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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탐독: 탐서/시와 케렌시아

by 카알KaRL21 2022. 5. 5.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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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 게재된 시 중에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라는 시가 있어 본인의 감상과 해석을 포스팅해 보고자 합니다. 과연 어떤 글이 나올지 기대감 반, 불안감 반으로 글을 한번 적어 볼까 합니다.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전화 걸면 날마다
어디 있냐고 무엇하냐고

누구와 있냐고 또 별일 없냐고
밥은 거르지 않았는지 잠은 설치지 않았는지
묻고 또 묻는다

하기는 아침에 일어나
햇빛이 부신 걸로 보아
밤사이 별일 없긴 없었나 보다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

 

 

 

 

제목이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라는 말에서 원래는 가까이 있었는데, 지금은 가까이 곁에 있을 수 없고 '멀리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관계인가 싶기도 하다. 그들이 이별을 하거나 헤어졌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1연에 보듯이 전화를 할 수 있고 안부를 물어볼 수 있는, 그것도 '날마다' 그렇게 물어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심리적인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는데, 물리적인 거리는 멀 수 밖에 없는 관계인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라고 말한다. 같이 있고 싶은데, 가까이 있고 싶은데 멀리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는 '도'에 뉘앙스를 느낄 수 있다.

 

 

 

서로의 안부와 신변과 안전에 대해 묻는데, 그걸 이제 시인은 2연에서 아침에 일어나 햇빛이 눈부신 것을 보고는 밤 사이 별일 없었다는, 안전하다는 것으로 심리적인 위안을 찾는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날씨가 좋지 않으면 병이 더 악화되는 환자일까? 어떤 이유와 상황으로 인해 멀리 있을 수 밖에 없지만, 밤 사이에 전화나 연락이 와서 큰 사고나 일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없이 무사히 잠을 잘 자고 일어나 햇빛을 눈부시게 맞이한다는 그 현실 만으로 안도감을 느끼는 쪽이 맞는 것 같다. 분명히 무슨 일이 생겼으면 연락이 왔고 전화가 왔을 것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밤새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는 게 시인의 마음을 더 안전하게 만든 것 같다.

 

 

'밤 사이 별일 없긴 없었는가 보다'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고 공간적으로 멀리 있을 수 밖에 없는 시인의 심정을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로 표현해 주고 있다. 이 두 사람은 언제 '가까이' 있을 수 있을까? 언제 전화로 하지 않고 서로의 얼굴을 몸, 신체, 물리적인 실체를 바라보면서 대화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는 시인만이 알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인의 상대방에 대한 물리적인 거리감을 어떻게 풀어헤치느냐 하면 4연에 대답이 기가 막히다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

 

 

1, 2연이 과거이고 3, 4연이 현재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건 가능성이 조금 약한 것이 1, 2연을 먼 과거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2연에 보면 '하기에 아침에 일어나...보다' 이 말투나 뉘앙스는 전혀 먼 과거의 느낌이 아니다. 바로 좀 전에 상황을 기록한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서로 멀리 있지만, 서로가 살아 있음에, 숨쉬고 있음에 지구 어느 쪽, 어느 편에서 숨쉬고 있음에 대한 '공존감'을 시인은,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율리시스>의 저자, 제임스 조이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임스 조이스의 명언 &quot;Absence is the highest form of presence.&quot;썸네일
제임스 조이스 명언

 

 

"Absence is the highest form of presence."

 

 

사랑하는 사람,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사람을 실상은 지금 옆에 둘 수 없고 가까이 할 수 없지만, 시인은 그 사람의 '부재감absence'을 오히려 '존재감presence'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대목이 바로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라고 한다. 아침 햇빛이 눈부심을 통해 시인은 '그대의 안전감'을 확인했듯이, 이제는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라는 하면서 지구의 존재감을 통해 '그대의 부재감'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겐 시간은 생명이다. 지금은 계속 시간은 지나가고 있고 흘러가고 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숫자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오늘따라 괜시리 시큼해지는 것은 우리의 시간, 생명의 길이가 계속 짧아진다는 현실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리얼리티이다. 언젠가 우리의 존재도 부재가 될 것이다. 우리 인생과 인간이 시간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할 때 존재감과 부재감은 제임스 조이스의 말 대로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존재한다고 기뻐하고 부재한다고 슬퍼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부재감을 어떻게 다루는가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지금 '없다'는 것이 슬플 수 있지만, 시인은 '없다'는, '멀리 있다'는 현재의 부재감을 '지구의 존재감'을 통해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시인이 지금 머무는 곳이 그대와의 추억과 기억이 많은 곳이면 추억을 소환시키면서 부재감을 존재감으로 더 환원시킬 수 있겠지만, 때론 그런 추억소환이 오히려 부재감을 더 깊은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시인은 지금 자신이 머무는 공간을 '그대 몸이고 맘이다'라고 하지 않고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그대는 멀리 있다'는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기에 멀리 있고 안타깝고 서럽고 아픈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시인이 지금 누빌 수 있고 느낄 수 있음으로 인해 멀리 있다는 답답합에서 해방된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 그대를 볼 수 없다는, 함께 할 수 없다는 답답함이 하나의 감옥이 되어 버렸다. 그리움과 아쉬움의 prison에 갇힌 것이다.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

-'이제'라는 단어가 앞에 붙었다. 이전에는 그렇게 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멀리 있다는 것으로 인해 외로워하고 답답해하지 않고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근감으로 인한 부재감을 오히려 만물을 존재감을 변형시키는 놀라운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제임스 조이스의 이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대단한 문장인 것 같다.

 

"Absence is the highest form of pres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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