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많은 영화들이 원작을 글로 바탕하고 있다. 그 글의 형식이 어떤 형식을 띠고 있든 간에 말이다. 그 중에서도 소설이나 희곡 등을 원작으로 영화화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현실이다. Arthur Miller의 ‘Death Of Salesman'도 그 경우에 해당된다. 희곡이라는 형식이 소설보다 조금은 제한된 틀-이를테면 희곡은 무대(stage)위에서만 공연을 해야한다는 공간적 제약-의 handicap을 가진다. 그러나 희곡을 영화로 다시 실체화할 경우에는 희곡이 가진 단점들을 많이 보완할 수 있다. ’Death of Salesman'도 무대의 공간적 제약을 넘어서 영화로써 우리 앞에 표면화되어졌을 때 영화의 많은 장점들을 잘 살렸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는 미디어, 멀티미디어 시대이다. 글보다는 그림이, 문자(letter) 보다는 이미지(image)가 더 선호되고, 익숙해진 시대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나 또한 Arthur Miller의 작품인 Text를 볼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을 영화를 통해서 만끽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Death Of Salesman의 작품읽기와 영화보기를 경험한 입장에서 전자와 후자의 Focus의 차이를 간단하게 짚어보고자 한다.-본론에선 Death Of Salesman의 책을 ‘작품’이라 명하고, 영화를 ‘영화’라고 칭하겠다.
Death Of Salesman, 이 작품은 주인공 Willy를 통해 현대인의 불안과 소외라는 질병을 다루고 있다. 작품에서는 Willy의 분열되어지는 정신적 고통을 촘촘히 읽어갈 수 있다. 작품에서는 단지 희곡의 제한적인 특성으로 말미암아 조명색과 음악으로 구현되었지만, 영화에서는 단연히 이런 부분의 표현이 특출할 수밖에 없다. 작품에서는 은근하게 드러나는 Willy의 의식 분열이 영화에선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다. 현대인인 Willy Lowman은 자신의 이상적인 모델인 형 Ben과 현실 순응의 직업인인 Charley 사이에서 부적응자의 인물유형,‘미적거리는’-이 인물을 ‘중립적인neutral 존재’라고 보기에도 부적합하다- 아주 불쌍한 현대인의 dilemma를 그려내고 있다. 이것은 Willy의 과거와 현재, 과거 속의 과거 와 같은 복잡한 의식구조 속에서 헤매는 구도를 보여준다. 과거와의 연계로 말미암아 Willy의 의식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줌으로써 영화의 감각적 처리가 돋보인다. 또한 Willy의 restaurant의 화장실에서 보여주는 ‘회상’ 장면은 Willy의 의식처리에 대한 탁월한 묘사이다.
영화를 보면서 아주 깊은 감동을 받으며 눈시울이 붉어진 것은 Willy와 Biff의 마지막의 강렬한 대화장면이다. Biff의 세월 속에 감춰진 깊은 한(恨)이 모두 풀어헤쳐지는 장면이다. Willy는 그러한 장남의 폭탄 세례 같은 이야기들에 어리둥절해 하지만, 결국 아들의 애정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자신의 길-자동차 사고-을 가기로 단언한다. Biff의 깊숙한 상처는 이렇게 해서 Willy의 동감(同感)을 자아낸다. 영화에선 이 대목이 하나의 절정Climax이다.
작품에선 Willy Lowman의 한 개인을 통한 현대인의 증상을 진단하고 있다. 물론 주변인물들도 주인공의 그러한 증상을 부추기고 대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선 다소 Willy Lowman이란 한 개인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Biff Lowman과의 부자(父子)간의 심층적인 갈등을 테마로 하는 것 같다. 시대를 초월한 아버지의 아들에, 그것도 장남에 대한 기대는 과부하 상태인 것 같다. Willy의 Biff에 대한 ‘hopeless hope'-이것은 사무엘 베케트의 ’Waiting For Godot'에서 더 확연히 드러난다. 아마도 그런 분위기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는 지독스러울 정도다. 영화에서의 Focus는 작품과는 이러한 점에서 조금은 대별(大別)된다고 볼 수 있겠다. 지나친 나의 감성적인 영향이 없지 않음을 솔직히 시인한다.
Dustin Hoffman의 시종일관 신경질적이고 좌충우돌적인 신경은 자식인 Biff와의 대화의 풀어헤침 속에서 자신의 도덕적 guilt를 통감하고, 그에 대한 책임 및 Biff에 대한 화려한 미래를 기대하는 빛바랜 파랑새 신드롬에 사로잡힌 채 보험금을 노린 자동차 사고(자살)로 유명을 달리한다.
<Death Of Salesman>은 현대인의 혼돈Chaos을 잘 대변한 작품이다. ‘가장’으로서 느끼는 현대인의 소외estrangement를 무엇보다도 극명하게 잘 드러낸 명작(名作)이다. 이를 영화화한 것 또한 많은 현대인들의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겨주었으리라 믿는다. 희곡만으로도 남아있기엔 너무나도 탁월한 작품이기에 좀 더 보편화를 시도한 영화작업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현대인의 서늘한 현실과 각박한 삶 가운데 조그마한 위로의 파고를 일으켰으리라. 정말 ‘Death Of Salesman’은 ‘Tragedy Of Common man'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저자인 아서 밀러는 마릴린 먼로와 2번째 결혼한 배우자로도 유명하다. 마릴린 먼로와의 결혼을 두고 "지상 최고의 지성과 최고의 육체의 세기적인 융합"이다라는 찬사가 터져나왔다. 마릴린 먼로의 이전 배우자는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스포츠계의 우상, 조 디마지오였다. 두 사람의 결혼은 '세기적인 두 우상간의 결합'이라고 찬사를 보냈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9개월만에 파경을 맞았다. 마찬가지로, 아서밀러와 먼로, 이 두 사람의 결혼생활도 5년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아서 밀러는 세기적인 여배우 먼로와 결혼하는 바람에 이전에도 '좌파'라는 당시의 메카시즘에 의해 정부의 '마녀사냥'에 힘들었는데, 곧 그 블랙리스트에 올라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아서 밀러가 시나리오를 쓰고, 먼로가 연기한 1960년 존 휴스톤 감독의 서부극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에서 스틸 사진을 찍기 위해 매그넘 기자 잉게 모라스가 참여한다. 이 작품 발표이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혼미해져간다. 아서 밀러는 '마릴린 몬로가 아내로 살아주길 원했지만, 그녀는 마릴린 몬로로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갈라선다. 하지만 마릴린 먼로는 아서 밀러와 헤어진 1년 후 이 세상을 떠났다. 자살이라고 발표는 했지만, 벌거벗은 알몸으로 죽은 먼로의 의문사였다. 1962년에 먼로가 죽었는데, 그 해는 아서 밀러가 잉게 모라스와 세번째 결혼을 한 해이기도 하다. 잉게 모라스는 200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는 50년동안 아서 밀러를 찍으면서 해로하면서 살았다.
특히, 두 사람의 딸인 레베카 밀러는 영화 <라스트 모히칸>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결혼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 볼까, 왜? 제가 워낙 좋아하는 배우라서.ㅋ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주연한<라스토모히칸>을 흥미롭게 보았는데, 대학때 미국문학수업시간 때였는나. 이 작품을 쓴 원작가가 쿠퍼였다는. 세상은 모든 게 텍스트, 책 속에서 흘러나와 넘치고 넘친다는...그때는 왜 그걸 잘 몰랐을까? 독서나 좀 제대로 하지. 놀기만 했네! 그래도 후회는 없다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아버지가 영화감독이다. 그리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사귄 여자들은 그를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한다. 다니엘은 일년에 영화를 겨우 한편씩만 출연하는 절제성(?)을 겸비한 배우이다. 물론 지금은 은퇴를 했지만. 그의 휘날리는 머리카락과 대리석같은 마스크가 더욱더 돋보이는 영화-라스트 모히칸 ...하지만 주인공이 주제에 그렇게 어필하지 못하는 면이 보여 석연치 않음이 내 맘에 조금은 거리낌을 남는다... 아주 오래전에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잠시 소개된 이야기중에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대단히 흥미로왔다. 그 이야기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정말 멋진 연예인, 엔터테이너이다. 그런 부류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쉽게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그 세계속에서 무언가라도 갈구하고 연명하기 위해서 '마약'을 하고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연예계가 그렇게 만만한 세계는 아님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그 연예계의 삶을 접고 이탈리아의 '구두 수선공' 로 들어갔다고 한다. 대리석으로 조각한 것 같은 날카롭고 탄탄한 마스크와 몸을 가진 그가 왜 구두수선공이 되었을까? 정말 어울리지 않는 대목이 아닌가? 정확한 년수는 기억이 나질 않는데 한 2년 인가? 그 정도로 구두수선공의 일을 하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년 전에 일어난 미 대테러참사 때에는 '자원 봉사자' 로 섬겼다고 한다. 많은 연예인들은 테러참사를 위해 성금을 내어놓은 자선(?)을 베풀었지만 니엘 데이 루이스는 자신의 헌신적인 몸놀림으로 봉사를 했다고 한다.마치 비폭력영웅 간디가 자신의 모든 운동을 낮에는 주관하고 밤에는 물레질을 했다는 이야기가 겹쳐진다. 단순한 노동의 물레질을 하면서 그는 얼마나 자신의 운동의 방향과 자신의 조국을 생각하고 마음을 가다듬었을까? 간디에 비할 순 없지만, 다니엘 데이 루이스도 그런 느낌을 가졌다는 것이다. 정말 대단한 인간이다.지극히 높은 곳에서도 어울리고, 지극히 낮은 곳에서 겸손하게 엎드려 섬길 줄 아는 이런 인간다운 인간,...그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였다.근데, 그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아내가 바로 아서 밀러의 딸, 레베카 밀러였다는 것!
그렇게 보면, 아서 밀러의 사위가 바로 '다니엘 데이 루이스'였네!
-작품 이야기는 없고, 이런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만 가득하네요. 그래도 재미 있습니다! <네 멋대로 써라>란 책 제목도 있듯이. 그러고 있네요^^
아서 밀러는 '보통사람들의 비극'tragedy of common man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주었는데, 삶은 평범치 않는 사람들의 비극(세기의 우상 먼로와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죽음)을 그려내기도 했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겠네요.
오늘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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