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고백록>을 엿보면서 톨스토이의 생각과 세계관, 생애를 해석해보면서 '작가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라는 의문을 들었고 그리하여 피날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죽이기>의 에피소드로 마쳐봅니다.
오늘은 언젠가 읽었던 톨스토이의 <고백록>에 대한 리뷰이다. 나는 톨스토이를 아직 읽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문체나 스토리텔링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고백록>이란 자체가 자기의 생각과 사상과 철학을 여과 없이 털어놓는 구토의 장이기 때문에 그의 소설(문학)과는 차이가 분명 있을 것이다.
INDEX
작가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톨스토이와 무라카미 하루키를 언급하며)
1 톨스토이의 생애와 작품의 성공
2 톨스토이의 성공 이후에 찾아온 정신적인 공황과 위기
3 톨스토이의 위기의 50은 Turning Point가 된다
4 톨스토이가 이야기하는 동양의 옛 우화이야기
5 톨스토이의 인생에 대한 4가지 접근
6 톨스토이 인생의 결론
7 톨스토이의 작가적 책임: 그의 변화는 도덕적 관심사와 변혁가로서의 삶으로 이어지다
8 톨스토이의 말년: 러시아 교회에 대한 불만과 교회로부터의 파문
9 대문호 톨스토이의 자발적 가난 이후의 너무나도 쓸쓸한 죽음
10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가의 책임과 그의 작품<기사단장 죽이기>
11 <기사단장 죽이기>에는 일본인의 치부인 '난징대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Epilogue... 작가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톨스토이는 어릴 적부터 러시아 정교회의 기독교 신앙 속에서 세례를 받고 자랐다. 소위 말하자면, 모태신앙인이다. 기독교신앙의 전통과 부유한 백작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또 다른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책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에서는 그가 너무나 가난해서 그의 작품에는 돈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반면에 톨스토이는 다소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의 유복함은
<전쟁과 평화>(1864~1869년, 36세~42세),
<안나 카레리나>(1873~1877년, 45세~50세)
를 발표하면서 남부럽지 않은 경제적인 호화를 누린다. 13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백작가문의 저택과 농장, 그의 작품에서 나오는 엄청난 저작권료는 그에게 명성과 인기와 부와 명예를 안겨다주었다.
모든 것을 다 거머쥔 톨스토이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그래 좋다. 네게는 사마라에 대략 67평방킬로미터나 되는 땅과 300마리의 말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뭐 어쨌다는 것이냐?”나는 몹시 혼란스러워져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그 다음에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26p).
그것은 ‘진리에 대한 탐구’, ‘인생의 죽음 앞에 선 의미’같은 것이었다.
1878년에 <고백록>을 집필하는데, 저자는 그 이전에 <안나 카레리나>를 집필한 후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종교적인 진리탐색의 고민이 <안나 카레리나>탈고 전에 일어나 작품을 빨리 마치고 싶어했기도 했다.
후에 그는 자신의 작품인
<안나 카레리나>를“내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지칭했다.
그는 자신의 그런 작품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탄하고서, <안나 카레리나>를 비롯해서 자기가 1880년대 이전에 쓴 작품들에 대한 저작권을 자신의 아내인 소냐에게 물려주기를 거부하였다(128p).
톨스토이의 나이 50세(1878년)부터 그가 죽을 때 까지(1910년, 82세) 정신적인, 영적인 큰 전환점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에 1857년과 1860년-61년, 몇 차례에 걸쳐 유럽여행을 하면서 교육가로서의 활동도 펼친다. 교육이론, 교육 현장 연구, 교육 잡지를 발행하고 교과서까지 편찬하는 왕성한 활동을 보인다.
1862년에 중산층 소녀인 소냐(Sonya)와 결혼했다. 그는 교육활동도 중단한 채 이 후 15년 동안 정열적인 결혼 생활에 헌신하면서 불후의 명저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리나>를 집필한다. 아내 소냐가 있었기에 대작을 집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명작은 톨스토이가 50세(1878년)가 되기 전에 완성된다. 그리고 50세 이후로 톨스토이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인생의 한 순례자로서 구도자의 길을 탐색한다. 그는 허영심, 이기심, 교만으로 글을 쓰고 돈을 벌었고, 동료 작가들처럼 인류를 가르치기 위해 예술가들은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예술가이자 시인인 나는 내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모르는 가운데 글을 쓰고 가르쳤으며, 그 대가로 돈을 받았습니다. 내게는 진수성찬과 살 집과 여자들이 주어졌고,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으며, 명성이 주어졌습니다. 이런 것들은 내가 가르치고 있는 것들이 아주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었습니다.’(15p)
‘나는 이 사람들과 어울려 친하게 지내면서 새로운 악덕을 얻었는데, 비정상적으로 발전된 나의 교만과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정신 나간 확신이 바로 그 악덕이었습니다.’(17p)
하지만, 그런 예술계에서의 모습은 ‘정신병동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라고 했고, 종교계에서 사제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과 분열을 보며 그의 눈엔‘사기극’으로 비쳤던 것이다.
톨스토이가 이야기하는 유명한 동양의 옛 우화가 있다.
들판에서 맹수에게 습격을 받은 나그네 이야기이다. 나그네는 맹수에게 도망쳐 마른 우물 속으로 겨우 몸을 숨길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우물바닥에는 거대한 용이 입을 벌리고 삼킬 태세이다. 나그네는 우물 중간의 틈새로 삐져 나온 나뭇가지를 겨우 붙잡고 있다. 올라갈 수도 없고, 내려갈 수 없는 처지이다.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는 팔의 힘이 점점 빠지는 와중에 그가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를 검은 이런...검은쥐와 흰쥐가 갉아먹고 있다. 근데 그런 위태로운 와중에도 그 나뭇가지의 잎사귀들에 꿀이 몇 방울 발려 있는 것을 본다. 나그네는 혀를 내밀어 그 꿀을 핥아 먹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 가운데 나그네의 꿀 몇 방울에 망각의 찰나적인 쾌락에 빠진 인생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톨스토이는 생각한다. 그 위기의 순간에도 꿀맛에 빠져 자신의 죽음(위기)를 망각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인생에 있어‘가족에 대한 사랑과 글쓰기에 대한 사랑’이 두 방울의 꿀이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도 더 이상 자신에게 달콤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오십 나이 직전에 그를 자살 직전까지 몰고 가는 질문은 바로,
“내가 오늘 하고 있는 일이나 내일 하게 될 일의 결국은 무엇인가? 내 인생 전체의 결국은 무엇인가?”(38-39p)이다.
그는 이 절대적인 사안 앞에 수많은 학문과 서적, 쇼펜하우어의 철학이나 소크라테스의 가르침, 솔로몬의 도움을 받고자 노력한다.
톨스토이는 인생에 대해 4가지 접근을 이야기한다.
첫째, 무지이다. 무지라는 것은 삶이 악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물에 빠진 나그네가 이미 용도 보았고, 쥐들도 보았는데, 그런 것을 보지 않은 것처럼 살아간다는 것이다.
둘째, 쾌락주의이다. 삶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용이나 쥐들을 애써 외면하고 현재의 꿀방울을 빨아먹으며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버팀목이다. 톨스토이는 여기서 1천명의 아내를 거느린 솔로몬 왕의 이야길 한다. 천명의 아내를 거느린 왕 하나 때문에 1천명의 남자가 아내 없이 살아야하고, 궁전 하나를 건설하기 위해서 천 명의 사람들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한다는 것, 그리고 오늘 그들을 솔로몬으로 만들어 준 그 우연이 내일은 그들을 솔로몬의 노예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아가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셋째,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힘이란 삶이 악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위적으로 삶을 포기하는 것(자살)을 의미한다. 자신의 뜻이 확고한 이들이 삶을 없애버리는,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행복하다고 믿는 이들이다.
넷째, 약함에서 온다. 삶이 악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알고, 삶으로부터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삶에 매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세 번째 삶을 포기하는 자들의 힘과 용기가 없는 자들의 찌질한(?) 선택이 바로 이 경우이다.
톨스토이의 인생에 대한 이성적인 분석과 진단은, 종국적으로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인 ‘신앙’이란 길로 결론을 내린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유일한 지식이라고 생각해왔던 이성적 지식 외에도, 인류 전체가 소유해 온 또다른 종류의 지식, 곧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류 전체에게 삶의 의미를 알게 해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신앙이라는 지식이었습니다. 신앙은 내게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비이성적인 것이지만, 나는 오직 신앙만이 인류에게 삶의 의문에 대한 대답들을 제공해 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75p)
그는 불교, 회교에 관한 책들을 연구했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기독교를 연구했다. 하지만,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이중적이었고 오히려 가난하고 단순하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기독교신앙의 매력을 발견했다고 한다.
‘나와 같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 전체를 나태와 향락과 삶에 대한 불만족으로 허비하고 있었던 반면에,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은 일생 동안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아갔지만, 부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삶에 비교적 만족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보았습니다....솔로몬과 내게는 삶의 유일한 축복이었던 그 모든 것들을 박탈당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삶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온 나와는 반대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알고, 삶을 허무가 아니라 복으로 여기고서 고통과 역경을 기꺼이 감수하하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나는 그런 식으로 2여년을 살았고, 내 안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는 오랜 세월에 걸쳐 내 안에서 준비되어 왔었고, 그 뿌리가 늘 내 안에 존재해왔던 그런 변화였는데, 그것은 부자이자 지식인들이었던 나와 같은 부류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삶이 단지 싫어진 것만이 아니라 내게서 모든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들, 우리의 토론들, 우리의 학문, 우리의 예술이 내게 새롭게 비쳐졌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단지 자아도취에 지나지 않고, 그런 것들 속에서는 그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땀 흘려 일해서 삶을 생산해내는 무수히 많은 삶이야말로 참되게 살아가는 길로 보였습니다. 그런 삶이 인간의 삶에 대해 부여한 미가 참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85-86p)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오류를 범해 왔던 것은 내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삶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눈이 멀어서 진리를 볼 수 없었던 것은 나의 잘못된 생각 때문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할 수 있는 삶의 모든 조건을 갖춰 놓고서 나의 욕망을 만족시키며 살아온 나의 삶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87p)
그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만을 위해서 일하는 경우에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동물들과 다릅니다.’(90p)
“인생은 하느님을 섬기며 살아야 하며, 결코 자신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148p)
자신만을 위한 개인적인 행복이 인생의 목표가 아닌 것을 깨달은 톨스토이는 예전부터 집중해온 도덕적인 관심사와 더불어 삶의 실천가, 변혁가로서의 힘을 받게 된다. 이젠 뛰어난 대문호가 아닌 기독교의 인도주의의 대변인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가난한 농부들과 같이 생활하며, 엄격한 채식주의자로서, 매일 육체노동을 통해 땀을 흘리면서 모든 욕망을 거부하고, 심지어 자신의 아내와의 관계도 절제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물려받은 백작의 귀족 작위도 버렸다. 이름도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라는 평범한 이름으로 개명한다. 1880년(<고백록>을 집필하고 난 후 2년, 이 1880년 전/후는 톨스토이 인생에 굉장히 중요한 년도가 된다. 그건 바로 자기 작품들의 저작권 문제로 인한 갈등이다) 이후에 쓴 자신의 저작들은 공공 자산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다(톨스토이는 자신의 저작 전부를 가난한 이들을 위해 공동분배하고자 희망했지만,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리하여 1880년 이전의 작품들의 저작권은 부인이 소유하게 된다. 그 수입은 엄청난 것이었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리나>가 거기 있지 않은가!). 가족의 반대가 없었다면 자신의 영지도 그러했을 것이다. 영지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물려주었다. 이런 행동을 하는 지성인의 톨스토이의 모습을 보고 수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고 숭배했다. 이것은 톨스토이의 영향력이었다.
나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톨스토이가 50세 전후로 한 이 변화가 없었다면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리나>보다 더 완벽하고 더 대단한 작품들이 나왔을 수도 있겠다 싶다. 인간의 사상은 나이가 들면서 더 원숙해지는 것이 아닌가! 인간적인 매력이 탁월한 작품들 말이다. 솔직히 <전쟁...>, <안나...>보다 더 뛰어난 작품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톨스토이에게 중요한 것은 ‘인생의 본질에 대한 사안이었고, 그 사안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그는 즉각적으로 액션을 취했다’는 사실이다. 젊은 시절 교육가로 활동했던 이력이 있던 그였다. 50세 이후로 그는 이제 구제활동과 일반대중을 위한 도덕적인 글들을 많이 썼다.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인 구조 전체를 설득력있게 비판함을 통해 압제받는 이들을 앞장서서 옹호했다.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 톨스토이가 이런 저항성을 보인다는 것은 부담스런 노릇이었다. 그의 영향력은 엄청나서, 정부가 그를 침묵시키기 위해 감옥에 투옥하는 일을 감히 하지 못할 정도였다. 오히려 정부는 톨스토이를 탄압하는 대신 교묘히 그의 추종자들을 탄압해서 그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방침을 세우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신앙고백을 가진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러시아 교회에 대한 불만이 국가만큼이나 많았다. 1901년 국가의 수족이었던 교회는 톨스토이를 파문한다. 톨스토이는 교회의 부도덕성과 교회의 권위를 일체 거부하는 '기독교적 무정부주의'의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평화주의자로 살았는데, 그것이 1905년 러시아의 ‘피의 일요일'의 유혈사태로 인해 군중의 비난과 분노를 한 몸에 받는다. 이를테면 톨스토이의 비폭력적 노선의 무력함을 군중들은 느끼고, 많은 이들이 폭력적 노선으로 갈아탔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느 시대의 지도자를 막론하고 효과적으로 정부와 교회의 자본주의적 악들을 드러내어 부지불식간에 러시아의 미래로 가는 길을 닦은 인물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톨스토이였다.
레닌은 1905년 1차 혁명운동의 실패의 책임을 톨스토이에게 돌렸다.
“악에 대한 톨스토이의 무저항주의는 제1차 혁명운동의 실패의 가장 중대한 원인이었다.”(133p)
하지만, 레닌은 러시아 혁명이 톨스토이의 글들에 많은 빚을 졌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레닌조차도 이렇게 피력했다는 것은 톨스토이가 명성과 인가가 넘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라 사회전반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지성인, 개혁자였음을 알 수 있다.
‘톨스토이가 <고백론>에서 도달한 결론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개인적인 삶은, 진실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지 하나의 재앙일 수 밖에 없고, 그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자신의 삶을 “사람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의 삶, 즉 우리의 개인적인 삶이 끝나도 영속적으로 이어지고, 우리 자신의 외부의 원천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며, 모든 사람들 안에 존재하는 저 이성의 빛을 따라 사는 삶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이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고서 우리 자신을 “사람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삶은 축복인 반면에,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에 의해서 모든 것이 허망하게 무로 돌아가 버릴 개인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삶은 재앙이다.’(139p)
1878년 이후의 이런 톨스토이의 변화는 작품활동에서도 드러난다. 전직 소설가로서 보다는 논문과 소책자, 교훈적인 희곡, 단편소설을 통해 정부와 교회와 재물들을 비판했다. 그는 사랑과 믿음을 몸소 실천을 통해 신앙을 보여주는 철저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개혁자, 사상가였던 그이지만, 그의 죽음은 너무나 쓸쓸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누린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가족들이 누리는 안일한 삶과 사고방식이 갈등을 빚었다. 그는 스스로 선택한 금욕주의, 수도자적인 삶을 항상 추구하였지만, 자신의 가정과 환경이 자신이 고백한 신앙고백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침내 가정불화는 극에 달하고 톨스토이는 주치의와 막내 딸 알렉산드라만을 대동한 채 한밤중에 은밀히 가정을 떠난다. 그로부터 며칠 후 1910년 11월 20일 랴잔 지방 아스타포보의 외곽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죽는다.
나는 톨스토이를 정리하면서, 문득 성경 구절이 하나 떠오른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장 34절)
톨스토이는 최고의 가문, 최고의 명성, 최고의 인기, 최고의 부를 자랑했다고 할수 있는 인생의 정점에서 스스로 자발적 가난을 취사선택한다. 그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기득권을 벗어던지지 못한 것이 늘 죄책감과 불편함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1878년 <고백록>이후의 행보와 그의 마지막 죽음의 뒤안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는 작가였고, 그 작가적인 책임이 '자기 십자가'가 아니었을까? 그는 진정성있는 신앙고백이후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시대와 세대의 비극을 안고 살아갔던 위대한 삶의 지성인이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한 인간, 한 작가로서의 책임이 평생의 십자가였다고 보고 싶다.
자신의 삶과 철학을 몸소 실천했던 톨스토이는 진정한 대문호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작가의 책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본다.
톨스토이는 작가의 책임의 관점에서 보다 구도자(순례자)의 관점에서 신앙을 추구했고 그걸 행동으로 실천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작가이기를 거부한다고 해도 그는 작가이다. 그가 쓴 글에 대한 책임을 졌던 것이다. 작가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작가와 텍스트는 분리될 수 있는가!
나는 예전에 출판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죽이기>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 책이 나올 때 시끄러웠다.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 국내에서 이 책의 발간을 두고 말이 많았다. 왜?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작품에 일본인도 책임여부 때문에 논란이 많아 언급을 꺼리는 '난징대학살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을 보면,
멘시키가 말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중국의 전쟁이 본격화되었죠.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중요한 사건이 그해 12월에 일어납니다.”
그해 12월에 뭐가 있었지?
“난징 입성.”내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른반 난징학살사건입니다. 일본군이 격렬한 전투 끝에 난징 시내를 점령하고 대량 살인을 자행했습니다. 전투중의 살인도 있고, 전투가 끝난 뒤의 살인도 있었죠. 포로를 관리할 여유가 없었던 일본군이 항복한 군인과 시민 대부분을 살해해버린 것입니다. 정확히 몇 명이 희생되었는지 세부적인 수치는 역사학자들 사이에도 이론이 있지만, 어쨌든 엄청난 수의 시민이 전투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중국인 사망자 수가 사십만 명이라는 설도 있고, 십만 명이라는 설도 있지요. 하지만 사십만 명과 십만 명의 차이는 과연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기사단장죽이기2권, 88p).
이 책이 나올 당시 나는 독서를 거의 손에 놓고 있었다. 그러기에 당연히 그렇게 좋아라했던 하루키의 책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단숨에 그 책을 구입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의 극우파들은 하루키가 ‘난징대학살’을 일본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리고서 등장인물인 아마다 쓰구히로는 군대에서 제대해 복학하지만 ‘다락방에서 손목을 그었다?’ 면도칼로 손목을 긋고 죽은 것이다. 소설에서 나오는 이 대목이 미칠 파장으로 인해 일본의 우익들은 하루키를 ‘매국노’라고 욕하고 비난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가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쓸 수 있느냐고 비판한다. 그런데, 하루키의 대답이 일품이었다! 나는 이 대답 때문에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구입했고, 단숨에 읽었다.
‘나는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가 아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대표한다. 나는 나 자신을 대표한다.’(의역했음)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격이다. 소설가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한다."
뭐 이런 종류의 대답이었다. 우아! 난 그 말에 충격 먹었다. 인간적인 매력이 뿜어져나왔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발언이다. 그가 너무나 가난하였다면, 과연 이런 자유가 주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하지만, 하루키의 뚝심은 칭찬받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매국노'라는 편견의 딱지를 씌울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면서 난징학살을 자신의 작품에 다룬 것이다. 일본인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서처럼 '국화'와 '칼'이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치부와 실수와 잘못을 고백하고 드러내어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과정을 회피한다. 오히려 스스로 활복을 함으로 사무라이의 고결한(?) 정신을 이어가고자 한다. 그런 사무라이에게 치부가 드러났으니 극우단체들이 더 분노하였을 듯 한데...그런 와중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가의 책임, 작가적 책임에 대해 감탄했다.
"작가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하루키는 지성인으로 알려야 할 책임, 소설가의 책임을 감당했다고 본다." 작가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톨스토이는 실천하는 구도자의 책임, 대문호의 책임을 잘 감당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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