽃을 보면서 말만 무성하게 하고 눈길만 주고 이러쿵저러쿵 부러워하면서 살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꽃이 되면 된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소설가 이민진, 시인 박준, 나태주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내가 '꽃은 성공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무조건 그런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세속적인 성공, 부의 성고의 측면만 고려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오른 성공, 사람들에게 어느정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는 성공? 이 시를 해석하기를 자기계발적인 측면에서 보고 싶지는 않다.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드라마 <으라차차 와이키키.2>에 보면 이이경이 등장한다. 이이경은 단역배우이다. 배우로서 굉장히 성공하고 싶은 열망이 있다. 한번은 자신이 작품에서 무게감 있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게 되어서 굉장히 좋아라 했다. 하지만, 자신의 후배가 백을 써서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리고 자신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다. 시간이 지났다. 이이경에 다시 기회가 온다. 주인공을 맞서는 라이벌 역이라 비중있는 역할이었다. 자신이 직접 오디션을 보고 합격했기 때문에 너무 즐거워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전에 자신을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만든 그 후배의 입김으로 인해 자신이 출연하게 된 것을 알게 되고 분노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자리를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인생사가 모든 것이 아니냐는 후배의 말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연히 자신이 후배의 낙하산으로 출연하게 된 그 드라마에 원래 배정된 무명 배우가 감독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울먹이면서 자신이 10년동안 무명으로 지내다가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했는데, 이런 경우가 어디 있냐는 이야길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이경은 과거에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을 느끼면서 연기자로서의 삶에 대해 거의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여차저차해서 그 무명 배우를 만나게 되는데, 이이경이 자신이 연기를 내려놓고 싶다고 하자, 대뜸 그 무명 배우가 한 마디 던진다.
"스타가 되고 싶어서 연기하는 건 아니쟎아?"
무명 배우 자신은 연기가 좋아서 연기자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것이지, 스타가 굳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이야기하자, 이이경도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다들 스타가 되고 싶어한다. 다들 슈퍼스타가 되고 싶어한다. 자기 분야의 스타가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무명 배우의 말처럼 스타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 자신의 직업을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성공은 그 이후의 문제이다. 물론 성공이라는 척도가 사람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측정하기 애매한 대목도 있다. 유튜버 구독자 10만, 100만이 되어야 한다? 연봉이 1억, 10억이 넘어야 한다? 배우자가 엄청 미인이거나 꽃미남이고 재력이 넘쳐야 한다? 슈퍼리치로 불려야 하고, TV에 출연해서 인지도와 인기와 명성이 자자해야 한다? 권력을 얻어야 한다? 성공을 측정하는 방식과 기준은 너무나 다양하다. 나는 그런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외모나 피지컬이나 몸매나 헤어스타일이나 기럭지 같은 외적인 것들이 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노화가 진행중이다. 요즘 손흥민이 마수걸이 골을 넣지 못해 언론이 난리가 아니다. 그러면서 혹자는 손흥민이 에이징커브(Aging Curve)가 온 것이 아니냐는 이야길 한다. 스포츠스타가 어느정도의 나이대에 들어서면 하향곡선을 그린다는 말인데, 손흥민의 나이가 30이니 그런게 아닌가 하는 의문표를 던진다. 개인적으로 손흥민의 기량은 곧 부활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생은 태어날때부터 에이징커브가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다.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암튼 철학자 하이데거의 어려운 이야기를 이해하진 못해도 그가 이야기한 '죽음을 향한 존재 Being toward death'라는 말은 적절한 것이다. 요즈음은 모든 이들이 젊은 것을 선호한다. 동안을 선호한다. 나이들어보이는 것을 싫어하는 분위기이다. 다 마음은 청춘이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한번 사는 인생이니 슈퍼스타가 한 번 되고 죽으면 좋겠는데 실상 그게 쉽지 않고 상위 1%, 5%의 특권이기도 하다. 사실적으로 진단해 본다면 과연 내가 그런 슈퍼스타가 될 만한 자질과 기량을 가지고 있는가? 질문해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인생의 현실과 트렌드 앞에서 나는 과연 어떤 꽃을 흠모하고 바라고 동경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꽃이 될 수 있을까? 문득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하는 일과 JOB을 사랑하고 애착을 가지는 것 자체가 성공의 첫 단계라고 했다. 더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슈퍼스타가 되면 좋겠지만, 사람들 모두가 성공의 꽃을 피우기 위해 장미의 꿈, 백합의 꿈 등과 같은 화려한 꽃의 꿈을 꿀 수만은 없는 것이다. 들에 아무렇게나 핀 호박꽃, 클로버 꽃이라도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건 자기 합리화 일 수도 있다. 꽃이라고 하면 다들 장미 같은 이쁘고 아름답고 향기가 고운 꽃을 생각하지, 호박꽃 같은 별 볼일 없는 꽃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연의 모든 것은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것 같아도 다 질서가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혼돈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의 모든 만사는 질서가 어긋나면 혼돈과 카오스가 발발한다. 인간의 욕심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자연은 그렇지 않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는 첫 걸음부터가 바로 꽃이 되는 길이 아닐까 싶다. 장미꽃은 한번 피우고 아름답게 지켜보다가 끝이 나지만, 호박꽃은 장식용으론 별로지만 호박이란 열매를 인간에게 제공한다. 맛있는 식재료가 된다.
나는 과연 어떤 꽃이 되고 싶은가? 암튼...대단한 성공가가 되진 않더라도 나도 이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리고서 그는 스스로 꽃이 되기로 작정했다
그리고서 나는 스스로 꽃이 되기로 작정했다....
나태주의 <꽃.2>란 시에 대한 감상과 해석을 뇌피셜로 포스팅해 보았습니다. 시는 언제나 우리의 감성과 지성을 일깨우고 자극하고 도전하는 것 같습니다. 타자가 꽃이라면, 이제는 내 자신이, 내 존재가 꽃이 되고자 작정하는 점이 이 시에서 주목할 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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