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교수의 <열두 발자국>을 읽다가 심쿵해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전에 <과학콘서트>를 아주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1
저자가 한번은 터키에 학회발표 초청을 받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강연장소가 어딘지 정확하게 물어보지 못한 실수를 저질렀다. 터키의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테키르다인 것은 아는데, 더 구체적이고 정확한 장소를 몰랐다고 한다. 오후 4시에 도착했는데, 강연은 8시, 아무리 돌아다녀도 일산 크기 만한 테키르다 그 도시의 어디서 강연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결국 죽어라 운전만 몇 시간동안 하고 겨우 10시가 넘어 숙소로 왔다고 한다.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자는 그 다음날 터키여행을 맘 껏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저자는 강연장소를 몰라 몇 시간 동안 헤맨 그 시간 때문에 비록 강의는 못했지만,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전날 미친 듯이 길을 잃어 돌아다닌 그 방황의 경험이 테키르다 도시의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버렸다는 것이다. 어디서 무엇을 먹으면 좋겠고, 어떤 꽃길을 산책했으면 좋을 것 같고, 어디가 분위기가 좋은지 방황하면서 발견한 것이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알려면 세상에 대한 지도가 있어야 합니다.’
‘길을 잃어본 순간, 우리는 세상에 대한 지도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방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58p)
저자는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에겐 ‘방황할 수 있는 시간’을 박탈하는 구조라는 것에 개탄을 한다.
2
언젠가 김미경 강사의 세바시 강의를 운전 중에 들었다. 자기개발에 대한 나의 관심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강의는 재미있게 들었다. 강의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회적인 알림 장치를 가지고 있다. 그 알림이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미치게 만든다. 그 알림 장치의 배터리를 꺼내 던져버려라!’
그 사회적인 알람, 대학 못 들어가면 큰 일 나고, 취업 못하면, 결혼 못 하면, 승진 못 하면...등등. 그런 알람들! 주변인들의 시선, 이목의 사람의 숨통을 옥죄어 오는 것이다. 내 자신만 괜찮으면 되는데, 주위 사람들의 성화와 아우성에 내 존재가 거덜나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늦게 만개하는 자(slow bloomer)에 대해 용납치 못하는 구도이다. 위대하게 성공한 선배들 중에는 그러한 그룹이 더 많은 데도 말이다.
길을 잃어본 자는 자신만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 자신만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
너무 가슴에 다가온다. 길을 잃어버려 헤매고 방황함에는 치루어야 할 대가가 있지만, 그 값 보다 내 머릿속에 로드맵, 지도를 가지는 것이 더 큰 소득이다.
3
문득 류시화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 이런 이야기가 눈에 보인다.
마음에 담긴 길-‘방황한다고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인도에 자주 다녔던 류시화는 자신이 쓴 원고,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은 ‘시 읽는 독자가 적다’라는 이유로,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은 ‘인도 기행문을 읽을 독자가 없다’는 이유로, 번역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인생 수업>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자 상업적인 작가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방황한다고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모든 여행에는 자신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다’고 독일의 사상가 마르틴 부버가 말했다....인간은 본질적으로 ‘길을 가는 사람’이다.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고 하는데 ‘떠도는 사람, 길 위의 사람’이란 뜻이다(새는 날아가면서...44p).
스스로에게 이 한 가지를 물어보라.
‘이 길에 마음이 담겨 있는가’마음이 담겨 있다면 그 길은 좋은 길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무의미한 길이다...죽는 날까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것이 삶이다...‘길’의 어원이 ‘길들이다’임을 기억하고 스스로 길을 들여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야만 한다(새는 날아가면서...45p).
<시로 납치하다>를 읽으면서 류시화가 너무 좋아졌다. 대학 때도 머리 긴 그의 특이한 외모를 기억하면서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 뭐 이런 책, <성자가 된 청소부>도 읽었지만. 내가 인생의 방황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찰나여서인가, 류시화의 시가 가슴에 너무 와 닿았다. 류시화는 방황의 깊이를 체험한 시인이다.
‘좋은 시는 마음에 내려와 앉는다’(시로 납치하다, 106p)
누군가가 식료품 가게에서 너를 알아보면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 양배추가 되라.
십년 동안 소식 없던 누군가가
문 앞에 모습을 나타내면
그에게 너의 새 노래를 전부 불러주지 말라.
결코 시간을 따라잡지 못하리라.
한 장의 나뭇잎처럼 걸어다니라.
언제든 떨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라.
자신의 시간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라.
-(시로 납치하다, ‘사라짐의 기술’ 중에서)
시에 대한 해석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다.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될 필요가 없다고.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꽃에 물을 주지 않는다면 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110p).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중에서
우리 사회가 방황하는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자신이 방황하는 자신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다. 내가 나를 포용하고 용납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모든 것이 자신의 문제이다! 마음의 담긴 길을 걷는 자신! 자기 마음을 소유하는 것!
심쿵한 문장이 내 마음에 내려앉아 그것이 내 것으로 자기화 되어진다면, 아니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 글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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