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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숙희의 시, '빈'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 뇌피셜(feat.결사곡에서 전수경이 낭독한 시)

탐독: 탐미/TV 프로그램

by 카알KaRL21 2021. 10. 11.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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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곡에서 전수경이 낭독한 서숙희의 시, 빈에 대한 썸네일
서숙희 빈

 

 

 

어떤 시를 대할 때 마음이 뭉클해질 때가 있습니다. 제가 드라마를 보다가 너무 마음에 다가와서 서숙희의 <빈>찾아서 감상하다가 나름대로 해석을 한번 해 보았습니다. 제가 해석하고 감상한 것을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안녕하세요, 카알KaRL21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를 삽입하였을 때 반향효과가 좋을 때가 있는데요, 예전에 박신양과 최진실이 주연한 영화 <편지>였던가요? 거기서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가 등장했더랬죠. <즐거운 편지>가 너무나 좋아서 황동규의 시집 <삼남에 눈리는 눈>을 여친과 함께 여행갔다가 구입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에 대한 소고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프롤로그... 즐거운 편지 -----Giver의 일상과 사랑하기의 즐거움(?) 황 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항상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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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된 시를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결혼작사 이혼작곡> 시즌2에서 이시은(전수경)이 낭독한 서숙희의 '빈'이란 시입니다. 좋은 시가 있으니 비록 저의 지극한 뇌피셜로 해석하는 거지만, 음미할 꺼리가 분명 있을거라고 믿고 글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아무런 이미지도, 동영상도, 아무런 소스도 없습니다.  서숙희란 시인이 누구지도 몰라서 해석이 산으로 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해볼려고 합니다.

 

 

전수경이 레스토랑에서 서반 옆에서 앉아서 사피영과 이가령을 앞에 두고 시를 낭독하는 사진
<빈>시를 낭독하는 드라마의 한 장면

 

 

대학 때 영시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한편씩 가지고와서 발표하는 시간을 갖자고 했을때, 저는 무식하고도 용감하게 Beatles의 <노르웨이의 숲Norweign Wood>를 들고 가서 과감하게 해석하고 발표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제가 그 노래가사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제일 앞장에 그 노래가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상실의 시대>를 소설치곤 2번 읽을 정도로 애착이 있어서 그럴 수도. 그냥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턱대고 상상력으로 해석하였지만, 즐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도 그런 즐거움이 머무는 이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에 대한 소고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

NORWEGIAN WOOD written by John Lennon/Sung by Beatles I once had a girl,or shou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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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서숙희

 

빈, 하고 네 이름을 부르는 저녁이면 

하루는 무인도처럼 고요히 저물고 

내 입엔 셀로판지 같은 

적막이 물리지 

 

 

어느 낮은 처마 아래 묻어둔 밤의 울음

그 울음 푸른 잎을 내미는 아침이면

빈, 너는 갓 씻은 햇살로 

반듯하게 내게 오지

 

심심한 창은 종일 구름을 당겼다 밀고 

더 심심한 나는 구름의 뿔을 잡았다 놓고 

비워 둔 내 시의 행간에 

번지듯 빈, 너는 오지

 


 

 

빈, 하고 네 이름을 부르는 저녁이면

-빈은 한자로 貧 (가난할 )입니다. 가난을 부르는 시인의 심상이 참 맑다고 해야 할까요? 가난은 불편하고 서럽고 아프고 때론 너무 비천해보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시인이 '가난'을 '빈'이라는 한자로 이름 부르듯이 부르는 대목에서 시인의 고급진(?) 감성이 느껴집니다. 가난은 힘듭니다. 고통스럽습니다. 무수한 수많은 대작가들이 가난을 떨추기 위해 글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그 '빈'을 부르는데, 가난한 자, 빈자의 제일 고통스러운 시간적 배경이 다가옵니다. 바로 '저녁'입니다. 하루를 어떻게든 살아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내일은 또 어떻게 살아가야할지에 대한 먹먹함도 존재할 것이고, 밥상 위에 둘러앉은 가족들이 느끼는 가난의 쓴 맛(?) 때문에 저녁이 맞다뜨리기 불편한 진실의 단두대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루는 무인도처럼 고요히 저물고 

-아무리 삭막하더라도 사람이 있다면, 그곳에 북적거리는 생명력과 활기가 있을텐데요, 빈, 가난한 자의 저녁은 아무도 살지 않는, 인적이 드문, 고요한 자연만이 존재하는 '무인도처럼 고요히 저문다'고 시인을 말합니다. 사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가난이라는 그 '빈'의 딱지 붙은 이들의 하루는 무인도같이 저무는 하루인 것 같습니다.

 

 

 

 

내 입엔 셀로판지 같은 

적막이 물리지 

-저녁꺼리가 아무도 변변치 않은지, 결핍과 기갈과 허기에 목마르고 메마른 목구멍은 포도청이 된 것을 '셀로판지 같은 적막'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떻게 '셀로판지'라는 단어를 가져왔을까요? 이 셀로판지가 어떤 색깔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셀로판의 색깔이 입안을 가려주지 않을까? 이건 시각적인 해석이고, '셀로판지 같은 적막이 물리지'라는 대목을 청각적으로 해석해보면, 셀로판지 특유의 소리가 비닐만지작거리는 소리로 좀 요란하다고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런데 입안에서 소리만 요란하지만, 오히려 물리는 것, 남는 것은 '적막'이 물린다는 결과를 초래하는데요, 가난한 이의 저녁에 먹을 것이 변변치 않으니 무인도같은 적막감이 식도에서도, 목구멍에서도 허기짐의 적막감이 감돈다고 해석해 볼 수 있겠네요.

 

 

 

 

어느 낮은 처마 아래 묻어둔 밤의 울음

그 울음 푸른 잎을 내미는 아침이면

-고통스런 밤, 배가 너무 고프면 잠도 오지 않을텐데요, 밤의 울음으로 지내다가 아침에 됩니다. '푸른 잎을 내미는 아침'이라는 것은 '푸른 잎'에서 굉장히 희망적이고 고무적인 느낌을 주는 듯 합니다.-

 

 

 

빈, 너는 갓 씻은 햇살로 

반듯하게 내게 오지

-그렇게 밤을 지나 청명한 아침이 눈부신 햇살, 그 햇살을 밥을 할 때 첫 작업인 쌀을 씻는 행위로 시작되는데요, 빈의 존재, 가난의 존재감과 무게감 때문에 하루를 가난하게 보낼 수 밖에 없는 빈자의 고통을 '갓 씻은 햇살로' 표현하면서 어김없이, '반듯하게'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솔직히 시인의 노래하는 가난의 정도가 어느정도인지 갸늠할 수 없기에 시를 읽는 독자는 뇌피셜로 상상할 수 밖에 없는데요. 저는 밤의 고통을 지나면 또 하루의 아침이 빈 때문에 더 속쓰리게 다가온다고 추측해 봅니다.

 

 

 

심심한 창은 종일 구름을 당겼다 밀고 

더 심심한 나는 구름의 뿔을 잡았다 놓고 

-가난이란 현실에서 바라본 창문은 심심하기만 합니다. 그 심심함은 할 일이 없음의 심심한 게으름이라기 보다는, 고통스런 가난의 현실과 허기진 뱃가죽에서 오는 심심한 창문이 될 수도 있고요, 그 창문을 통해 바라본 전경은 구름이 왔다가 갔다는 하는 절차가 당겼다 밀고 밀고 당기는, 그리하여 더 배고프고 가난한 헝거hunger(원래 '굶주리는 사람들'은 hungry이지만, 본인이 멋대로 헝거리가 아닌 '헝거'를 명사화시켰다. 여기선 '헝거'는 '-er'이 붙었다는 이유로 배고픈 자가 되겠다)는 더 심심해지는 것이기에, 그는 쓸데없이 창 너머의 구름의 뿔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전수경이 '더 심심한 나'를 낭독할 때 마음이 쒜해지던데요. 왜 그런지...'더 심심한 나'에서 '더'라는 말이 붙여면서 빈의 무게감이 더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배고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가난, 빈을 '심심한'이란 말로 변용하여 표현한 게 시를 읽는 독자에게 뭉클하게 다가오는게 아닌가 싶네요. 

 

 

 

비워 둔 내 시의 행간에 

번지듯 빈, 너는 오지

-가난이라는 것은 배고픈 것이고, 벌거벗은 것이고, 결핍된 것이고, 비천한 것이기도 한데, 그 가난의 '빈'이 시인이 시를 쓰는 그 시의 행간에도 번지는 듯이 옮겨온다는 것을 '번지듯 빈, 너는 오지'라고 마무리합니다. 시를 적고 있는 시인이 가난을 이야기하는 '빈'이란 시를 적는데, 그 시인의 '빈'의 심성과 기운이 자신의 시 기운 위에도 내려앉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아무것도 아닌 말장난 같지만, 시가 원래 그런 것이 아닙니까? 뮤지컬배우이기도 하고 지금은 서울종합예술전문학교 뮤지컬예술학부 전임교수이기도 한 전수경이 드라마 가운데서 이시은을 연기하면서 외워 읊은 시가 바로 <빈>인데요, 드라마 중에 다들 잘 나가고 돈 좀 있고, 가난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라서 이 시를 낭송하기엔 부적절하고, 게중에 그래도 가난한 시절을 경험했던 이시은 배역이 이를 소화했는데요, 그냥 그 시를 낭송하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앉아 있는 인물들이 재벌 2세 서 반(문성호), 방송국DJ 부혜령(이가령), 방송국PD 사피영(박주미), 그리고 작가 이시은(전수경)인데요, 다들 중산층보다는 더 나은 경제적인 배경과 지위에 있기 때문에, 이 시를 읊는 것이 마치 조선시대나 과거에 잘 나가던 엘리트들이 가무를 즐기면서 노닥거리는 '문학놀음', '글놀음(시놀음)'에 불과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시'라는 것은 언어이고, 그 언어가 집이 되어 '시'로 만들어진건데요, 이런 희귀한 시가 인기드라마에서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대화의 반찬이 되고 양념이 되는 것은 긍정적인 효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를 낭송한 것이 어떻게 보면 좀 생뚱맞기도 하지만, 드라마를 통해 시 한편 건진 것도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네요.

 

고급레스토랑에서 고급진 음식을 먹고 오히려 &lt;빈&gt;이라는 시를 생각했던 전수경
결사곡 전수경

 

전수경이 낭독했기 때문에 더 시가 묵직하게 다가왔다고 생각합니다(사진출처: TV조선 직찍) 전수경낭독 사진
결사곡의 전수경이 낭독한 빈

 

 

 

정말 가난한데,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시를 쓸 수 있을까요? 그건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이라는 눈'이 세상을 또 다르게 볼 수 있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적절한 언어의 집이 탄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맑은 가난'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돈이 없어서라도,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글을 썼던 무수한 작가들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레이먼드 카버, 도스토예프스키...경제적인 고통에서 자유할 수 있는 전업 작가가 얼마나 될까요? 현실적으론 너무 가난한지만, 그래도 글을 쓰면서 가난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마음만큼은 가난하지 않고 부하기 때문에 가난을 '빈'이라고 부르면서 시를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제가 다시 한번 드라마를 보니, 시는 역시 낭독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압축성, 함축성, 간결함, 단순함 그리고 여운...그게 시의 맛인 듯 합니다!

 

 

읽어주셔서,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참, 독서의 계절 가을날, 넷플릭스빠가 되어가던 제가 드디어 한권의 책을 읽어냈습니다. ㅎㅎ

 

 

 

<결사곡>이란 드라마에서 뜬금없이 등장한 서숙희의 <빈>이란 시가 여러모로 가슴에 많이 남아 한번 해석해 보았습니다. '가난의 눈'으로 바라 본 서숙희의 '빈'은 여러분에겐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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