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묘비명(feat. 어네스트 헤밍웨이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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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묘비명(feat. 어네스트 헤밍웨이 묘비명)

탐독: 탐서/시와 케렌시아

by 카알KaRL21 2022. 4. 12.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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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 게재된 <묘비명>이란 시에 대한 감상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오늘 시는 유독 짧고 간결해서 더 생각할 게 뭐가 있을까 싶은데요 일단 <묘비명> 시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을 해볼까 합니다.

 

 

 

 


묘비명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나태주의 시, 묘비명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것, 그리운 사람을 맘 속으로 끊임없이 삼키고 견디고 참으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의 슬픔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알 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생각해보면 그 기분과 감정이 어떠한 지는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원두가 떨어졌다. 엊그제 주문을 했는데, 오늘이나 내일쯤 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회용으로 일단 때우고 있다. 이것도 한번씩 먹으면 먹을만 하다. 마치 나태주 시인은 지금 감정은 내가 스벅원두커피를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리면서 '조금만 참자'라고 하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는데, 이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많이 기다려야 하고 사람이 또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사람마다 다 세계관이 달라서 불교인들은 순환적인 역사관, 윤회설을 믿을 것이고, 기독교인은 부활을 믿을 것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조금 다르겠지만, 아마 나태주 시인은 기독교인이기에 이렇게 '조금만 참자'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추측해 본다. '조금만 참자'라는 말은 하루 이틀...얼마 있지 않으면 만날 것이고 만나면 만질 것이고 대화할 수 있을 것이고 허그라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이제껏 가졌던 부재의 감정을 털어내고 존재의 환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이 묘비명 앞에서의 뉘앙스는 이런 뉘앙스라는 것이 낯설다. 신앙의 토대에서 터져나온 고백일 수도 있고, 나름대로 긍정의 기운을 가지고 애써 슬픔과 아픔을 뒤로 하고 사후에 재회를 그리는 긍정적인 멘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동기에서 나왔든지 간에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시를 적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현실적인 시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묘비명 앞이라는, 죽음 앞이라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짙은 무게감을 내려놓고 오히려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라고 가볍게(?) 처리하는 대목이 슬픔과 그리움과 보고픔의 감정을 많이 경험해 본 고수의 향내가 난다. 처음 사랑을 하다가 헤어졌을때 많은 이들이 감당하기가 힘들다. 물론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이별은 언제나 힘들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묘비명 앞으로 내어준 이들의 슬픔과 아픔에 비할 수 있겠는가? 그 지독한 아픈 현실 위에서 자신의 멘탈과 마음을 얼마나 저울질 했을까? 그게 세월이 주는 풍화작용과 망각의 특효약이다. 세월은 우리에게 그렇게 다듬어가고 세월을 통해 우리는 인생을 배워간다.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것들과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의 경계를 배우며 우리가 노력하면 가능한 것들과 노력해도 불가능한 것들의의 카테고리들을 경험하게 한다. 묘비명 앞에선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내공에서 우러나온 탁월한 대처법을 제시한다. 그게 그냥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세월의 무게와 마음의 단련과 자기만의 처세술이기도 하다.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그런데, 이 말이 보편적으로 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 싶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겠다는 뉘앙스로 사랑하는 사람을 빨리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함을 '...조금만 참자'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인생은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이라서 너무 진중한 테제이지만, 너무 진중하면 하루가 너무 무거워지고 일상이 너무 흐트러지기에 때론 무겁지 않은 가벼움으로 감정을 처리하기도 하고 해결하고 다독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너무 무겁지 않게, 그리고 너무 가볍지 않게. 인생도 역시 이런 균형감각이 필요한 것 같다.

 

 

어네스트 헤밍웨이 무덤사진은 저작권때문에 사용하기가 힘들것 같아 사진을 보고 스케치를 대충한 헤밍웨이 무덤이다
어네스트 헤밍웨이 무덤 sketch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묘비명

묘비명에 대해 알아보다가 묘비명 문구가 이런게 있었다는 걸 발견한다.

 

 

"일어나지 못해서 미안하오"
Pardon me for not getting up

 

 

 <노인과 바다>의 노벨문학상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묘비명에 새겨진 문구이다. 그의 묘비명은 그의 작품속에 드러난 빙산이론, 생략이론이 농축된 듯 하다. 간단하면서도 무언가를 많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심장한 문구이다. 어네스트 헤밍웨이도 시를 썼다면 잘 썼을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냥과 낚시, 투우를 즐기는 그가 압축과 함축을 잘 한다고 해서 시를 쓸 기질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의 성향을 유추해보면 신은 헤밍웨이에게 시인의 자질은 선물해주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무거운 묘비명 앞에서 너무 무겁지 않게 가볍게 터치한 나태주 시인과 삶의 고통이 엄청났기에 결국 자살을 했던 어네스트 헤밍웨이지만 자신의 인생을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면서도 너무 가볍지 않게 대했던 그 균형감각을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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