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이 세상에 나오면서, 숨겨진 독립운동가였던 그에 대한 정보가 세상에 조금 드러난 셈이다. 이 책은 박열의 부인이자, 연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이다. 나는 이 책을 보고서, 박열과의 스토리가 궁금해서 영화를 찾아 보았다. 이 책은 박열과 만나기 전까지의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영화에서 가네코 후미코는 굉장히 밝게 나온다. 긍정적이며 당차고 용감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만을 본다면, 가네코 후미코의 아픔과 상처를 갸늠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읽어본다면, 그녀가 왜 그렇게 밝아졌는지, 용감해졌는지, 씩씩해졌는지 이해와 공감을 할 수 있다. 그가 만난 연인, 박열 때문일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시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를 읽고서 엄청난 충격과 전율을 느낀다.
그리고 인력거를 끄는 박열에게 소위 말하자면, 대시(?)를 하게 된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박열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1903년에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 1905년에 나쓰메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다>(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했다. 박열은 일본인들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나쓰메 소세키의 이 작품의 제목을 패러디해서 지은 듯 하다.
위키백과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일본어: 吾輩は猫である 와가하이 와 네코 데 아루[*])는 일본의 근대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의 장편 소설로,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로런스 스턴의 《신사 트리스트럼 샌디의 생애와 의견》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나는 그 시를 읽었다. 이 얼마나 힘있는 시인가. 한 줄 한 줄 내 마음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시를 다 읽고 나자 황홀한 지경이었다. 가슴에서 피가 요동쳤다. 어떤 강한 감동이 나의 생명을 고양시키는 듯 했다.’(302p)
그의 수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조선에 있을 때 나는 개와 나를 항상 연결해서 생각했다. 개와 내가 똑같이 학대당하고 똑같이 구박당하는 가장 가련한 형제처럼 여겨졌다.’(171p)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라는 시에 꽂힐 수 밖에 없는 후미코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인에게 그런 대우를 받지 않았던가! 후미코는 일본인이었지만, 그의 인생 자체가 그런 대우를 받았기에 박열의 시에, 박열에게 자신의 인생을 올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가 태어났는데,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모가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네코 후미코는 이른바 ‘무적자’인 셈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학교도 부탁에 부탁으로 겨우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지지리도 가난한 현실은 그녀의 문자, 학교, 배움에 대한 열정을 언제나 방해했다.
‘노트 한권과 연필 한 자루를 사 줄 때까지 2,3일이나 학교를 쉬어야만 했다.’(38p)
무적자라는 것을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땅을 떠나 친할머니와 함께 바다를 건넌 후에 알게 되었다.
“넌 말이야, 설마 잊지는 않았겠지. 넌 무적자였어. 무적자는 말이야. 잘 들어. 무적자란 태어났어도 태어나지 않은 거야. 그러니까 학교에 갈 수도 없지. 가도 다른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만 당해. 그런 널 내가 불쌍히 여겨 입적해준 거야.”(91p)
가네코의 친할머니의 입에 나온 말이었다. 상속녀로 데리고 간다고 했지만, 결국은 식모살이만 7년 동안 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려 보낸다.
‘하지만 내가 무적자였던 게 내 죄인가. 나는 내가 무적자였던 것도 몰랐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만 알고 있었고 그 책임도 두 사람이 져야 한다. 그런데, 학교는 내게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나를 멸시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는 거라곤 내가 태어났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아무리 친할머니가 태어났어도 태어나지 않은 거라고 말해도 나는 태어나서 살아 있다.’(92p)
절친 타미가 죽어가면서 가네코에게 남긴 유품까지도 친할머니란 작자는 이와시타 집안의 후계자로 정해진 사다코에게 줘버린다. 12-13살 어린이는 한창 놀 나이지만 친할머니는 가네코의 모든 자유와 시간을 억압하고 박탈해버린다. 어떻게 학교는 보내줬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왜 그렇게 억지로 데려가는 거죠? 당신은 아이가 중요한가요, 옷이 중요한가요? 아이는 옷 때문에 있는 게 아니에요. 아이를 위해 옷이 있는거죠. 그렇게 더럽혀서는 안 되는 옷이라면 함부로 입어도 되는 옷을 입히면 되잖아요. 어른은 자신의 체면이나 수고만을 위해 아이를 희생시키고 있어요. 어른은, 특히 어머니는 아이를 위험에서 지키고 아이의 천성을 살려주는 게 일입니다. 아이의 자유를 빼앗고 아이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은 무서운 죄악이에요. 아이를 자유롭게 놀게 해 주세요. 자유롭게 자연에서 노는 일은 자연이 아이에게 준 유일한 특권이에요. 그렇게 했을 때 아이들은 무럭무럭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하는 거예요.”(119p)
한 끼도 먹지 못한 가네코, 그 소녀의 딱한 사정을 익히 아는 이웃집의 조선인 아줌마가 보리밥이라도 주려고 했지만, 가네코는 거절하고야 만다. 할머니와 집안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조선인의 집에서 밥이나 얻어 먹고 다니는 거지는 우리 집에 둘 수 없어.”(131p)
“낮에 놀만큼 놀고 이제 날이 저물어 갈 곳이 없으니까 돌아와서 용서를 빌고 우는 소리를 늘어놓는 게 네 특기냐. 뭐야, 밥 한 그릇이라도 너한테 주는 집이 있었니? 우리도 마찬가지야. 너한테 줄 밥은 없어.....”(132p)
그 어린 소녀가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그녀는 결심한다.
‘내가 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친할머니와 고모는 나에 대해 뭐라고 할까. 어머니와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무엇 때문에 죽었다고 말할까. 어떤 거짓말을 해도 나는 이미 “그렇지 않아요”라고 해명할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죽어서는 안 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와 마찬가지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복수해야 한다. 그렇다. 죽어서는 안 된다.’(137p)
‘조금이라도 빨리 그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기차에서 나는 ‘어서 나를 조선에서 다른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어디든 일각이라도 빨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실은 데려다달라고 할 곳은 없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나는 고슈의 시골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곳이 나의 진정한 휴식처는 아니었다. 마을을 보고 큰 외삼촌을 보자, 한층 우울해졌다.’(161p)
‘나는 조선생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불평을 하기가 싫었고 해봤자 믿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64p)
나는 이 책을 읽을 즈음에 나쓰메 소세키의 책들을 탐독하고 있었다. 소세키의 일생 또한 파란만장했다. 그런데, 가네코 후미코의 불행한 가정사는 더 했다. 소세키는 그래도 후미코 보다는 더 잘 먹지 않았을까 싶었다.
가난에 찌든 환경도 문제였지만(요즈음은 화장실에 휴지를 쓰지만, 당시에는 종이가 귀해 대나무 쪼갠 것이나 나뭇가지를 젓가락 정도의 길이를 잘라 사용후 시냇물에 씻어 재사용했다고 한다), 가네코 후미코의 부모도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여성편력이 뛰어났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남성편력이 탁월했다.
‘어머니는 여러 명의 남자와 관계를 맺고 동거했는데, 내가 조선에 간 후에도 역시 같은 일을 반복한 듯했다...내 어머니는 어디서 굴러먹은 개뼈다귀인지 모르는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서 있는 대로 고생한 끝에 이 남자 저 남자 전전하다가 돌아왔다. 그런 어머니에게 아무런 문제 없는 집에서 혼담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당연히 어머니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무슨 사정이 있는 사람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실이 그랬다. 그러나 분에 넘치게도 어머니는 그런 곳에서는 견딜 수 없다며 뛰쳐나왔다. 결국 어머니는 그렇게 참을성 없는 여자였다.’(166p)
그래도 의지했던 남동생이 있었지만, 남동생 나카무라(켄)와도 헤어지게 된다. 여동생 하루코와도 헤어진다. 더 웃긴 사실은 아버지의 연인이, 바로 이모였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 하건만, 이모와 놀아나는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어머니는 딸의 행복(?)을 위해 유곽을 팔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제대로 되지 않기도 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말한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나요? 당신들의 사랑은 본능적인 모성애가 있는 동안만 지속될 뿐, 나중에는 완전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척하지 않나요?라고. 그리고 “우리 엄마처럼 진실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버리고 가면서, 갔다가 싫으면 다시 돌아와서 아이가 돌봐주기를 바라는 뻔뻔스러움으로 아이를 사랑하고 있지 않나요?”(71p)
후미코의 아버지는 후미코를 막내 외삼촌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아무리 숟가락 하나의 부담을 던다고 하더라도 이런 막장 드라마는 아니지 않는가!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아버지는 나를 노예로 막내 외삼촌에게 판 것이다. 참으로 나에 대한 모욕이다. 아니, 아버지뿐만이 아니다. 불문에 들어간 막내 외삼촌 역시 이 얼마나 더러운 짐승인가...막내 외삼촌은 처녀의 육체를 탐하는 동물적인 욕망 때문에, 그렇다. 그저 그 동물적인 욕망 때문에 나를 사려고 한 것이다...치요 씨와 사귀며 정을 통하면서, 또 한편으로 나를 노리개로 삼으려 한 것이다...’(180-181p)
17살의 봄, 가네코 후미코는 “내일 도쿄로 가겠습니다”란 말을 남기고 가족을 떠난다. 수중에 기차삯을 포함해 겨우 10엔이 있었다. 아버지란 작자는 우산 하나도 준비해주지 않았다.
‘안녕, 아버지여, 이모여, 남동생이여, 외할머니여, 지금까지 나와의 관계를 맺은 모든 것이여, 안녕, 안녕, 이제야말로 우리가 헤어질 때가 온 것이다.’(218p)
도쿄에서 신문팔이, 가루비누, 행상, 식모살이, 식당 종업원 등을 하면서 어렵게 공부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그녀는 조선인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사회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처음에 온통 희망으로 불탔던 나는 고학을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지금 세상에서는 고학 같은 것을 해도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훌륭한 인간일수록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훌륭하다는 말을 듣는 것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의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얻어야만 한다. 나는 나 자신이어야 한다.
나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도 많은 남자들의 노리개로 살아왔다. 나는 나 자신의 일을 해야만 한다. 그렇다. 나 자신의 일을 말이다. 그런데 나 자신의 일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알고 싶다. 그것을 알아내어 실천하고 싶다.’(304-305p)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 열을 만난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반려자, 동지를 만나고 동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옥중에서 혼인신고를 한다. 일본 법정에서 조선인 의복을 입고 재판을 받는다. 일본인인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고 조선인의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가? 그녀의 삶과 인생스토리를 알지 못한다면 함부로 비난하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박열>에서 취조하는 장면이다. 일본 천황 폭탄 테러의 계획에 대해 심문하는 장면에서 가네코 후미코는 시종일관 박열과 모든 것을 함께 하려는 발언을 한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고자 하는 그녀의 열정이 드러난다. 후미코가 검사에게 ‘박열은 뭐라고 하던가요?’라고 질문하자, 검사는 박열의 말을 쪽지에 적은대로 전해준다.
‘후미꼬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질문하면 그녀의 감정이 상할 수도 있으니 그녀의 주체적인 판단에 맡긴다.’(영화 대사 중에서)
나는 이 대목에서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후미코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아는 박열이 그녀의 인격과 성격을 배려해서 말한 부분이다. 이 말에 후미코의 입가에 깊은 미소가 배여나온다.
‘저 사람은 마치 집 없는 들개 같아요. 그런데 왜 저렇게 도도하죠? 마치 태도가 왕자 같아요.’(308p)
‘그 사람 안에 작용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렇게 힘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고 싶었다....그렇다. 내가 찾고 있는 것,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 그것은 분명 그 사람 안에 존재한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것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가지고 있다.’(309p)
이런 후미코가 박열을 처음 만난다.
“나는 당신 안에서 내가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어요. 당신과 함께 일할 수 있었으면 해요.”
“저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죠.”(315p)
“기다려주세요. 조금만 더요. 내가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같이 살아요. 그때는 내가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게요. 결코 당신을 병 따위로 힘들게 하지 않을 거예요. 죽는다면 같이 죽어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요.”(320p)
가네코 후미코의 수기는 여기까지이다. ‘박과 나의 동거 생활에 대한 기록 외에 다른 것은 쓸 자유가 없’었다고 후미코는 말한다.
1926년 7월 27일, 가네코 후미코는 우쓰노미아 형무소에서 스물셋의 한 여름에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931년 후미코가 스스로 목매달아 죽은 지 5년, 그녀가 죽은 7월에 형무소에서 4년 동안 썼던 수기가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는 바로 가네코 후미코의 형무소에서 수기로 기록한 자서전이다.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일본은 극도의 혼란 속에 빠져든다. 일본 정부는 대지진에 대한 수습과 대책을 마련하기 보다 희생양을 찾기에 바빴다. 그 희생양이 바로 조센징이었다. 이때 표면적으로 드러난 숫자는 6천명의 조선인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그 와중에 천황 암살 시도 혐의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도 검거된다. 1926년 3월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3.1운동 트라우마가 있는 일본인들은 독립운동가의 사형집행의 후폭풍이 또한 거세어질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천황의 자비, 은혜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함께 죽기를 갈망했던 두 사람의 소원은 이루지 못했다.
또한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의 원인을 자살이라고 보편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어떻게 보면 의문점이 없어 보이진 않는다.
위 사진은 박 열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내줄 유작이 될 뻔한 사진이었다. 내가 이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도발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려 100여년 전이었는데, 이런 포즈로 사진을 찍다니 말이다. 하지만, 가네코 후미코의 인생스토리와 박열의 영화를 감상하고 난 후 느끼는 감정은 남다르다. 그 두 사람의 ‘화양연화’, 인생의 정점이 바로 이 사진을 찍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21세에 투옥된 박 열은 22년 2개월의 최장기 수감기록을 세우면서 44세의 나이에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라이프스토리를 들여다 본 형무소 소장은 수많은 조선 동포들 앞에 서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연설을 했다. 이날 그는 자신의 아들을 박열의 양자로 바쳤고, 이름 또한 ‘박정진’으로 개명했다. 박열은 후에 월북하여 1974년 평양에서 72세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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