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에 대한 리뷰입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언어의 천재였다!
아는 지인 중에 미국 유학 할 때의 이야기를 SNS를 통해 본 적이 있다. 근데 그 이야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를테면, 중국식당에 가면 독일어성경을 보고, 프랑스 식당에 가면 라틴어 성경을 보고....뭐 이런 식의 이야기였다. 왜 그렇게 하느냐? 각기 다른 언어의 세계에서 다른 언어를 보면, 거기에 언어와 언어 사이의 기묘한 차이와 공통점, 뭐 그런 신비감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였다(난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 그 친구를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길 나누다가 6개국어를 한다고 했다. 독어, 불어, 라틴어, 영어....
이름만 들어도 아는 우리나라 최고 S대학과 대학원을 접수한 친구였고 입학 때는 수석으로 들어온 친구였다.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들어섰을 때 두려움이 없애주는 역할을 한다. 그 친구는 대학원 공부하면서도 이름만 들어도 아는 유명한 목사님에게 라틴어 레슨을 해준다고 하였다. 결국 그 친구는 지금 대학교수를 가장 젊은 나이에 역임하고 있다. 그 친구는 벌써 세계 학자들이 주목하는 대열에 서 있다. 논문으로 상도 받았다고 하던데...
그럼 나는? ...
나는 그 친구가 쓴 책을 읽어주고 있지 않은가! 하하하~ 하나도 안 부럽다.
왜 안 부러우냐고? 다들 잘 아시지 않는가? 내가 왜 안 부러워하는지...
부러우면 진다. 내가 아무리 방탄소년단을 부러워하면 뭐하는가? 그 놈은 그놈이고, 나는 난데. 그렇다고 내가 자존감이 대단히 강하고 견고하진 않다. 푸하하!
나보코프는 1899년 4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오래된 귀족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가문에 걸맞는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이런 혜택은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 귀족계급의 몰락 이전까지 이어졌다.
아마도 어릴 적부터 여러 나라의 외국어를 다룰 줄 알았던 나보코프의 면모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수많은 작가와 작품들을 통해 언어유희를 벌이는 작품을 보면 그의 역량을 알 수 있다.
이런 다양한 외국어실력이 러시아를 떠나면서 더 빛을 발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당연한 행복과 당연한 혜택들이 사라진 후, 기득권의 특권이 볼세비키 혁명으로 인해 사라진 나보코프는 독일, 프랑스, 미국, 스위스를 전전하며 떠돌이의 삶을 살았다.
『문맹』의 저자,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외국어에 대한 기묘한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를 극복한 작가이다. 하지만, 나보코프는 외국어에 대한 트라우마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 그는 아마 천재였지 않을까? 싶다. 영국에 가서 캠브리지 대학에서 문학 수업을 할 정도였다면? 17세에 이미 시집을 펴낸 나보코프! 1922년 자신의 정신적 기둥이자 가장 존경했던, 그리고 유력했던 정치인, 아버지가 암살당하면서 나보코프에겐 큰 슬픔과 생활고가 닥친다.
우리 인생은 언제나 그렇다. 하나를 잃으면 또 하나를 얻게 된다. 그가 얻게 된 것은 1923년에 평생 배필, 베라 슬로님을 만나고, 1925년에 결혼하게 된다. 그의 아내는 유대인이었다. 1937년에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이주했다. 1940년에는 자신의 첫 영어소설 『세바스찬 나이트의 진짜 인생』이란 소설을 들고 미국으로 재차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그의 명성과 능력은 코넬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것을 통해 증명되기도 했다. 또한,‘시린’이 아닌 ‘나보코프’라는 이름으로 영어작가로서의 삶을 개척하게 된다.
“나는 결코 돌아가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러시아는 전부 나와 늘 함께 있으니까요. 문학이, 말이, 그리고 러시아에서 보낸 나 자신의 유년 시절이 나의 러시아입니다....나는 돌아가지 않습니다....그곳 사람들이 내 작품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245p)
작품 속에서 게르만과 리다의 대화에서 종종 ‘오래전부터 지친 노예인’이란 말이 등장한다. 아마도 주인공 게르만 안에는 나보코프의 떠돌이 신세의 운명이 포함된 것이 아닐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의 나보코프의 운명!
이웃님 중에서 나보코프의 리뷰쓰는 게 제일 힘들다고 하던데,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할 듯 하다.
솔직히,『절망』 한번 읽어보시라!
절대 술술 읽히지 않을 것이다. 그냥 참고 읽는 것이다. 160, 170쪽 정도 읽으면 진도가 제대로 나갈 것이다. 그 이전에는 황망하기 그지없다. 대가가 쓴 글에 내가 농락당한 느낌? 농락은 아니더라도 작가와 독자가 이야기하는 대화체로 이끌어가면서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이 줄거리의 소재가 ‘사기극’인지도 모른다. ‘사기’란 것 자체가 상대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게 아닌가!
나보코프는 도대체 이 『절망』을 통해 무슨 이야길 하고 싶은걸까? 누군가 ‘소설의 첫 문장이 소설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하는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듯 한데, 한번 보자.
소설의 첫 문장이다.
‘나는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작가이다. 더없이 우아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내가 이 점을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9p)
나보코프는 이 소설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인 ‘사기극’을 통해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자신만의 예술을 창조한다. 그것이 때론 사기로 비쳐질 수도 있다.
‘철학은 부자들의 발명품’
‘출판된 원고는 매춘부에 진배없다.’
‘예술적 허구가 삶의 진실보다 더 사실적이다(139p).’
예술적 허구인 사기가 때론 삶의 진실에 더 근접할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가 문학을 대하면서 얼마나 자주 느끼는 것인가! 나보코프의 이 이야기가 다른 소설가들에 비해 덜 자전적인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거짓덩어리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나보코프는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와 아내 리다, 그리고 사촌 아르달리온, 그리고 늘 수상쩍게 따라다니는 분신이라 칭하는 펠릭스!(게르만이 펠릭스의 실체에 대해 사기치는 장면부터 소설의 가속도는 붙는다. 물론 다른 소설 읽을 때는 다른 가속도이다 쩝...).
스토리에 들어있는 피상적인 skin을 벗겨내면 그 안에 들어있는 기괴한 본질은 바로 예술에 대한 나보코프의 철학이며, 생각이다. 그런데, 소설의 사기극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 실패를 통해 나보코프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예술가의 절망>이 아닐까!
나보코프가 한 말을 들어보자.
‘『절망』의 주인공 게르만과 『롤리타』의 주인공 험버트는 닮았다. 하지만 둘의 닮음은 한 화가가 삶의 다른 시기에 그린 용 두 마리가 닮은 경우와 같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닌 악당이다. 그렇지만, 험버트에게는 일 년에 한번 땅거미가 질 무렵 거닐도록 허락된 낙원으로 가는 푸른 오솔길이 있다. 반면 게르만은 보석금을 얼마를 내든 결코 잠시라도 지옥에서 풀려날 수 없을 것이다.’
‘...지옥에서 풀려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은 나보코프가 예술에 대해, 예술가에 대한 절망한 대목이 아닐까 한다.
소설의 줄거리를 통해 독자를 농락하는(?) 나보코프의 능력을 보면서 우리는 너무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프랑스의 지성인 사르트르조차도 나보코프의 이 작품에 대한 서평에서 실수를 했다고 한다. 분신에 대한, 펠릭스에 대한 이해 부분에서 여러 가지 착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프랑스어판 『절망』은 제목이 『착각』이었다. 무슨 첩보소설을 보는 것도 아닌데, 나보코프 자신의 말재주(글)를 통해서만으로도 독자를 착각으로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가!
『절망』의 러시아판과 영어판의 내용도 다소 다르다. 러시아판은 러시아문학을, 영어판은 영어문학을 다루기에 아예 작품을 새로 쓰고 고치는 작업이었다고 나보코프는 말한다. 문학동네의 『절망』은 나보코프의 러시아판을 번역한 것이다.
나보코프는 왜 그토록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했을까! 의문이다. 나보코프가 작품 속에서 시대의 주류작가이자, 주류의 트렌드로 부상해서 수많은 아류작가들을 낳게 한 장본인,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비판이 드러난다. 왜 싫어했을까 싶다.
작품 속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 뿐만 아니라, 푸시킨, 고골, 표도르 솔로구프, 안드레이벨리 등과 같은 러시아 문학의 선배, 문학의 ‘광인’들의 작품들의 등장인물들도 등장시킨다. 가장 핵심되는 작가는 푸시킨과 도스토예프스키의 문맥이다.
나보코프가 품은 문학이라는 거대한 세계가 얼마나 그로테스크했을까! 그런 대작가가 소유한 문학적 바운드리, 그런 천재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얼마나 웅대한 것일까?
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절망>이라니!... 역설적 진리인 듯 하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평생 그 절망과의 싸움터 속에 있는 듯 하다.
그 싸움터에 바로 <문학>이 존재하는 것이다.
‘문학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1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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