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의 내 아들의 연인(feat.제임스딘, 크눌프 + 박하사탕, 이기호, 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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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의 내 아들의 연인(feat.제임스딘, 크눌프 + 박하사탕, 이기호, 칼 바르트)

탐독: 탐서/Book Review

by 카알KaRL21 2021. 6. 2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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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미경의 단편소설 <너를 사랑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

딸 아이가 예전에 트와이스의 <yes or yes>를 주구창장 들었다.  그 때 뉴스에 트와이스의 이 곡이 유튜브에서 1억 뷰를 넘겼다고 한다. 그래서 들어봤는데 잘 만들어진 자본주의 엔터테이먼트 패키지구나 싶었다! 아시아전체를 향해 대만인 쯔위도, 일본애도 영입하면서 종합선물셋트로 준비했나보다 싶다. 근데 요즘 방송에선 여자애들이 아니라 남자애들이 얼마나 환호하는지...남자애들이 인제 <오빠부대>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이전세대의 남아선호사상의 결과물인가 그런생각을 해 보았다. 딸내미가 이렇게 질문한다.

 

 

“아빠, 내가 20살이 되면, 저 언니들 40살 되는거야?”

 

 

아이가 그때 9살이었으니, 트와이스 멤버들의 나이는 40줄 안이겠구나 싶다. 영원한 젊음은 없다는 생각을 아이의 한 마디를 통해 또 느낀다. 

 

 


 

 

 

 

 

2

예전에 미국의 우상이었던 제임스 딘의 죽음을 찾아본 적이 있는데, 그 젊은이의 우상이었던 제임스 딘, 그는 그가 평소 좋아하는 포르쉐를 몰고 가다 교통사고로 죽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 도로에는 그를 찾는 팬들의 행렬이 자주 있다고 한다. 그가 나이들어 자연사했다면, 보여줄거 다 보여주고 살다가 죽었다면 그렇게 팬들이 찾아오진 않을 것이다. 1955년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비명횡사한 것은 얼마나 큰 비보인가! 그런데 행복한 죽음이란 있을까?

 

 

 

당대의 젊은이의 우상이었던 제임스 딘은 불운의 교통사고로 그렇게 죽었다...

 

 

 

 

3

정미경의 소설 <내 아들의 연인>중에서 <너를 사랑해>에 보면, 음식점에 나온 메뉴에 대한 이야길 한다.

 

 

‘죽은 낙지, 죽어가는 낙지, 막 죽은 낙지, 죽고 싶은 낙지...’ 

 

 

작가는 <낙지>에 대한 상태를 설명하면서 거기에 감정을 이입해주고 있다. 주인공 나는 자신의 상사인, 영감의 자산관리인인데 싱글인 된, 영감의 애인으로 자신의 연인인 Y를 추천한다. 두 사람은 8년 연애했지만 결혼 이야길 못 하고 있다. 순전히 경제적인 부담으로 결혼을 못한 것도 있다. Y는 시립대 강사이다. Y윤교수는 정직이 되기 위해 2억이 필요했다. 애인의  출세(?)에 도움을 주지 못한 주인공 나는 자신의 상사인 ‘영감’의 대리애인(?)행세의 에이전시가 되버린 셈이다. 그것은 결국 거스를 수 없는 탁류에 휘말리게 된 꼴이 된다. 애인을 위해 해 준다는 게 그게 말이 되느냐? 근데 나이 먹어가면서 세상살이는 우리 뜻 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도 지켜야 할 morality가 있지 않는가!

 

 

 

 

 

 

4

“7월은 지나갔어. 우린 꽤나 멀리 왔어. 돌아서면 그 순간 우린 둘 다 소금기둥이 되는거야. 봐. 이렇게 비가 끊임없는데. 소금기둥이 되어 녹아내릴 일만 남는거야. 지금은 돌아설 수가 없어. 돌아갈 곳은 다 무너져 버렸고, 그냥 앞만 보고 걸어야 되는거야.”(52p)

 

 

 

 

 

 

주인공 나와 윤교수Y는 돌아갈 수가 없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야기에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져버린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어버렸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변주하여 이젠 두 사람 다 소금기둥이 되어버려서 녹아내릴 일만 남았다고 한다. 

 

 

 

 

 

 

5

사랑하기에 뭐라도 해주고 싶어 영감과의 다리를 놓아준 그 일이 두 사람의 인생의 발목을 잡고야 말 것이다. 출세를 위해 영감과의 관계를 이어갈 Y, 그 가운데 자책하며 깊은 공황을 일으키는 주인공, 단편의 스토리의 마지막 장면이다...Y는 담담하고 꽤나 평온해보이는데, 주인공 나는 눈물을 흘리기만 한다. 

 

 

 

 

 

 

6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우리는 세속의 유혹,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의 손을 잡아버린 파우스트 같은 행색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 유혹에 넘어가 심장을, 영혼을 빼앗겨버렸다. 그걸 정미경 작가는 <낙지>에 비유하는 듯 하다. 산낙지의 운명은 결국 죽음인데, 산 낙지, 죽은 낙지 구분하며 흥정을 매기고 결국 산낙지도 죽을 운명인데...정미경의 표현이 기가 막히다. 마치 두 사람의 이야길 해주는 듯.

 

 

 

 


 

7

헤르만 헷세의 <크눌프>를 읽고나면 헛헛해진다. 첫사랑 프란치스카가 라틴어학교를 다니는 크눌프에게 사랑고백을 받자 거절한다. 그 이유는 라틴어학교를 다니는 고상하고 지성적인 크눌프는 자신에겐 매력은 별로인 것이다. 그녀는 크눌프보다 연상이기도 하고 육체노동자의 애인이 되고싶어했다.  아마도 크눌프를 애인으로 보기보다는 이쁜 동생 정도로 바라보지 않았나 싶다. 크눌프는 첫사랑의 애인이 되고자 우등생의 라틴어학교를 포기한다. 막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프란치스카는 다른 노동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웃옷이 풀어헤쳐진 채...

 

 

 

 

 

 

 

8

크눌프의 이 트라우마와 상처는 일생을 지배하고 있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온다. 귀향자는 첫사랑, 프란치스카를 말년에 한번이라도 보고자했으나 그녀는 이미 죽었고 그의 삶의 난파선은 침몰하기 일보 직전이다. 어느 누구에게 구애받지도 않고 구속되지 않았던 리벌리스트이자 방랑자 크눌프...

 

 

 

 

 

 

 

9

크눌프는 첫사랑 프란치스카가 자신의 기다림을 헛되게 날리지만 않았어도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망가지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젊음도 지나가고, 모아둔 것도 없고, 가족도 없고, 늘 배회하며 방황했던 방랑자, 크눌프의 말년은 지독히 을씨년스럽다. 폐결핵의 치료과정도 거부한채 병원행을 포기하고 자유(?)를 선택한 크눌프는 이제 죽어가고 있다.

 

 

 

 

 

 

 

10

 후회와 절망과 회한과 허무가 가득한 크눌프와 신, 하나님과의 대화의 핵심은

 

 

 

“이제 그만 만족하도록 해라!”(140p)

 

 

 

이다. 트라우마도, 상처도, 방황도, 방랑벽도, 지병도 다 크눌프의 존재의 책임인 것이다. 크눌프는 젊은 날이 즐거웠다. 하지만 늙어 병든 크눌프에겐 그것은 한낱 추억에 불과했다.

 

 

 

영화 <박하사탕>에서처럼

 

 

 

“난 다시 돌아갈래!!!”

 

 

 

라고 아무리 외쳐도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정미경의 단편 이야기처럼, 소금기둥이 된 크눌프에겐 비만 내릴 일이 남은 것이다. 녹아내릴 일만 남은 것이다. 

 

 

 

 

영화 <박하사탕>의 명장면: "난 다시 돌아갈래"

 

 

 

11

<크눌프>의 이야기는 신과의 대화 부분이 ‘인간(크눌프)의 책임’에 대해 다룬다면, 이기호의 <목양면방화사건>에 나타난 마지막의 하나님의 독백은 ‘너무나 무책임한 신’의 모습으로 비쳐져 안 그래도 ‘신은 죽었다’고 하는 시대와 세대의 판에 하나님이란 존재는 더 정떨어진, 두번 다시 보기도 싫은 역겹고 찌질한 스토커 같은 뉘앙스를 풍겨버렸다. 

 

 

 

 


'내, 내 목소리가 뭐 어쨌다는 것이냐? 내 목소리는 원래 이러하거늘....말투가 뭐 어떻다고 그러느냐? 나는 3천년동안 계속 이 말투였느니라 . 말 좀 끊지 말고 계속 들어보아라....모른다! 나도 모른다! 왜 불이 났는지, 무엇이 쇼파를 불태웠는지, 어떻게 불길이 치솟았는지, 내가 어찌 아느냐? 네가 지금 나를 트집 잡으려 하는 것이냐?....에이씨, 진짜.....왜 또! 뭐! 뭐가 또 문제냐! 뭐가 상관이 없다는 게냐? 네가 사물의 상관있고 없음의 차이를 진정 아느냐?....에이씨, 진짜....뭐라고....? 뭐가 안 들린다고? 왜 내 말이 안 들린다고 하는 것이냐? 내 목소리가 얼마나 큰데.... 이래도  안 들리냐? 이래도....? 이래도....?'(이기호, 151-159p)

 

 

 

 

 

 

젠장, 이기호에겐 하나님은 짜증쟁이 중2같은 인성과 말투이고 방화사건의 원인도, 범인도 모르는 유한한 존재이다! 젠장!

 

 

 

 

 

 

 

 

12

난  개신교 신학자, 카알 바르트Karl Barth를 좋아했다. 내 아디도 칼 바르트의 칼Karl이다. 칼 바르트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로 불리운다. 신학노선을 따지자면 그는 보수주의에서 보면 다소 지나치고, 진보주의에서 보면 다소 밋밋한 노선인 “신정통주의”노선에 서 있다. 난 그의 신학노선을 모두 지지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신학은 다소 리버럴liberal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근데 내가 왜 그를 좋아하는가! 단 한가지다. 

 

 

 

 

 흔히 칼 바르트를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진 이'라고 평가한다.

 

 

 

 

 

13

그는 시대의 종교와 신학이 더 이상 신의 존재,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미가 없다면서 신학자들조차도 신Godless, godless의 자유주의 신학theology놀이를 하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진 사람’

 

 

이기 때문이다(신학에 ‘神’이 빠지면 학문의 존재기반 자체가 무너지는 게 아닌가!) 교단에 따라 신학노선이 달라 Karl Barth에 대해 대단한 찬사를 보내기도 하지만 나의 노선은 그렇지는 않다. 단지 두개의 세계대전의 참상과 비극으로 인해 하나님 없는 듯한 세계처럼 보이는 지구촌에, 그 신이라는 존재가 그토록 인간계에 침묵하며 방관할 수 있냐면서 신의 부재를 주구장창 외칠 때였다. 그 때....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어필한 신학자이기 때문에 나는 그를 좋아한다. 칼 마르크스, 칼 융, 칼 뵘, 칼 포퍼 등도 있는데 내게 칼은 칼 바르트의 칼인 셈이다! 칼 바르트의 폭탄은 바로 <로마서 강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14

미셀 푸코의 저서를 읽어보고 싶은데 그가 동성연애자였다가 말년에 에이즈로 고통당하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최애하는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죽기 하루전날 자신이 에이즈환자란 사실을 폭로한 사건, 그리고 그는 1991년에 죽었다. 누구에게 핑계할 수 없고, 변명할 수 없는 인생의 책임이다. 크눌프의 책임이다. Y의 연인의 책임이다. 푸코, 머큐리...그들의 업적과 공적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존 치버도 동성연애의 기운이 있고, 영국의 웸Wham의 조지 마이클도 그러했다. 

 

 

 

 

 

 

 

 

15

중요한 사실 하나, 사람이 죽을 때 잘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가운데 죽어가는 것을 누가 선택하고 싶을까? 나도 싫다. 치매가운데 구차하게 연명하는 말년은 정말 두렵기까지 하다. <백년의 고독>의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노벨문학상 작가였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치매의 고통을 앓았다고 한다.

 

 

 

나도 잘 죽기를 기도할 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에서 출발한 에이즈는 예외인 듯 하다. 모든 삶과 죽음은 인간의 책임이 다분하게 배여 있는 것이다.

 

 

 

 

 

 

 

16

 

시 116: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17

삶이 시작되면 언젠가 죽음이 반드시 온다. 출생이 복되듯 죽음도 복되어야 한다. 인생의 구조가 그런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출발하면 끝이란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내가 붙잡고 있으면 역사는 질서가 흐트러지는 셈이다. 가야 오고, 또 가야 온다. 당대가 지나가면 후대가 오기 위해 당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찌그러져야 한다. 그게 역사다. 

 

 

 

 

 

 

18

죽음이 귀중한 죽음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잠시 생각해 본다.

 

 

 

삶이 오면, 죽음도 오는 것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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