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황정은의 소설 <아무도 아닌>과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스토리를 콜라보레이션한 포스팅입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19살 때 읽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작년에 다시 한번 더 읽었다. 카뮈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모순과 부조리의 작가로 알려진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싶어 카뮈의 『이방인』을 필사를 해보자 싶었다. 내 마음에 다가온 문장들과 생각들...
결국 몇 페이지 필사하다가 말았다. 애초부터 통째로 필사할 생각은 없었으니 포기는 빨랐다. 그런데, 그때 느낀 카뮈의 문장의 느낌이 남달랐다. 역시 필사는 작가의 문장을 더 돋보이게 하는 듯하다. 필사는 되새김질의 좋은 방편인 듯 하다. 그리고 카뮈의 문장이 훅 훅 나를 치고 있었다.
카뮈의 『이방인』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온 전보를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조의를 표함>
이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죽었고 장례식이 발생했는데, 카뮈는 ‘이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현실과 실존에 대한 고민? 카뮈가 실존주의자여서 더 그러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죽었다는데, 이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는 이런 식의 문장을 날리다니....
‘거기서 밤을 샌 뒤 내일 저녁이면 돌아올 수 있으리라. 사장에게 이틀만 휴가를 달라고 했다. 이유가 이유인지라 그는 거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썩 내키지 않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말까지 했다.
“제 탓이 아니쟎아요.”(7p)’
1
무심한 아들 같으니라고. 카뮈의 무신경한 이런 태도는 끝까지 계속되는데, 그것은 특별히 어머니에서만 아니라 아랍인을 총질하여 살인하는 행위에 대해서 그러하다. 모순과 부조리의 작가, 알베르 카뮈! 내가 그 대가를 이렇다 저렇다 할 순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카뮈는 카뮈의 메시지답게 죽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죽는단 말인가! 이런 인생이 얼마나 부조리한가! 카뮈는 자신의 작품을 자신의 죽음의 마지막을 통해서도 보여주었다. 마치, 생떽쥐페리가 비행기 타고 비행하던 중에 유유히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내가 여기서 보고 싶은 대목은 카뮈가 “제 탓이 아니잖아요.”라고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상황이다. 사장이 얼마나 눈치를 줬으면, 모친 장례식 가는데 카뮈가 저런 식으로 둘러댔을 것이냐는 것이다. 기업과 직장내의 갑을관계는 카뮈에게도 있었나 보다. ‘제 탓이 아니잖아요.’얼마나 미꾸라지처럼 잘 치고 빠지는, 그러나 어머니가 들었다면 아들이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멘트이다.
2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을 읽으면, 갑을 관계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형태의 상처와 모멸감과 아픔을 순도 깊게 드러내 주고 있다.
왜 사람들이 황정은, 황정은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몇 해 전에 故人이 되신 정미경 작가의 단편집, 김애란 작가의 단편집과는 또 다른 맛이 있는 작가이다. 정미경은 화려한 문체에서 주는 델리키트한 그물이라면, 김애란은 복서의 묵직하고 매운 한 방, 황정은은? 찌르는 가시같은 아픔이라고나 할까? 비유가 적절했는지 모르겠다.
이 소설은 총 8편의 단편소설이 묶여져 있다. 이 모든 소설들은 하나의 관통된 메시지를 작가는 아주 친절하게 제일 앞 장에 적어주고 있다.
<아무도 아닌>, 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 으로 읽는다
3
주인공은 서점 계산대 직원이다. 담배를 사러 온 여학생에게 주민증을 까보라고 했을 때, 여학생은 서점 밖에 있는 건장한 남자들의 심부름이라고 둘러대면서 아구는 맞아들어가지만, 여학생 진주의 인생이 꼬이게 된다. 그 아저씨들과 얼켜 인신매매당해 실종사건이 벌어진다.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이었다.
비정한 목격자.
보호가 필요한 소녀를 보호해주지 않은 어른.
나는 그게 되었다.’(56p)
서점직원이지만, 하루종일 지하에서 일한다고 햇빛도 받아보지 못하는 주인공 나에게 진주 엄마가 찾아온다. 그리고 매일 서점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진주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기에, 경찰도 물론 주인공을 찾아온다.
“아줌마 어쩌라고요. 내가 얼마나 바쁜지 알아요?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데 내가 왜 누구를 써야 해? 진주요. 아줌마 딸, 그 애가 누군데요? 아무도 아니고요, 나한테 아무도 아니라고요.”59p)
주인공에게 무슨 책임이 있는가? 아저씨들과 진주가 대화 나누는 장면이 석연찮았지만, 주인공이 나설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곳을 떠났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밤이 너무 조용할 때 진주에 관한 기사를 찾아본다....유골이라도 찾아냈다는 소식을 밤새, 당시의 모든 키워드를 동원해서 찾아다닌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서고 해본 적이 없다.’(62p)
살면서 우리는 언제나 무해한 사람, 무해한 인간, 무취한 인간, 무공해의 인간으로 살고자 한다. <아무도 아닌> 형태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한 마리의 길을 잃은 양인 진주의 미래에 어쩔 수 없는 형태로 얼키었다. 그것은 주인공의 인생에 계속 떠오를 수 있는 기억의 화두인 셈이다.
4
곗돈 떼어먹고 달아난 계원 때문에 시장내에서 신용을 잃어 빚덤탱이 독박을 쓰게 된 제희 가족, 빚 때문에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아 제희 엄마는 아버지더러 도망가자고 하지만, 아버지는 첫째, 자기 잘못도 아닌데 도망치는 것은 또 다른 범죄와 같고, 둘째, 그런 줄행랑의 처사가 아이들 보기에 부끄럽기에 그런 부끄러운 부모가 되기 싫다는 이 2가지 이유로 거절한다. 하지만, 부모의 빚은 고스란히 다섯 딸에게 유전 되어진다. 이거 마치, 미미 여사의 『화차』에서 나오는 빚의 대물림되는 유전자DNA인 셈이다. 무서운 DNA이다.
그런 가정사를 안고 있는 제희와 제희 부모가 제희 남친과 함께 수목원에 가게 된다. 소풍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느낌보다는 너무 더웠고 제희는 다리까지 다쳐 그날 내내 다리를 절었다. 그들이 소풍이랍시고 돗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었던 자리에 주인공 남친은 너무 더럽고 불결해서 밥 먹고 싶어하지 않았던 자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본 팻말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저 물이다. 짐승들 똥물이라고요.’(86p)
더럽기 짝이 없는 그 물에 아버지는 세수를 하고 손을 씻고 제희네는 그 똥물 곁에서 밥을 먹었다. 그런데, 주인공은 제희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가 결혼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자꾸 왜 제희와 같이 하지 못했을까? 왜 제희 부모님이 그 똥물이 자욱한 그 자리에 점심 먹자고 돗자리를 폈을 때, 흔쾌히 수용하지 못했을까를 후회하고 있다.
지금은 <아무도 아닌>이 되어버린 제희와의 연관된 추억을 떠올리는 주인공에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느끼는 모든 바운드리 내에서 펼쳐지는 마지노선이 있다. 물리적, 경제적, 심리적, 정서적, 정신적 마지노선이 있다. 그 마지노선을 넘으면 무언가 큰 일이 날 것 같고, 무언가 큰 사건 사고가 날 것만 같은 정신적인 배수진이 우리에게 있는 듯 하다.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색깔, 색소, 냄새, 악취, 풍경 등등이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 존재보다 더 중요한 것인가?
5
아래층과 윗층 사이에서 벌어진 층간 소음공해에 대한 이야기이다. 윗층은 아래층에 대해 무신경하게 소음을 털어버린다. 카드회사직원이 여자는 위층이 ‘아무도 아닌’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대해버리는 것에 미칠 지경이다.
마지막의 대사가 훅 감긴다.
“아랫층이야, 씨발년아!”(135p)
‘아무도 아닌’우리를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대하는 인간들에게 사이다같은 발언이다. 속이 빵 뚫린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잘 참는 습관을 가졌다. 할아버지를 참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도 그렇게 참으면서 살았다. 하지만, 참는 것이 종국적인 미덕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터트리는 것이 최대의 미덕도 아니다. 하지만, 한번 씩 치고 빠지는 것이 필요한 시대이다.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대하는 인간들에게 한번 욕해보자!
“아랫층이야, 씨발놈아!”
“아랫층이야, 씨발년아!”
6
유럽여행 중에 아내를 잃어버렸다. 14년 전에 계곡에서 수영을 하는중에 딸을 잃은 부부였다. 여행을 하는데, 한국에서 들려온 소식은 IMF사태였다. 아내는 현금도, 카드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외국어를 못 하는데...
‘그녀가 내리기도 전에 기차가 그냥 가 버렸다.
아이 로스트...노, 노, 미스드...로스트...’(161p)
도서관에 갔다가 문득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주인공 46살의 남편을 생각해보았다. 과연 그 아내는 어떻게 되었을까?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이고, 소통이 안 되면 두려움이 갑절이나 될 터인데...길을 잃어버린 그녀는 그 외국인들에게 ‘아무도 아닌’대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대상으로 전락하는 방랑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7
아버지는 목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목공소 직원은 3살 먹은 딸, 혜지의 아버지였다. 그런데, 혜지 아저씨의 은색티코가 덤프트럭 꽁무니에 처박혀버린 교통사고. 사고와중에도 혜지 아저씨가 제일 먼저 내뱉은 연락처는 목공소 번호였다. 그런데, 주인공의 아버지는 혜지 아저씨가 유언할 수 있는 시간도, 공간도, 여백도 남기지 못하고 ‘닥치라고 다그쳤다’.
‘그 때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내 아버지는 말했고 그건 아마 사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냥 하던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그 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184p)’
무더위가 작열하던 여름에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탈 찰나에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이 더위로 인해 쓰러져버린다. 쿵! 쿵이 아니고 ‘퍽’하고 부딪혀 쓰러진 노인...멀어져 가는 주인공과 버스...노인은?
몇 년 전이었다. 출근길에 바쁘게 움직이는데 집 앞에 웬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이마에는 쬐금 피를 흘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겨울이라 바닥이 미끄러웠던지 넘어지신 모양이었다. 나는 그분의 핸드폰으로 자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주변에 행인 분이 오셔서 도움을 주셔서 나의 도리는 다했다 싶어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출근길이라 바빴다. 그때 성경에 나오는 <강도 만난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강도 만나 내버려 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이웃에게 진정한 이웃은 사마리아 인이었다.
우리는 누구나가 다 자신만의 가치와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가치의 기준에 위배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산다.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내가 그 상황을 다 총체적으로 책임지고 그 이웃을 위할 수 있을까?
얼마전에 故人이 되신 철학자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에 쓰인 글이다.
‘나를 위해 쓰려고 하면 나 자신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그러나 남을 위해 쓰려고 할 때 나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이 된다고.’(40p)
그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8
백화점에는 희한한 고객들이 있는가 보다. 속옷을 교환하기 위해 가져왔다. 그런데, 입어본 흔적이 있어 보인다. 헐! 겨울에 이불을 구매했다. 그런데, 여름이 되어 이불을 환불하고자 한다. 이불에는 사용한 냄새가 자욱한 그 이불, 자기들은 한참 후에 뜯어보니 이런 이불이었다고. 고객용화장실에서 핸드백을 두고 왔으니 좀전에 상품을 구매한 점원에게 전화를 해서 지하주차장에 갖다달라고 한다. 우아! 세상에 개념상실한 인간들이 참 많구나! 이럴 때 사이다 한마디!
“아래층이야, 씨발년야!”
그런데, 고객을 응대하는 직원들은 그러면 안 된다. 잘 나가고 최고의 Best 매니저는 고객들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백화점 근처 상가에 가서 매장직원을 꼬투리잡아 노골적으로 갈군다. 거기서 스트레스를 푼다. 그걸 그 매니저는 <도게자>라는 인간의 심리로 해석한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자세를 도게자라고 해’(201p)
...고객이 원하는 것은 사과하는 게 아니라 무릎을 확실히 꿇고 머리를 확실히 숙이는 자세를 원한다는 말이다. 이런 개 같은 갑질이 어디 있는가! 이런 썩어문드러질 갑질을 황정은이란 작가는 캐치해서 보여주고 있다. 다소 자전적인 느낌이 들어 비애감마저 느껴진다.
“게다가 자기야. 나는 무시당하는 쪽도 나쁘다고 생각해.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지. 존귀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이나 진정으로 당하는 거야 무시를.”(202p)
진짜 그럴까? 최고로 잘 나가는 매니저가 주인공에게 해주는 조언이다.
“...사람이 날 때부터 존귀하다면 그것을 스스로 알아채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요?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학습되는 것입니까? 스스로 귀하다는 것은...자존, 존귀, 귀하다는 것은, 존, 그것은 존, 존나 귀하다는 의미입니까. 내가 존귀합니까. 나는 그냥 있었는데요. 언제나 여기저기에 있었는데요. 이렇게 그냥 있어도 존귀할 수 있습니까. 존귀하는 것, 그것은...아무래도 상태는 아니지 않아? 정태(靜態)가 아니고 동태(動態)가 아닙니까? 가만히 있어도 존나 귀하다면 그것은 일단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요....왜냐하면 인간은 똥을 싸는 데에도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생물이니까 병원비와 생활비도 벌어야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은 어떻습니가. 괜찮습니까. 자존하고 있습니까. 제대로 존귀합니까. 존나 귀합니까. 누구에게 그것을 배웠습니까.(203p)”
전체적인 이야기가 8번째, <복경>에서 퍼즐이 완성되는 듯 하다. 그런 면에서 8개 스토리 중에 하나를 뽑으라면, 단연 <복경>이다.
9
딸이 자신의 집안과는 대조적인 준재벌에 해당하는 가문과 결혼했는데, 딸에 눈에 비친 사위의 가문은, 집안이 쌓은 경제적인 성루가 무너지지 않도록 관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다름과 차이를 느꼈다는 김형석교수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물리적으로, 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심리적으로 <아랫층>에 산다는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를 가진 이들은 자신의 자존, 존귀를 지킬 수 있을까? 자신도 존나게 귀하다는 것을 지킬 수 있을까?
8개의 단편이야기,『아무도 아닌』이란 단편소설집 전체에 흐르는 그 중후한 비애감에 대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문장이다.
“내가 여기 틀어박혔다는 것을 아는 이 누구인가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발로 걸어나가야 할 것이다.”(185p)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위의 문장보다 더 좋은, 더 나은 문장이 있다. 카뮈식의,
“제 탓이 아니쟎아요.”
이 문장은 너무 친절하고 배려심이 강한 문장이다. 하지만, 적절하다. 그러나, 이 문장은 너무 갑갑하다. 더 빳빳한 힘이 낼름거리는 문장이 필요하다.
“아래층이야, 씨발년야!”
“아래층이야, 씨발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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