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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행복' -부재감과 존재감의 균형감각balance을 가지는 것

탐독: 탐서/시와 케렌시아

by 카알KaRL21 2022. 2. 21.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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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 게재된 시 '행복'이란 시입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한번씩 무작위로 시를 선택해서 생각해보는 이 시간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행복'이란 시




행복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시'에 대해 생각하다

 

우리는 흔히 행복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블로그 이웃끼리도 행복을 바라고 기원합니다. 옆 사람이 행복을 빌고 바란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이 듣기 싫지 않은 것은 사람들마다 다들 행복해지고 싶은 깊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겠죠? '행복론'같은 책이나 이론도 살펴보면 있겠지만, 우리가 행복을 열렬히 찾아다닌다고 해서 행복이 구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이런 것이 아닐까? 저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만, 행복은 무언가가 내 안에 잠시든지 아니면 오랜 시간이든지 머물렀다가 나갔는데, 그 무엇이 내 안에 남아있는 그 여운이 긍정적이냐? 아니면 부정적이냐? 나를 웃게 만드느냐? 아니면 나를 절망하게 만드느냐?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내 안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가느냐?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생각은 이 시를 대하면서 행복에 대해 찰나적으로 생각하면서 스치고 지나가는 단말마적인 생각의 편린일 뿐입니다. 다들 생각이 다르시겠지만, 저는 문득 그런 생각을 붙잡아 봅니다.

 



"내 안에 무언가가 들어왔든지 아니면 나갔든지 간에 그리고 후에 남은 리액션과 해석"

 

 

뭐 이렇게 정의해보고 싶은데요. 정작 우리가 행복 운운하지만 우리도 행복이 무언지 잘 모를 때가 많은 것 같네요. 그건 아마도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언가에 젖어 살면 그 중요성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회복탄력성>의 저자, 김주환은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난 후에 부모님의 부재가 너무나 큰 그리움으로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너무 보고 싶어서 정말 10분만이라도 얼굴 보고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부모님의 그늘과 후광, 아니면 후원자의 따스한 지원 아래 온실속의 화초처럼 지내다가 그 배후가 사라져버렸을때, 그것이 물리적이든, 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간에 사람은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소중함의 가치를 더 아는 듯 합니다.

 


그래서,

"부재감은 존재감의 가치를 입증해 주는 요소"

 

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늘 생각하게끔 하는데요. 행복 또한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의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 행복에도 레벨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행복은 누굴 즐겁게 해주는 것, 타인에게 느끼게 하는 차원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닐까요. 물론 너무나 이타적이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타인의 기쁨을 바라는 과거의 기성세대의 부모님 세대도 있지만. 자신 뒷바라지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부모님 또한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게 기쁘기 때문에, 행복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는데, 자녀는 자신을 몰라주고 주위의 시선 또한 곱지 않을 때 부모는 자괴감이 빠질 수 있지만,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그렇게 산 것에 대해 흡족해 한다면 행복한 것입니다. 후에 자녀가 알아주면 더 감사한 것입니다. 요즘 트렌드는 많이 바뀌어서 "부모 자신이 행복해야 자녀도 행복하다"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정말 모든 행복의 기원은 본인의 마음에서부터 출발하고 그 마음이 달달하고 행복해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이되는 것 같습니다. 쉽지 않은 부분인데요, 행복에 대한 시를 앞에 두니 이런 저런 생각들이 가지를 치고 올라와서 읊조려 봅니다.

 



시인 나태주는 행복에 대해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행복을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소소한 것에서 시인은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행복은 이거다, 저거다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생각하는 행복에 공감을 할 수만 있다면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르침을 받으려고 시를 읽지 않습니다. 물론 깨달음과 도전을 받기 위해 시집을 들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 한편 읽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면 그냥 좋은 것입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시는 이런 기능을 가지고 있으니 당신도 이렇게 공감해' 라는 것이 또 하나의 가르치기가 될 수도 있겠다 싶네요. 중요한 것은 텍스트text는 하나지만, 생각하기, 사색하기는 자유라는 사실, 그러기에 우리는 시를 대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저녁 때 돌아갈 집, 힘들 때 마음 속으로 생각할 사람,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이 모든 상황들이 앞에서 언급했던 부부재감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시점에서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면 감사한 것이고 행복한 것이다 라고 말해주는 듯 합니다.

 



저녁 때- 저녁은 날이 저물어 하루가 마감하는 시간이고, 사람들이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 시기입니다. 그때 자신의 따스한 보금자리인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집이 없어 노숙하시는 분들의 고통과 아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방랑자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순 없지만, 부재감이 한껏 치밀어 오르는 시점에 존재감, 내가 숨쉬고 살아가고 있는 집이라는 아침에 출발했던 그 곳으로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행복이라고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나태주 시집 안에 있는 그림
꽃을 보듯 너를 본다의 시 가운데 삽화


힘들 때-사람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아픈 경우는 일일이 다 말할 순 없습니다. 끝도 없는 경우의 수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런 모든 종류의 하드타임hardtime때에 '마음 속 생각할 사람'이 떠오른다는 것,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부재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상실감과 부재감이 때론 우리의 인생을 포기하게끔 만듭니다. 젊은 연인들 중에 '정말 너 없이는 못 살아!'라고 하고 자살을 하거나 자살시도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군대 있을 때 동기의 여친이 '네 없이는 못 산다'며 동맥을 끊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죽지는 않았습니다만. 젊은 날의 객기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당사자는 그렇지 않거든요. 당사자는 그 부재감의 순간을 견딜 수가 없어서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느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한 사람이 자아를 온전히, 100% 이해하는 존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원래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타인을 향해 완전히 오픈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나 신앙을 가진 이들이라면 조금 나을 수도 있겠지만, 모두가 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온전히 타인의 얼굴에 집중하기엔 힘든 구석이 많습니다.



부재감이 치밀어 오를 때 존재감을 떠올릴 수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제가 20대에 감수성이 넘쳐서 연인과 헤어지고 난후 정말 삶을 놓아버리고 싶었는데요. 그때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부모님의 존재가 떠오르지 않는 겁니다. 눈 앞에 그 여친의 부재감만 생각난다는 겁니다. 얼마나 모순적입니까? 제가 나이가 조금 더 먹고 돌아보니 부모님의 거대한 사랑이 얼마나 묵직한 지를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왜 그때는 몰랐을까요? 물론 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얼마나 자신의 시각과 관점과 존재에 매물되어 한계가 많은 인생인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직도 기억나는데요. 한 4년 사랑했던 여친과 헤어진 후에 너무 힘겨워서 어머니랑 통화를 하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애가 있으면 이야기를 하지 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때 자취생활을 오래한 탓에 부모님에게 속 시원하게 보고하고 그런게 없었고 보통 남자아이들이 다 조곤조곤하게 부모님께 보고하고 그런 스타일이 아니니깐 말이죠. 제가 만나는 여자친구를 부모님께 당당하게 소개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무언가 큰 유리벽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걸 구체적으로 지금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너무 좋아하는데 넘어야 할 마의 구간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야기가 많이 곁길로 새어버렸는데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부재감이 때론 허상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재감 밑바닥에는 '존재감의 싹'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이 느끼는 인식이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는 여러분 자신이 살아가면서 뼈저리게 느낄텐데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원래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거창하게 카이사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넌센스 퀴즈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알은 무슨 알입니까? 아시는 분 댓글로, 아니 문자로, 아니 이메일로 보내시지 마세요. 제가 지금 바로 말할거니깐.ㅎㅎ 정답은 '눈알'입니다. 눈은 눈에 들어오는 모든 시야를 다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눈도 포커스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게 있고 보이지 않는 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 포커스를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 선명하게 드러날 부분과 흐릿하게 처리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생각과 사고 자체도 이런 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재감에 초점을 계속 맞추면 거기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포커스가 부재감에 꽂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존재감은 자신의 렌즈에서 다 흐릿하게 뽀얗게 처리되기 때문에 확인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흔히 '확증편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그런 전문적인 단어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자신이 느끼는 것이 얼마나 유한한가? 제한적인가? 라는 것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다. 그런데, 이 말도 어패가 있는 것이 우리가 뭐 돌아본다고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마는.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가 느끼는 부재감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많은 이야길 하면 왜곡도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부재감이라는 마의 구간을 지날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다는 고립감과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 '마음 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존재감이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한다는 것입니다. 근데 솔직히 힘들때 나만 힘들고, 나만 외롭고, 나만 미치겠고 그러면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그게 인간이죠. 그런데 부재감은 어쩌면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에게도 내 깊숙한 곳을 소통하지 못함에서 오는 부재감이 아닐까 싶은데요. 하지만, '마음 속으로 생각할 사람'을 한번 떠올릴 수 있다면 그건 정말 행복한 것입니다. 나를 응원하고 있고 나를 지지하고 있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 그건 엄청난 행복입니다. 


 

20대에 제가 어머니 앞에서 제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자꾸 딴 짓(?)을 하시는게 제 이야기를 안 듣고 계신 것 같은 겁니다. 그래서 굉장히 속이 상했죠. 난 심각한데, 어머니의 눈에는 그게 대수롭지 않게 보였나 싶더군요. 그런데, 나중에 내가 그 때 한 이야기를 어머니는 다 기억하고 계시고 언급을 하시는데요.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 이건 부모라는 위치가 보여주는 자녀를 향한 무한대의 관계이기 때문에 가능한게 아닌가 싶네요. 물론 세상의 모든 부모는 천차만별입니다. 예외도 있을 겁니다. 제가 하고싶은 말은 내 스스로 내 안에서 함몰되면 끝이라는 것, 부재감의 늪에서 빠져버리면 더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때는 '마음 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타인이 필요하다는, 관계가 필요하다는, '누군가'의 존재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주제로 머릿속에서 구상하고 있는 에세이가 있는데 나중에 또 이런 에세이를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힘들면 그런 존재감조차도 미미하고 희미해질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3연에서 행복에 대해 한층 더 깊이 나아가는데요. 그건 행복의 깊이로 더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의 상황, 고통의 심연으로 더 초대하는데, 그게 바로 '외로울 때' 입니다. '힘들 때' 보다 조금 더 나아간 단계라고 생각하는데요. 외로울 때, 아무도 내 곁에 없다는 완벽한 부재감이 나를 엄습할 때는 말합니다. 그때 시인이 떠올리는 것은 무엇인가요?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인간에게 노래가 있다는 것, 음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러분 너무 힘겹고 외로울 때 노래가 잘 안 됩니다. 술에 취해서 즐겁고 흥겨울때는 노래가 나올지 모르지만, 절망적일 때 노래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혼자 부를 노래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한 것이라고 합니다. 별것 없는 것 같은 이 짤막한 싯구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진짜 외로울 때 노래 혼자서 한번 불러 보십시오. 그게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냥 기분이 좋아 흥얼거리는 노래와는 달리 정말 내가 너무 외로워서 나를 달래줄 누군가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 '혼자서 부르는 내 노래'가 있다는 것? 무슨 가수도 아니고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요? 그런데, 인간이 다 가수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은 내 존재감의 이유가 되기에, 내가 부를 노래가 아직 있다는 것이 존재감의 근거가 되기도 하기에 시인은 '행복'이라는 시에다 이런 단촐하지만, 묵직한 싯구를 새겨놓은 듯 합니다. 

 

 

 

Epilogue...

 

 

행복은 부재감과 존재감의 균형감각balance을 가질 때 오는 것이 아닐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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