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대로 소세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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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대로 소세키 읽기

탐독: 탐서/Book Review

by 카알KaRL21 2021. 5. 2. 01:38

본문

1

소세키의 등장인물은 공통적으로 지식인이다. 1900년 작가 소세키는 일본 문부성 제1회 국비유학생으로 영국을 유학을 가게 된다. 그 유학생활은 소세키를 지적, 정신적으로 팽창시키면서 동시에 신경쇠약이라는 딱지를 평생 안고 살아가게 된다. 서구문명을 직접 육안으로 대하면서 느낀 유학생활은 소세키의 내면세계의 큰 획을 그은 사건이 아닌가 싶다. 나쓰메 소세키는 100년이 훨씬 넘은 과거에 활동했던 작가이다. 그 작가가 어떻게 지금 우리 현대에서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아마도 소세키가 묘사하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집요한 탐구’에 있지 않을까 싶다.

 

 

 

2

『길 위의 생』(이레)(『한눈팔기』(현암사)의 다른 번역본)을 번역한 김정숙은 제자들에게 ‘20대에게는 『산시로』를 추천하지만, 나이가 들면 『길 위의 생(한눈팔기)』을 추천한다’고 했다. 확실히 『산시로』의 맛과, 『한눈팔기(길 위의 생)』의 맛은 확연히 다르다. 점수를 주자면 오히려 『한눈팔기』에 더 주고픈 마음이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만, 인생의 중후한 맛을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한눈팔기(길 위의 생)』이 아닐까 싶다. 도서관에 『한눈팔기』(현암사)가 없어서 『길 위의 생』(이레)을 빌려 읽었는데. 아, 이 책은 확실히 소세키를 이해하는데 굉장한 도움이 된다. 소세키의 산문 『유리문 안에서』도 소세키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한눈팔기(길 위의 생)』을 더 추천하고 싶다. 

 

 

 

내면세계에 대한 집요한 탐험과 성찰이 아마도 그를 ‘일본의 세익스피어’로,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로 군림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일본의 지폐에 소세키가 등장한다는 이야길 듣고 굉장히 부러웠다. 우리에게도 ‘이이’, ‘이황’이나 ‘세종대왕’이 있긴 하지만, 근대와 현대의 문학가가 화폐의 주요인물로 등장한 것을 생각할 때 조금 부러울 따름이다.

 

 

문학가가 지폐의 초상화로 등장한 인물이 조금 부러울 따름이다.

 

  참고로, 『한눈팔기(길 위의 생)』는 원제목이 <미치쿠사>이다. 일본 특유의 어휘로 사전적 설명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단순히 길가에 난 풀을 말하고, 또 하나는 길 가는 도중에 딴 짓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말이다. 보통 후자쪽이 '도중에서 지정거린다, 도중에서 한눈 팔며 시간낭비를 한다'는 관용구와 함께 널리 쓰이고, 소세키 또한 후자의 감각으로 이 제목을 붙인 것 같다(『길 위의 생』. 320p). 

    

 

 

3

소세키가 어떻게 인간의 내면세계, 마음 안으로 깊이 내려갈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의 유학생활 이전에 그의 불행했던 유년시절의 경험들을 들 수 있다. 소세키는 아버지의 후처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양친이 고령인데다 형제가 많은 탓에 그의 태생은 환영을 받지 못했다. 고물상의 수양아들로 보내졌지만 사는 게 변변찮은 것을 누나가 불쌍히 여겨 다시 생가로 돌아온다.

 

 

‘나는 작은 광주리 속에 뉘여 매일 밤 고물가게의 잡동사니와 함께 요츠야 야시장의 노점에서 밤바람을 맞으며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어느 날 밤 누나가 무슨 일인가로 그 앞을 지나가다가 발견하고서 가엾게 여겨서였을까, 품에 싸안고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나는 그날 밤 잠을 안 자고 밤새도록 울어 대기만 해서 누나는 아버지에게 몹시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유리문 안에서』, 109-110p)

 

 

하지만 소세키는 또 다시 4살 되던 해에 어느 집에 양자로 보내진다. 8-9세때까지 그 집에서 자랐는데, 얼마 안 되어 양가의 묘한 분란이 생겨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웃고픈 현실은 소세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자신의 부모들은 소세키에게 부모가 아니라 조부모라고 여겼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날 밤에 하녀가 조용히 이 비밀을 알려준다.

 

 

“도련님, 도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분은 정말은 도련님 아버지와 어머니세요. 아마 그래서 저렇게 이 집을 좋아하는 모양이야. 참 묘하지, 하고 두 분이 말씀하시는 걸 제가 들었기 때문에 살짝 도련님에게 알려 드리는 거예요.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아셨지요?”(『유리문 안에서』, 111-112p)

    

 

 

 

이 비밀을 듣고선 소세키는 굉장히 기뻤다고 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사실을 가르쳐 준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단지 하녀가 나에게 친철한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는 것. 그렇게 따져 본다면, 그 늦둥이자, 8남매의 막내인 소세키가 환대받지 못한 가혹한 운명이 얼마나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는지를 알 수 있다. 『길 위의 생(한눈팔기)』에선 이런 대목이 나온다.

 

주인공 겐조의 말이다.

 

 

‘친 아버지 쪽으로 보더라도 양아버지 쪽으로 보더라도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물건이었다. 단 친아버지가 그를 허드레 물건으로 취급한데 반해 양아버지는 당장 무슨 도움을 받으려는 속셈이었을 뿐이었다....사환이든 뭐든 시킬테니까 그리 알아라.’(『길 위의 생』275p)

 

 

친부나 양부도 모두가 소세키에겐 상처였다. 누구 하나 제대로 환대해주는 이가 없었는데, 소세키가 『도련님』이란 소설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도련님은 일본어로 ‘봇짱’이다. 봇짱에서 ‘짱’은 친근함을 주는 애칭이고, ‘봇짱’은 도련님이란 뜻이라고 한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하녀 할머니는 누가 그를 뭐라고 해도 주인공, 도련님의 편을 든다.

 

 

“도련님, 소원인데요. 기요가 죽거든 도련님 네 절에 묻어주세요. 무덤 속에서 도련님 오기를 낙으로 삼고 기다리고 있겠어요.”(『도련님』, 231p)

 

 

개인적은 생각인데, 기요 하녀 할머니는 소세키가 그리워하는 어머니에 대한 상징이 아닐까 싶다.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힘겨운 삶을 살았던 소세키가 14살 때 생모 치에(54세)는 죽는다. 1875년에 양가에서 생가로 돌아온 소세키는 1881년에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어머니와 함께 보냈던 시간이 6년 남짓 되겠다. 생가에 돌아와도 부모님을 조부모님이라고 불렀던 소세키에겐 할머니란 단어가 어머니였던 것이다. 막둥이 소세키의 할머니는 ‘나이 많은 엄마’였던 것이다.   

    

 

 

 

4

소세키의 가정사에 얽힌 슬픔은 숙부의 사기 사건이 더해진다. 

아버지의 유산 상속문제를 믿고 따랐던 숙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하지만, 돈이 결국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일까? 원래 사람이 그런 것일까? 소세키의 작품 속에는 항상 <돈>문제가 나온다. 아마도 돈은 우리 현실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아닌가? 특별히『길 위의 생』(한눈팔기)에서는 '돈'이야기로 계속 점철된다. 우리 인생도 돈 이야기 안 할 수 없는 인생이지 않는가! 소세키는 숙부에게 유산상속 문제로 인해, 돈 문제로 인해 받은 상처와 아픔을 그는 작품 속에서 등장시키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마음』이다. 그 작품에서 등장한 선생님의 이야기들 속에 숙부는 선생님을 더욱 외롭게 만들어버렸고, 사람에 대한 불신,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나는 외로운 사람일세.”(『마음』, 27p)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 ‘시즈’와 결혼하였지만, 선생님 당신은 고독하고 외로운 영혼이었다. 『마음』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 삼촌에게서 ‘상처받은 데미지’는 자신의 소울메이트 K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소세키의 이러한 집요한 마음탐구는 삼촌에게 받은 데미지, 상처로 인해 K까지, 자신의 결혼생활까지, 그리고 자신의 인생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더 빛나는 성찰과 참회는 이렇게 나타난다.

 

 

‘숙부에게 속았을 당시 내 마음은 타인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했네. 그러면서도 나 자신만은 정직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 세상이야 어찌 되었든 나만은 훌륭한 인간이라는 믿음이 마음 속 어딘가에 있었던 걸세. 그 믿음이 K의 일로 맥없이 무너져버리면서 나 역시 숙부와 똑같은 부류의 인간임을 깨닫고 나니, 갑자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네. 타인을 불신했던 나는 이제 자신까지 불신하게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네.’(『마음』, 304p)

 

  

 

 

5

자신의 인생, 사람에 대해 불신감을 가득 안겨주었던 숙부의 사기 사건은 『문』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1910년 43세의 소세키는 3월부터 6월까지 아사히 신문에 『문』을 연재한다. 그리고 6월에 위궤양 때문에 나가요 위장병원에 입원한다. 8월에는 슈젠지온천에서 다량의 피를 토하며 위독한 상태에 빠진다. 이를 ‘슈젠지의 대환’이라 부른다. 1916년 11월 21일, 49세의 소세키는 위궤양 악화로 쓰러진다. 12월 2일에는 내출혈로 재차 위독한 상태에 빠지고, 12월 9일 오후 6시 45분에 사망한다. 소세키가 이야기한 문은 무엇일까?

 

『문』은 주인공 소스케와 아내 오요네의 평범하고도 단촐한 일상을 그려준다. 외부사회의 단절은 그 두 사람 부부를 하나되게 만들었다.

 

 

‘소스케와 오요네는 확실히 금실 좋은 부부다.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아직 한나절도 서먹서먹한 마음으로 지낸 적이 없다. 말 다툼으로 얼굴을 붉힌 적이 없다....그들의 생활은 넓이를 잃음과 동시에 깊이를 얻었다. 그들은 6년간 세상과 산만한 교섭을 찾지 않는 대신 그 6년의 세월을 걸쳐 서로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들의 생명은 어느새 서로의 밑바닥까지 파고들었다. 세상에서 보면 두 사람은 여전히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보기에는 도의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였다.’(『문』, 168-169p)

 

 

하지만 그 부부는 세상을 등진 부부였다. 부모, 친척, 친구, 일반사회, 학교로부터 버림받은 ‘타락학생’이었다. 이 이야기는 20대의 『산시로』, 30대의 『그 후』, 그리고 『문』의 이야기로 얼추 이어진다고 보면 되겠다. 소스케와 오요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었던 야스이, 이 삼각관계에서 부부의 도덕적인 책임을 나타난다.

 

 

『산시로』에서 등장한 산시로와 미네코는, 『그 후』에서는 다이스케와 미치요가 등장한다. 20대의 푸르른 청춘이 이제 30대로 접어든 셈이다. 『산시로』에서도 돈을 빌리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후』에서도 다이스케가 친구 히라오카와 미치요 부부에게 돈을 빌려준다. 이 세 사람은 동창이다. 다이스케가 손수 히라오카와 미치오 커플을 이어주는 중개역할까지 했다. 그러기에 남다른 관계이다. 하지만 다이스케는 한량처럼 늘 지낸다.

 

 

‘남의 부인이 찾아오는 것을 그렇게까지 기다릴 까닭이 없다는 생각’(165p)을 하면서도 다이스케는 스스로 ‘자기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상대방을 답답하게 만드는 사람’(176p)이라고 평한다. 다이스케는 모든 이의 만족이 아닌 오직 한 사람, 특별히 자기 자신의 결정에 따른다. 그 『그 후』의 다이스케의 결정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이 『문』에서는 소스케 부부의 이야기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소세키는 이 도덕적인 잘못의 결과로 부부의 태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태의 문도 문이긴 하다. 3번의 유산을 통해 6년의 결혼생활 동안 자식이 없는 불행을 안고 산다. 더 나아가 요오네는 점쟁이한테 찾아가 아이가 영원히 들어서지 못한다는 저주 섟인 발언을 듣게 된다. 자기 부부의 잘못으로 인해 인생이 완전히 틀어진 야스이가 몽골에서 돌아와도 대면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소스케는 뜬금없이 10일 간의 참선체험을 하게 된다.

 

 

‘자신은 문을 열어달라고 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너머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다만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하는 목소리가 들렸을 뿐이다(『문』, 252p).’

 

 

‘그 자신은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 같았다....그곳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고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문을 지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문을 지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아래에 옴짝달싹 못하고 서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문』, 253p)

 

 

소세키가 가정환경으로부터 느꼈던 불안과 트라우마는 평생 그의 가슴에 그림자로 남았다. 개인적은 가정사에서 느꼈던 불안은 외부환경에 상관없이 그의 마음을 늘 짓눌렀을 것이다. 그 어린 시절에 대해 소세키는 『길 위의 생』에서 이렇게 말한다.

 

 

“...설혹 사실에 선을 긋는다 하더라도 감정을 밟아 죽일 수는 없어. 그때의 감정은 살아 있으니까. 살아 지금도 어느 구석에서 꿈틀거리고 있으니까. 내가 죽어도 하늘이 부활시켜주니까 난들 어쩔 수 없다구.”(『길 위의 생』, 304p)

 

 

‘감정을 밟아 죽일 수는 없어. 그때의 감정은 살아 있으니까. 살아 지금도 어느 구석에서 꿈틀거리고 있으니까.’ 란 이 대목은 물론, 셋째 형에게 빼앗긴 첫째 형의 유품인 시계에 대한 부분이다. 소세키가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상처받았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의 파편이기도 하다.  

 

 

 

6

소세키가 소유한 내면의 끊임없는 불안이 그는 <문>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다. 물론 소세키는 자신의 작품의 제목에 대해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신문사에서 제목을 붙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세키의 <문>은 인생의 문, 고통스런 인생의 문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마음 속에는 죽지 않는 아내와 튼튼한 아기 외에 면직이 될 듯 될 듯 하면서 안 되는 형이 있고, 천식으로 죽을 듯 죽을 듯 하면서도 아직 살아 있는 누이가 있었다. 새 지위를 얻을 듯 얻을 듯 하면서 아직 얻지 못한 장인도 있었다. 또한 이들과의 관계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로 있기도 했다.’(『길 위의 생』, 248p)

 

 

『길 위의 생』을 보면 진짜 겐조와 얽힌 관계들이 그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이 소세키를 이해하는 데 제일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소세키는 『유리문 안에서』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죽음이 삶보다 고귀하다고 나는 믿는다.

불유쾌함으로 가득 찬 이 삶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소세키는 자살하지 않았다. 그는 건강 악화로 인해 죽었다. 하지만, 그의 불행과 고통 가운데서 야기된 모든 것들이 그에게 이런 말을 남기게 하지 않았나 싶다.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

 

인생의 문, 죽음의 문은 누가 대신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혼자 열고 들어가야 할 문인 셈이다. 소세키가 말한 문은 ‘죽음의 문’이란 생각을 나 혼자서 해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눈팔기'란 제목은 잘 지은 듯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7

소세키는 확실히 잘 읽힌다. 확 읽힌다. 하지만 너무 마음이 무겁고 우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인 듯 하다. 소세키의 내면을 훑는 데는 아마도 무게감 있는 감정의 저울질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소세키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것은 삶의 무거움에 대한 공감도 한몫하겠지만, 치열한 삶의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인간의 내면세계의 깊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한 인간의 깊숙한 불안을 조망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본에 소세키같은 작가가 존재했다는게 또 하나 부럽!

 

 

8

작가 위화는 ‘모든 이야기는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소세키가 지닌 이야기의 영혼 때문에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읽는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한 개인, 한 사람이 바로 세계’라는 말...소세키에게 그 말이 적용되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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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eath)가 아닌 C(choice)를 선택하는 자: 소세키의 <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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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소세키전집읽기를 시도할 때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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