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아이를 왜 가져야 하는가?"

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아이를 왜 가져야 하는가?"

탐독: 탐서/사람HB

by 카알KaRL21 2021. 5. 27. 13:35

본문

오늘 아침에 제자가 뜬금없이 카톡이 와서 질문을 한다. 그래서 제자에게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답변을 해주었는데, 그 내용을 한번 싣고자 한다. 기독교인들에게 도움이 되었음 하는 바램이다.

 


 

제자가 질문한 내용은?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왜 아이를 가져야 하는가?" 였다.

 


 

 

 

기독교인으로서 아이를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2세, 쥬니어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점이다. '창조의 명령'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메시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인간으로 등장하면서 그들의 결혼과 출산과 양육과 그 과정을 통해 인류의 계보가 이어졌다. 그 인류의 거대한 족보가 이어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출산'이었다. 그 '출산'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명령: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메시지에 대한 순종이었다.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사랑의 씨앗으로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은 당연한 자연수순이지만, 이 자연수순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이고 창조법칙이라는 점이다. 성경적인 관점에선, 자손을 많이 낳고 번성하고 거대한 무리를 이루는 것이 원론적인 이야기인 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다음은 구약성경 창세기 1:27-28의 구절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하나님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에 충만하라, 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27-28)




창세기 1:28에 보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했다. 충만하다는 것은 흘러 넘치는 것이다. 흘러 넘치는 것에는 '다산'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인류가 '생육, 번성, 충만'의 창조명령을 따랐기 때문에 지금의 지구촌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들도 아이들이 많았다. 다산은 하나님의 축복의 의미이고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의 분위기와 세태는 이와 반대로 흘러간다. 정부가 출산을 장려하지만, 젊은 부부들은 저마다 출산을, 다산을 꺼려한다. 부담이 너무 많이 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진: 데일리서울)



출산을 통해 아이를 가지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아이들과 부모의 관계를 노후대책 문제까지 내가 짚었다. '고령사회', '과로노인'이란 말을 요즘 자주 하고 그것이 사회적인 현상이자 이슈가 되어가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 20-30대는 저마다 경제적인 독립을 외치고 주식이나 부동산, 아니면 가상코인이라도 발을 들여놓아 미래를 준비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지금의 40-50대는 '경제적인 독립' 보다는 부모님의 도움을 등에 업고 자란 세대이기 때문에(적어도 나는 그랬다, 캥거루족이네...ㅠㅠ)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노후까지도 내다볼 수 있어야 하는 현실이다. 다른 이들의 관점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의 개인적인 견해는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고령화사회를 위한 대비책이 옆에 있는 일본이나 우리나라가 굉장히 큰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런 대목을 먼저 이야기했다.

 

 

현대의 분위기는 아이를 적게 낳거나 아니면 아예 비혼을 추천하거나 결혼을 해도 출산을 하지 않는 분위기가 적지 않다. 출산을 강요할 수는 없는 부분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성경적인 원리는 이렇다.

 

그리고 성경적인 가정상은, 남녀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양육을 하면서 세대와 세대 간의 신앙의 전수와 교육이 동반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나의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자면,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우리는 '부모의 마음을 알아간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이를 낳고 키워보지 않고, 부모가 되어 보지 않으면 결코 부모의 입장과 마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나는 주장하는데,

우리가 육적인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물론 독신주의자도, 비혼주의자도 있을 수 있지만,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뤘다면, 출산과 양육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가는 지식'이 쌓여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지적인 정보와 지식의 덩어리가 아니라 삶으로 체득해가는 경험적인 지식이다. 히브리어로 '알다(안다)'는 의미의 ''야다yada" 란 동사는 단순히 아는 차원(to know)이 아니라 '경험하고 체험하는(to experience)' 지식, 뼛속까지 느끼고 깨달아가는 체험적인 지식의 차원에서 '야다'인 것이다. 내가 결혼하고 가정을 이뤄보니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내가 제자에게 이야기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성경적인 원칙과 원리들을 이야기했다.

 

 

창조명령은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메시지라는 첫번째와 두번째는,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메시지이다. 첫번째 메시지는 앞에서 이야기했고, 두번째의 의미를 카톡으로 나눈 내용이 바로 위의 사진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계를 인간은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것인데,

이 말은 쉽게 풀이하자면, 두 가지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바로 '개발'과 '보존'이다.

 

 

이 관점은 기독교세계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모든 지구와 우주와 자연을 개발하는 것이다. 더 나은 세상, 더 살기 좋고 행복한 세상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 개발이고 정복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너무 개발만을 일삼다 보면 자연과 지구와 환경이 파괴된다. 환경이 오염되고 생태계가 파괴되고 시들어가게 된다. 그러기에 '보존'이란 명령이 들어있는 것이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메시지는 이런 두 가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이런 창조적인 메시지, <개발과 보존> 의 가치는 이전에 썼던 윌리엄 포크너의 <곰>이란 소설에서 같은 결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이 기독교적인, 청교도주의적인 가치이고 메시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다 보니 또 길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제자에게 톡을 보내고 마무리 인사를 했다. 아침에 온 카톡 때문에 오늘 또 하나의 paper를 썼다. 어휴! 인제 점심을 먹어야겠네요. ㅎㅎ

 

별 것 아니지만 도움되길 바라~

 

오늘 하루도 다들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


 

 

 

윌리엄 포크너의 <곰>: 자연에 갑질(?)하는 인간의 초상화

1 알베르 카뮈는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이다”라고 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포크너를 칭찬했다.

karl21.tistory.com

 

정혜윤 <아무튼, 메모>: '문장이 마음에 내려앉는다'

1 메모해 둘껄 ↘우리는 가끔 꿈을 꾼다. 기억하고 싶은 꿈, 문장, 사건, 등장인물, 대사 ...하지만, 그것을 일일히 기록하고 메모를 남기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휘발된다. 단초가

karl21.tistory.com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