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dex
1이기호의 반전
2 작가 이기호의 세계관
3 이기호의 기독교 삐딱하게 보기: 욥기 43장
4 작가 이기호의 오류
5 욥기에 대한 해석
6 <욥>, ‘상처 입은 치유자’로 서다!
7 욥기 42:10의 ①의 해석:‘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8 욥기 42:10의 ②의 해석: ‘여호와께서 욥이 곤경을 돌이키시고’
9 욥기 42:10의 ③의 해석:
10 삐딱한 기독교, 삐딱한 이기호
11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은?
12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의 기본정신이 무엇인가?
이기호를 참 좋아한다. 난 이기호가 기독교인인 줄 알았다. 내가 읽은 책들이 전부 교회와 관련되어 있었다. 『성령충만기』,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그리고 이번 소설『목양면 방화사건 전말기』, 이게 언뜻 보기에는 그냥 단순한 방화사건을 다루는 것 같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목양교회의 방화사건’이 주 소재이다. 더군다나 동네이름도 ‘목양면’소재지다. 목양牧羊이란 말은 기독교적인 용어이다. 흔히 목사를 목회자라고 할 때, 목회牧會=목양牧羊 이란 말과 동일하게 사용된다. ‘양을 친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양으로 비유하셨기에 그런 의미로 전해진다. ‘목양면’에 위치한 ‘목양교회’에 방화사건이 났다. 이것은 이 방화사건이 기독교에 대한 스토리라 예측할 수 있겠다. 범인을 잡지 못해 형사가 등장인물들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목양교회를 둘러싼 문제를 파헤치는 게 이 소설의 스토리이다(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기호의 아내가 기독교신자이고, 이기호는 아닌 란 걸 그의 에세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기호의 작가의 말이다.
‘하나님은 뭐,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고요.’
........
‘올 여름은 그렇게 많이 더웠쟎아요. 하나님은 뭐 그것도 관심 밖이셨겠지만.’(168p)
이 말은 이기호 작가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는 입장을 표했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은 작가 이기호의 세계관을 반영해준다. 이번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정말 살다가 살다가 이런 폭염은 없었다. 하지만, 이기호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이런 더위를 신경쓰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세계관적인, 철학적인 용어로 이기호가 유신론자인지, 무신론자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신이 더 이상 인간의 세계에 관여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안고 있는 셈이다. 이것을 ‘폐쇄체계’(closed system)라고 부른다. 신의 존재 유무를 떠나서 신은 더 이상 인간사와 우주의 영역에 아무런 터치도, 개입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신념체계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개방체계’(opened system)이다. 이 말은 신이 여전히 인간사와 세상사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믿는 신념체계이다.
전자(폐쇄체계)는 역사적으로 볼 때, 세계대전과 수많은 질병과 재난이 일어난 후 인간의 처한 절망과 재난에 대해 더 이상 신의 존재를 용납할 수가 없다, 신은 죽었다God is dead라고 생각하는 데서 나온 이론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이런 불상사가 인간사에 가득할 수 있단 말인가?’후자(개방체계)는 인간사와 세계사, 우주사가 여전히 혼돈과 무질서가 가득하고, 카뮈가 말했던 부조리가 넘쳐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여전히 인간과 세계와 우주에 개입하고 합력한다는 것을 믿는 이론이다. 전자보다 후자가 더 믿음이 좋은(?) 이들이 선택할 것이다. 전자보다 오히려 더 고지식하고,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글을 쓰는 나,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부류는 후자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기호의 최근작이 문학적으론 용납할 수 있으나, 신앙적으론 굉장히 불쾌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이를테면, <이기호의 삐딱하게 본 기독교>나 <이기호의 기독교 삐딱하게 보기>라고 할 수 있겠다. 더군다나 성경의 욥기를 가져와 <욥기 43장>이라고 붙인 대목도 그러하다.
성경의 욥기는 총 42장으로 기술되어 있다. 작가 이기호는 욥기, 그 다음 장을 쓴다는 의미에서 43장으로 부제를 붙인 듯하다.
자, 이기호는 당대의 의인이자, 청렴결백하고 신심이 대단하다고 소문난 욥Job을 하루 아침에 재산과 가문과 집안과 자녀들을 망하게 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전신이 악창(나병, 문둥병 종류의 종기)이 나게끔 내버려둔 하나님이 못 마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욥기>는 욥을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셔서 자녀들도 10명이나 다시 주시고, 집안의 경제력과 가문과 모든 부분에서 이전보다 더 배가된 축복을 해주신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 그런데, 작가 이기호는 이렇게 끝난 욥기에다 43장을 추가한,『목양면 방화사건 전말기』를 기록했다. 이기호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이기호의 관점은 굉장히 인간적인 관점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에 대한 불만을 담고 작품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기호가 욥기를 제대로 읽었다면, 발생하지 말아야할 오류가 등장한다는 데 있다. 첫째, 욥기 전반부에서 욥의 집안이 망하고 자신의 몸뚱이가 악창이 났을 때,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하고 저주했다는 대목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욥은 자신의 모든 상황과 불행이 괴로운 나머지 자신과 자신의 생일(출생)을 저주했지, 하나님을 저주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욥은 인생이 완전 풍비박산 났고, 그로 인해 세 친구가 위로차 욥을 방문하게 된다. 이들은 욥의 슬픔을 1주일 정도 동참하면서 위로한다. 그러다가 욥의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재난에 대해 욥에게 추궁한다. 심문하듯이 이야기한다. ‘죄가 있으면 빨리 회개하라고, 네 죄 때문에 이런 재난이 온 것이 아니냐? 네가 모르고 있는 죄가 있을 수 있으니 빨리 회개하라’고 말한다. 이 말들이 칼이 되어 욥의 가슴에 못이 박힌다. 욥은 지은 죄가 없기 때문이다. 이기호의 첫 번째 잘못된 이해는 ‘욥이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을 저주했다’는 내용인데, 그것은 구약성경의 이야기와 맞지 않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이기호는 욥에게 악창이 ‘발바닥’에만 났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자신의 발바닥에 악창이 나자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인물이었죠(166p)’.
-‘...자신의 발바닥에 난 악창이, 때론 어떤 슬픔의 도화선 같은 역할을....(167p)’.
하지만, 구약성경은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욥기 2장 7절)라고 되어 있다. 이기호가 작품을 쓰고자했다면, 욥기를 제대로 섬세하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욥은 발바닥만이 아니라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란 말은 전신, 온 몸이 문둥병같은 악창이 걸렸단 말이다. 욥이 발병(?) 난 정도가 아니라 온 몸이 고름이 흐르고 건드리면 부스러지는 문둥병, 나병과 같은 질병에 걸렸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욥이었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그 타이밍에 욥이 하나님을 ,신을 저주했다면, 하나님은 욥에게 그런 시험test을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 이기호가 욥기 43장이란 부제까지 달았다면, <욥기>를 더 제대로 면밀하게 검토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작품에 대한 이야길 하기 보다 먼저 구약성경의 <욥기>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과 나의 개인적인 해석을 이야기하고 싶다.
욥은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재난을 겪는다. 최고의 부호이자 정직하며 의인이며 모든 이에게 존경받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가정이 망하고, 자녀들이 참변을 당하고, 재산이 날아가 버리고,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중이시다. 친구들은 위로가 되기는커녕 상처만 주고 있다. 우리도 그런 적이 있지 않은가! 상처입은 사람 앞에서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을 때 그게 얼마나 상대에게 큰 상처가 되는가! 너무 큰 슬픔 앞에선 침묵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공감과 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친구들은 몰랐던 것이다. 욥이 그런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 욥기 말미에 가면 하나님이 욥을 만나주시고 욥은 하나님에 대해 소위 말하자면, ‘은혜’를 받게 된다. 그리고서 이전에 잃어버렸던 모든 재산, 가문, 배경, 명성, 권력, 자녀들까지도 배가되는 축복을 받는다. 여기서 보통 기독교 설교자들이 흔히 우리가 고난과 역경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잘 견디면 배가되는, 넘치는 축복을 받는다는 식의 이야길 하면서 욥의 이야기를 자주 끄집어낸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주의에 물든 해석이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다 죽었는데,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물론 우리의 상실의 상처는 새로운 사랑의 대상에 생겨나면서 덮이기도 하고 아물기도 한다. 하지만, 욥기의 인생을 보면서 다소 ‘성공주의, 번영주의’에 찌든 시각으로 봐 온 한국교회의 강단의 문제점이 분명히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주목하고자 하는 구절이 욥기 42:10이다.
“①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②여호와께서 욥이 곤경을 돌이키시고
③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여기에 보면, 욥의 반전의 포인트가 숨어있다. 욥은 고통의 극점에 서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대면하였다. 그리고서 자신의 상처입어 만신창이가 된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말의 드릴과 언어의 송곳으로 후벼 파낸 친구같지 않는 친구(3+1)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용서가 포함된 기도이다. 기도는 입만 벌리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입술까지 차 올라가서 혀끝에서 나오는 용서의 기운이 언어로 터져 나와야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신, 하나님은 어설픈 신이 아니시다. 대충 복채 받고 한쪽 눈을 슬쩍 감고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일처리하시는 주술사나 상사가 아니시다. 사람의 진심, 진정성이 배여 있지 않은 기도는 받지 않으신다. 욥은 진정성이 있는 기도를 드렸다. 그것은 욥이 하나님을 욥기 말미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 이기호에겐 그 하나님이 불편하겠지만, 그 하나님과의 욥의 대면은 욥을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했다. 그리고서, 자신의 영혼의 가슴을 베어온 친구들을 위해 용서하고 화해하는 기도를 한다. 자, 여기서 욥의 기도는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자신의 처지와 상황과 형편의 개선을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 처지도 완전 딜레마인데,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다니......그런데, 욥의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이웃을 위한 기도’, ‘타인(친구)을 위한 기도’였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인간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기독교의 정신이고 본질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왜 믿고 따르는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버렸고, 온 인류를 위해 목숨을 내놓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따르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내가 불편하고 힘들고 내 앞가림도 하기 힘들지만, 타인을 위해, 이웃을 위해 손을 내밀고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질이고, 욥의 기도의 본질이었다.
그러할 때, 신이신 하나님은 욥의 곤경을 돌보아주었다고 한다. 욥이 자기 기도만 열나게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게 아니라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욥과 함께 만났던 그 친구들조차도 하나님께서 만나주신다. 상처받은 인간인 욥이 다시 ‘상처 입은 치유자’로 나서는 것에 욥기의 핵심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욥기 42:10에서 ①과 ②가 원래 더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대목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고 축복의 내용이 덧붙여진다. 하지만, 과거의 한국교회와 기독교는 마지막에 덧붙여진 배가된 축복, 더 강화된 복덩어리에 포커스를 두었다. 그것은 복음을 왜곡한 것이다.
욥의 회복은 회복의 결과인 축복이 아니다. 욥의 회복의 중심은 바로 ‘용서와 화해’이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 나서는 욥>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다. 축복과 성공은 중요한 본질이 아니다.
한국교회와 기독교에 대해 수많은 세인들이 비판을 한다. 솔직히 한국교회는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덩치를 엄청나게 키웠다. 또한 그 덩치를 불리는데 주력을 했었다. 외부적으로는 덩치가 커졌지만, 실상 내면은 곪아터진 상태에서 세인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돈과 권력과 인기와 명예와 스캔들과 부정직 등...어느 것 하나에도 자유롭지 못한 기독교를 작가 이기호는 이기호대로 삐딱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품에서 보면,
최근직 장로가 아들 최요한 목사에게 교회를 세워 주었다는 것은 교회세습문제를 다루는 듯 하다. 최근직 장로의 간증집회의 허실은 한국교회의 과장된 은혜주의를, 최 장로와 최 목사의 부자관계가 시원하지 못한 채 상처가 해결되지 못한 것은 교회가 부피가 커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가정의 회복,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의 회복이 더 우선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 하다.
소설이 너무 잘 읽혀서 금방 읽었지만, 읽고 난 후 느끼는 불쾌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가 믿는 기독교가 욕을 먹는다는 데서 오늘 불편함의 후유증 같은 것이다. 하지만, 다시한번 돌아보게 된다.
그것은 ‘자기반성, 자기성찰, 자기회개’(Self reflection)에 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오셨을 당시에 비판을 엄청나게 하시면서 회개하라고 하셨다. 예수님도 비판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을 따라 비판해야 하지 않는가! 아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신의 아들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시대와 세대와 세계와 사람들을 비판할 수 있었다. 비판해야만 했다. 당시 종교세계가 너무 타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을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나 밖의 세상과 세계를 비난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을 비난해야 한다. 북한이 ‘자아비판’을 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냉철한 ‘자아비판’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진정한 교회의 회복, 기독교의 회복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자기를 훈련하지 않고 세상을 훈련시키려고 덤벼드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니다. 복음서에 보면 세리는 회당에 들어갔지만,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단지 고개를 쳐박고‘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읊조릴 뿐이었다. 하지만, 바리새인은 고개를 빳빳히 쳐들고 자신의 공적과 업적과 헌금과 헌신의 행위를 나열하면서 기도랍시고 했던 것이다.
진정한 종교의 리더들이라면, 먼저 ‘자기반성’‘셀프리플렉션’이 끊임없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서 진정한 종교의 능력이 발산되어지는 것이다. 비폭력의 영웅 간디가 밤마다 물레질을 하면서 ‘자아비판’, ‘자기반성’이 있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소설가에 비친 한국 기독교,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비친 ‘하나님’, 그리고 직업을 ‘무직’으로 배치하고 인터뷰 대상에 등장시킨 작가 이기호...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신데, 이기호에겐 그냥 '백수'로 비쳐지는 것이다.
너무 흥미롭게 읽었지만, 소설을 읽고 난 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슬퍼지는 것은 가슴에 눌린 답답함과 갑갑함의 무게 때문일까? 소설 읽고 마음이 이렇게 무거울 수가...
*에릭 시걸의 <닥터스>에 보면 의사를 '상처입은 치유자'로 표현한다. 의사들은 수술하는 기계가 아니라 그들도 여전히 상처입을 수 있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그들은 '상처입은 치유자'로 서는 것이다. 폴 투르니에도 '상처입은 치유자'란 말을 사용한 것으로 기억한다.
김탁환 천년습작 리뷰Review 감상/거인들의 글쓰기와 작가정신 (2) | 2021.08.10 |
---|---|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후기 감상/문학이 주는 위로와 상처 (0) | 2021.08.07 |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는가 (0) | 2021.08.02 |
로맹 가리 내 삶의 의미/로맹 가리를 알 수 있는 인터뷰집, 그리고 에밀 아자르와는 이명동인 (2) | 2021.08.01 |
윌리엄 셰익스피어 템페스트tempest/ 그 템페스트를 용납하라/결말은 복수가 아닌 용서와 화해/셰익스피어 말년작품 (2) | 2021.07.24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