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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의 '시' 해석-시가 사랑이고, 사랑이 시이다

탐독: 탐서/시와 케렌시아

by 카알KaRL21 2022. 2. 19.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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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의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시인 나태주의 인터넷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 게재된 시 중에 '시'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제목이 '시'이다. 지구 한 모퉁이라는 공간과 배경을 가지고 와서 사랑과 시를 엮어가는 시인의 마음을 한번 따라가보자.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송이가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 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시'란 시를 생각하다

시를 생각하면 여러가지 우린 어렵고 해석하기 힘들고 다가가기 힘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어떤 시는 해석도 안 되고, 시인 혼자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완전 독자가 '지알못'이 되는 경우이다.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시는 참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해주는, 3연의 '마음 속에 시 하나 싹틔움을 통해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지는' 기능을 가진 듯 하다. 시인 나태주는 마당을 쓰는 일을 통해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지고, 꽃 한송이가 피어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지듯, 마음 속에 시 하나 싹 틈이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진다는 단순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하지만, 이 1,2,3연에서 보여준 모든 행위는 결국 마지막 연에서 정점에 다다른 듯 하다.

 

나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마당을 쓰는 일 →꽃 한송이 피는 일  →마음 속에 시 하나 싹 틔우는 일,

 

이 모든 일 보다 더 큰 일은 '내가 지금 그대를 사랑하는 일'이다. 왜 이게 그렇게 큰 무게감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가하는 것은 그 다음 문장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에서 찾을 수 있다. 마당 쓸어 지구의 한 켠이 깨끗해지고, 꽃 한송이 피어 지구 한 켠이 아름다워지는 두 문장을 동시에 가져와 4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성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4연에선 3연의 내용을 배제하고 그냥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라고만 말한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지고 밝아졌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왜 3연을 제외시키고 표현했을까?

 

나의 순전히 개인적인 해석이다. 이 시의 제목이 '시'이다. 그리고 3연에서 '마음 속에 시 하나' 그리고 그것이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라고 했다. 이 시의 제목이 그리움이나 사랑, 뭐 이런게 아니고 '시'이기 때문에 이 시라는 중심무게가 3연에서 '지구 한 모퉁이 밝아진 것'을 4연에서 은근히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시인이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지금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게 시와 연결되어 있다는 뇌피셜적인 접근이다. 그래서 1연과 2연이 묶이고, 3연과 4연이 묶인다. 시인은 지금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게 바로 3연의 마음 속에 시 하나 싹튼 것으로 묶을 수 있겠다. 마음 속에 시 하나 싹튼 것이 지금 그대를 사랑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랑하면 시인이 된다'는 평범한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랑을 하는 인간은 어떤 순간보다 더 큰 포텐셜을 소유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지구의 한 모퉁이가 밝아지고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만큼 시야와 시선과 관점이 남다르게 되어지고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것을 시인은 '지구'라는 큰 영토를 빌려 와 '지구 한 모퉁이'로 표현한다. 지구는 굉장히 크지만, 한 모퉁이는 진짜 1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이다. 하지만, '지구 + 한 모퉁이'라는 두 단어가 만나서 엄청나게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선사해주고 있다. 정말 벼룩 한 마리가 겨우 거니는 면적이라도 '지구 한 모퉁이'이긴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구가 주는 느낌이 크기 때문이다. 단어가 가진 어감과 뉘앙스가 이렇게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은 새삼스럽다. 

 

 

나태주의 시집 속의 그림에서

 

 

지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 속에 시 하나가 싹 튼 것이고, 그것은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지고,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지는 일이다. 왜 수많은 문학의 장르 중에 연인끼리,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랑이 오갈때 소설가가 된다, 수필가가 된다, 비평가가 된다고 하지 않고 시인이 된다고 했는가? 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시는 계속 생각하고 음미해야만 그 의미가 더욱 발화되기 때문이다. 시는 똑같은 단어들이고 문장이고 수많은 장르끼리 오갈 수 있는, 그러니깐 시에서 쓰는 단어를 소설이나 사설에서 쓸 수 있다. 동시에 소설이나 비평에서 쓰는 단어를 시에서도 쓸 수 있다. 똑같은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는데 '왜 시는 시이냐' 이 말이다.

 

 

 

 

<시>라는 쟝르는 곱씹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meditation은 명상, 사색, 묵상의 의미를 가진다. meditation은 '되새김질하다'는 뜻이다. 시는 meditaion할 수 있는 맛을 가지고 있다. 한 번 거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한반복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이 가진 시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지금 그대를 사랑한다에서 '그대'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대가 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그 대상이 누구든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대'가 누구이든지 간에 사랑한다는 것은 계속 되새김질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긴 것이고, 그것은 시와 같이 발화하고 번성해 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그대가 사람이든지, 아니면 자연이든지 동물이든지 간에 의미의 발화, 의미의 멀티플multiple, 증폭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히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지는' 일이다. 사랑은 시처럼 무한발화, 무한재생, 무한사색할 수 있는 힘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시이고, 시가 사랑이다!

 

 


 

 

<시와 케렌시아>란 카테고리는 새로 만든 블로그를 폐쇄하고 난 후에 만들어진 카테고리이다. 

 

 

퀘렌시아Querencia/케렌시아는 투우장에서 소와 투우사가 싸움을 벌이다가 잠시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한 숨 돌리는 장소(공간)을 말한다. 그때 소는 거기서 평정과 안식을 누리게 된다. '안식처', '피난처'라는 의미를 가진다. 시가 내겐 그런 케렌시아이길 바랄 뿐이다. 시를 대하면 대할 수록 우리가 나누는 언어와 단어와 말과 글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깊게 느끼게 된다. 케렌시아란 단어가 한때 유행했었다. 지금은 우리에게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휴식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란 의미'로 자리잡은 듯 하다.

 

누구에게나 '케렌시아'가 필요하다. 

 

이곳을 방문하는 여러분들도 그런 케렌시아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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