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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주커먼의 종교 없는 삶/무종교인과 무종교성을 위한 변론서/다시 변증하다

탐독: 탐서/Book Review

by 카알KaRL21 2021. 7. 21. 12:51

본문

 

 

"관계 없는 삶이 종교 없는 삶을 낳았다!"

 



Index

prologue...나는 기독교인이다
  
-한 권의 책이 주는 영향력
-이 책은 변론서이다
-교리는 예수님이 아니다
-인간은 예수님이 아니다
-기독교가 시스템이 되면서 생기는 문제, 한계
-누가 나의 이웃인가?
-종교를 떠나는 사람들
-인생의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왜 하나님은 세상에 악을 허용하셨는가?
-분노하는 무종교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책임
-기독교의 중심은‘관계’이다
-예수의 매력

Epilogue...





 

 

 

 

나는 기독교인이다

  한 평생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서 자랐고, 그것이 나에게 엄청난 큰 혜택이고 선물이고 특권임을 하루하루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것은 소위 기독교적인 용어로 ‘은혜’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인이기에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이 책을 나름대로 생각한 것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한 권의 책이 주는 영향력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다빈치코드』가 히트를 쳤다. 그 책을 읽고 어떤 한 여인이 스타벅스 커피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직 신앙이 약한 그녀는 『다빈치코드』의 소설을 읽고 자신의 신앙을 잃어버렸다. ‘나의 신앙을 돌려 달라’면서 눈물 어린 호소를 하는 것을 기독교작가 행크 헤네그라프가 쓰고 있다. 다빈치코드의 허구성을 알고자 하는 분은 『다빈치코드 진실인가? 허구인가?』란 책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한 권의 책, 하나의 텍스트는 한 사람의 인생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영혼을 위해 책도 선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린 아이가 갑자기 젖을 먹다가 이유식도 건너 뛴 채 단단한 음식을 섭취 할 수 없는 것이다. 잘못하면 탈이 나고 생명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다.

 

 

 

 

이 paper는 판미동에서 리뷰를 쓰는 조건으로 책을 무료로 받아 읽고 쓴 것입니다. 알라딘에서 '이 달의 리뷰'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변론서이다

교회의 역사나 신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교리신학(도그마dogma)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후로 그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목격한 제자들이 증인이 되어 말씀이 세대와 세대 간에 전파되었고 점차 파급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어떤 체제나 시스템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 그 자체였지, 어떤 텍스트나 교리에 묶이지 않았다. 교리, 즉 도그마가 생겨난 것은 이단세력들이 등장하면서 기독교는 이단에 대항하기 위해 교리가 체계화되어진다. 이를테면,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부인한다던지, 인성(人性)을 부인한다던지,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세력들이 등장했을 때, 그때마다 신학자들이 모여 회의를 거쳐 교리, 도그마가 만들어진 것이다. 일종의 방어전에서 얻은 소득이 도그마이다. 여기서 기독교를 변증하는 ‘변증학apologetics’이란 신학학문으로 남겨진다.

 

 

 

 

이 책은 <무종교인과 무종교성을 위한 변론서>(385p)이다. ‘변론서’라는 말은 그만큼 저자가 종교사회에서 무종교인이라는 이유로, 무종교성을 가진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공격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거기에 논리적으로 변증, 변론한 것인 셈이다.

 

 

 

 

교리는 예수님이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교리dogma는 예수님이 아니다. 교리는 말씀을 근거로 하여 체계화시킨 이론이고 체계이고 시스템이지 예수님은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교이고 그리스도교이다. 모든 것에 예수의 생명력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생명력이란 것을 삶의 정황(sitz im leben)을 해석하는 방향과 적용성은 굉장히 디테일한 세밀함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잘못 적용하면 사람의 생명, 영혼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예수님이 아니다

기독교가 소수의 무리였을 때와는 달리 국교가 되기도 하고 기독교 사회가 형성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체계화되고 권력의 힘을 얻게 된다. 그러면서 문제가 파생된다. 예수가 시스템이 되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종교 없는 삶』의 저자 필 주커먼은 유대인이다. 그는 스스로 ‘무종교적인 인본주의자’(354p)라 자처한다. 그는 미국사회에서 무종교인이라는,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많은 핍박과 냉대를 당했다. 미국은 아직 기독교사회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기원 자체가 구교인 카톨릭의 핍박과 반대를 피해해 종교를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신교도 세력이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지금도 대통령 선서 시에는 성경책을 손에 얹고 맹세를 한다. 공개적인 그리스도교의 냄새를 풍긴다. 그리고 50개가 넘는 주마다 각각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그중에는 짙은 종교적인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신앙을 갖지 않는 무신론자들에게는 굉장히 힘든 생활이 예견된다. 자, 여기서 종교가 시스템이 되고 권력화가 되면 문제가 발발한다. 왜냐하면 종교력力을 등에 업고 움직이는 사람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한다. 이 말은 인간에게 그 어떤 선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중세시대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성건재설’을 천명했다. 하지만, 그토록 존경받던 신학자도 인간의 모든 영역은 다 타락했지만, ‘이성’만은 건강하고 건재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후대의 신학사상에서 오류로 지적된다. 인간은 예수님이 아닌 이상 성경과 신학에서 말하는 ‘죄’에서 자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시대는 인간의 이성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노래하지만, 그 이성도 ‘죄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컴퓨터로 말하자면 언제나 버그가 생길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다는 이성건재설을 주장한 토마스 아퀴나스(사진출처: 위키백과)

 

 

칼 마르크스가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과 시대상황 가운데서도 그가 『자본론』을 집필하면서(물론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사후에 2.3권을 이어 집필했지만) 억압받는 프롤레타리아, 민중의 입장을 반영하여 공산주의로 나아가길 원했다.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그렇게 절규를 한 측면은 인간적으로 볼 때 경이적이다. 그런 경이적인 삶이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칼 마르크스가 보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의 그로테스크한 티라노사우르스적인 능력도 능력이지만, 더 간과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인간’이란 티라노사우르스, 괴물이다.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집행하는 것도 인간이 집행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에 권력의 힘이 어깨에 들어가면 버그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진 것은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성경에선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었’(에베소서 2:1)다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적인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시스템이 되면서 생기는 문제, 한계

인간의 이러한 부패한 본질이 권력과 시스템과 조우되면 거기에서 후유증이 발생하게 된다.

 

 

 

①경직된 기독교, 경직된 도그마

저자는 토냐의 가정이야기를 예로 든다. 이 토냐 가정은 기독교국가, 시스템에서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 무신론자 가정인 그들이 기독교 냄새가 농후한 마을에서 그의 자녀들이 기독교학교를 다녔다. 병원에서 위독한 외할머니가 오늘 내일 임종하실 것 같아 토냐는 자신의 자녀들이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학교에서 조퇴를 허락받고자 했다. 하지만, 학교는 ‘의사의 서명이 들어간 증서’가 필요하다면서 아이들의 조퇴를 허락하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조만간 돌아가시는데, 그런 서류가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손자, 손녀는 조퇴를 하지 못했고, 결국 외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외할머니가 곧 돌아가신 것이다. 결국 토냐는 자녀들은 학교를 그만두고 홈스쿨링을 시작했다고 한다. 토냐의 가정 다시 기독교에 들어온다는 것은 굉장하고 특별한 기적이 없이는 평생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마음은 실족한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사람의 마음에 무거운 상처를 입히며 실족하게 하는 일에 대해 경고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태복음 18:6)

 

 

이 말씀은 여기뿐 아니라,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즉 복음서 네 군데에 모두 기록되어져 있다.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기에 ‘실족하게 하는 일’에 대해 경계하셨다.

 

 

 

기독교는 경직되면 문제가 생긴다. 경직된 기독교, 도그마가 된 종교는 사람을 죽인다. 언젠가 CF 문구로 등장했던 것처럼 ‘사랑은 움직이는거야’라는 말은 사랑이란 것이 대상에서 또 다른 대상으로 이동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사랑의 방식이 언제나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순간순간 변하는 마음의 갈피를 체크하고 거기에 맞게 부응하는 것이 건강한 것이지, 매번 똑같은 방식과 로직한 리액션을 하는 것은 사달이 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그 사람의 거주하는 상황과 환경도 다변적이고 복합적인데 어떻게 똑같은 룰과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 학교 측에서 ‘경건한 융통성’을 발휘했다면 토냐의 자녀들이 외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는 엄숙한 시간을 가졌을텐데 말이다.

 

저자는 사회학자이다. 다양한 사람들은 인터뷰하면서 종교의 허점을 비판하고 있다.

 

 

 

②편협한 기독교의 프레임

저자는 스콧 렌프로의 이야기를 한다. 이라크 파병시에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자신의 동료 병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돌아온 후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굉장히 치열할 때, 특별히 그는 자신의 부대에 사상자가 크게 생기지 않은 이유에 대해 군목이 하는 말이 가관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우리 부대의 사상자가 최소화되었다’는 말...하지만, 스콧은 다른 부대원들 중 자신의 친구 4명이 죽었다. 자기 친구들이 4명이 죽어갔는데, 군목이 하는 말은 점입가경인 셈이다.

 

 

영국이 낳은 위대한 신학자, 존 스토트는 이런 말을 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마치 둥글게 둥글게 원을 그리고 앉아 서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원을 그린 무리들 등 뒤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사람들을 간과한 채, 내부적으로 쳐다본다는 말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편협한 프레임이다. 군목의 프레임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기독교는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체화하는 종교이다. 하지만, 그 사랑이 교리가 되면 화석화되고 시들어가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③의무보다는 진정한 사랑이 필요하다

저자는 루피타란 무신론 딸의 이야기를 한다. 루피타는 기독교 가정에 입양된 딸이다. 교회를 다녔지만, 대학에 들어가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아버지나 배다른 형제, 자매는 기독교인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우울증을 겪으면서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후에는 암 진단을 받게 된다. 몇 년 동안 병원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정작 무신론자인 루피타가 먼 길에서 로스쿨을 다니면서도 병간호를 도맡아했다. 정작 자신보다 가까이에 있는 그녀의 형제들은 ‘교회 갈 시간은 꼬박꼬박 챙기면서도 아버지의 병간호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루피타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세심하게 케어하면서 담담하게 대면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형제들은 부친의 사후 더 망연자실했다면서 루피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더 어안이 없었다고 한다.....참 가슴이 아팠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성경에 보면, <강도만난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강도 만난 이웃이 피를 흘리면서 방치된 채 있을 때, 1번째 등장인물 제사장이나, 2번째 등장인물 레위인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고통 받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피해버린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오히려 그 강도 만난 이웃을 응급처치하고 여관까지 가서 치료비용을 일체 지불한다. 후에 다시 돌아 올 때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참고로, 사마리아인은 당시 이스라엘인들이 역사적으로 경멸하는 혼혈민족이다. 피가, 혈통부터 더럽기 때문에 경멸하고 조롱하고 무시했던 민족이 바로 사마리아 민족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민족적인, 혈연적인 편견을 뛰어넘어 진정한 사랑을 베푼, 진정한 이웃이 누구이냐? 라고 묻는다. 답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사진출처: 나무위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루피타의 일화를 보면서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대목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직되고 편협하고 연면의 사랑 없는 모습 때문에 그들이 교회를, 종교를, 기독교를 떠났기 때문이다. 의무와 책무에 휘둘린 기독교가 진정한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증발되어져 버린 것이다.

 

 

 

 

종교를 떠나는 사람들

사회학자이기에 수많은 통계와 자료를 분석하면서 시대가 무종교를 선택하고, 시대의 세태가 ‘무종교성’을 드러낸다 것을 보여준다. 특히 미국사회에서 무종교인, 무신론자가 왜 그렇게 많이 생겨나는가, 무종교성이 왜 시대의 특징이 되는가에 대해 몇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 종교와 보수정치세력의 합작이 이유이다.

 

둘째,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의 소아성애 스캔들과 정신질환, 그리고 카톨릭교회의 부정직하고 비합리적인 대처가 이유이다.

셋째, 여성임금노동력의 현저한 증가가 이유이다. 

과거 가사노동이 전부였던 전업주부들이 종교인의 막대한 비중을 차지했지만, 여성들의 사회진출은 종교의 불필요성을 더 느끼게 했다는 대목이다.

 

 

아무튼, 종교를 떠나는 인구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살펴본 기독교의 경직된 모습, 언행불일치와 모순과 부조리로 인해 더 무종교성은 가속화되는 듯하다.

 

‘종교가 없이도, 신이 없이도,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없어야, 신이 없어야 잘 산다는 것’(13p)

 

 

이런 메시지를 이 책은 던지고 있다. 마치 이 책의 저자는 <무신론자 전도사>의 포교행위의 느낌을 준다. 미국이란 기독교국가의 나라에서 무신론자가 살아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녀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며, 자녀들에게 물려준 정신적인 유산은 어떤 것이며, 죽음에 대한 태도는 어떠해야 하고, 인생에 고난에 닥쳐왔을 때 종교 없이도 충분히 극복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무종교성은 ‘정말로 개인주의의 표본과 같은 것’(219p)이다.

 

 

인본주의는“인간 삶의 최고 목표는 더욱 인간적인 사회를 창조하는 데 있다.”(224p)고 저자는 천명한다. 그리고서 ‘21세기의 종교는 명상이다’(386p)고 이야기한다. 무종교인의 죽음의 태도에 대한 부분에서 저자는 ‘끈기는 실제적인 문제 해결과 개인적인 용기, 그리고 한결같은 자기신뢰와 같은 무종교인들의 미덕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269p)고 역설한다.

 

 

저자는 무종교인, 무신론자, 불가지론자에게 중요한 것은 ‘유대(紐帶)’라는 것을 강조한다. 종교사회에서 무종교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종교 없는 자들끼리의 ‘연대와 유대’membership을 강조한다. 종교인이라면 인생의 허전함과 허무함을 ‘神’을 찾는 과정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저자는 무신론이 현대에 대두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조상들에게서 발견된 굉장히 고급진(?) 인생철학임을 역설해주고 있다.

 

 

10대 시절에 소중한 친구 미셸이 자동차가 추락하여 바다에서 익사된 채 발견된 사건에 저자는 충격을 받았다. 그 때 심리학자, 안나의 어머니가 이 죽음에 대하여

 

“정말 슬프고도 슬픈 일이지. 지금은 아파하고 애도해야 할 시간이야. 그래도 바람이지만, 미셸이 그랬던 것처럼 너희들도 활기차고 자유롭게 살아. 그러면 미첼도 어느 의미에서는 계속 살게 될거야. 미셸이 너희들에게 미친 지속적인 영향과 미셸에 대한 너희들의 기억 속에서 말이야.”(298p)

 

이 조언이 저자에게는 종교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죽음에 접근한 최초의 개인적인 경험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인생의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는 창조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과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인생사에 관여하시고 계시며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이토록 억울하고 고통스런 상황과 아픔이 편재하는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혹함이나 전쟁의 비참함, 천재나 인재로 인한 수많은 이들의 비극적인 광경 가운데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라고 질문한다. 신(神)이 살아계시다면 어찌 이토록 부조리하고 모순되는 현상들이 가득하느냐? 그러면서 사람들은 ‘지적 허무주의’로 결론을 내린다.

 

누군가 기독교인에게 “내가 당신의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나는 먼저 그 하나님이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대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이해는 하지만, 이러한 처사는 세상의 악이란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포기하는 발언자로 선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세상에 악을 허용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시는가?』란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1946년 가을에 빌더 슈미트는 퀼린 대성당을 방문했을 때 엄청난 실망을 느꼈다. 왜냐하면 2차 세계대전 중에 퀼른은 서유럽의 다른 도시들보다 더 심한 비행기 폭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창문은 떨어져 나갔고, 벽은 부서졌고, 목재는 산산조각이 났으며 거대한 돌덩이들이 사방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건물은 군데군데 구멍투성이였다. 우린 퀼린 대성당의 폐허가 된 모습을 보면서 그 건물을 만든 건축가가 처음부터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파괴된 건축물을 보면서 오히려 관찰자는 처음 설계되고 건축되었을 당시의 퀼린의 아름답고 완전한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건축가의 건축정신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후대의 사람들 중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던 하나님, 세상의 건축가인 신(神)이 왜 자신의 작품인 퀼린 대성당이 폭격당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는가? 라고 질문할 수 있겠는가? 이 퀼린 대성당의 비유가 적절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겠으나 그렇게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는 제공해주는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후 인간을 로봇이 아니라 자율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이야기이다. 소위 말하자면,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이다. ‘선을 택할 수도 있고, 악을 택할 수도 있는 완전한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 말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하나님을 선택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고도의 탁월한 독재자의 공포정치가였다면, 무조건적인 복종과 굴복을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사랑하는 연인끼리 서로를 가장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서로를 완전히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절대적인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을 할 수도 있지만, 또한 사랑받지 못할 리스크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걸 우리에게 과분하게 주신 것이다.

 

 

 왜? 로봇으로 우리를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발성’의 토대 위에 꽃이 핀다. 여기에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절대적인 존중과 배려가 숨겨져 있다. 하지만, 인간은 창조주의 파격적인 모험과 그의 존중과 선택에 찬물을 끼얹게 된다. 우려했던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그리고 니체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신(神)은 죽었다God is dead’는 말을 몸소 살아가는 사람들이 팽배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인간 안에 존재하는 티라노사우르스적인 괴물로 인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참사와 비극와 혼돈과 슬픔이 이 땅에 방출되어진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그에 따른 책임이 동반된다. 그 자유의지가 악으로 치달을 때 당사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나의 이러한 발언이 용납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이 논리적인 접근이다. 한 시대를 살다가 떠나는 유한한 인간의 지성으로 창조주의 모든 것을 가늠한다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인인 나에게는 불감당한 task이다. 나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입장이다. 정말 인간적으로 볼 때 헛되게 목숨을 달리하거나, 평생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구가 되어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불행을 어떻게 내가 다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종교개혁자 루터가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에라스무스, 자네와 나와의 차이는, 자네는 성경 위에 앉아서 그것을 판단하고 있는 반면, 나는 성경 아래에 앉아서 그것이 나를 판단하게 한다는 점에 있네!”

 

나는 인문학을 좋아한다. 하지만 인문학은 ‘명답이긴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나는 루터처럼 ‘성경 아래에 앉아서 시대를 보고자 하는 기독교인’이길 바랄 뿐이다.

 

 

 

칼 세이건은 우주의 은하계에는 4,000억 개의 별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 수많은 별들 가운데 우리는 지구에서 살고 있다. 하나의 점과 같은 행성에서 옥신각신하면서 산다.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닌데,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 물론, 『종교 없는 삶』의 저자, 필 쥬커빌은 영원히 살지 못하기 때문에 더 경이롭게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무종교적 인문주의자이다. 우리가 역사이래로 발견한 모든 과학의 결과물이란 창window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본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시대의 후예들이기 때문에 시대의 문화와 트렌드로 우리를 본다. 이제까지 축적된 것을 통해 인간을 본다. 

 

 

 

성경에서 제일 오래 장수한 인물은 영화 『노아』에 등장했던 인물 므두셀라이고, 969세를 살았다. 1000년을 못 살았다. 우리는? 유발 노아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에 의하면 150년을 살 수 있을 전망을 내다본다. 아니 그 이상도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그리고서 불멸을 꿈꾼다. <호모 데우스>의 꿈을.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영역들, 그리고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하는 성경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지만, 존 스토트 박사는 이에 대해 ‘지적 보류delay’란 의견을 내놓는다. 루터처럼 ‘성경’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겐 시대와 상황과 사건과 삶이 자신을 속일지라도 믿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보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한한 한 세대의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무슨 문제가 생길때마다 믿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면 거기에 진정한 신앙이 세워질 수 있을까? 결국 앞에서 이야기한 '루터의 전제premise'-성경 아래 앉아있는 삶-가 중요한 것이다.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에 답하다』는 이 책은 원래 IVP에서 출간한 『자유주의자와의 대화』(3권, 여수룬, 1991)의 개정판이다. 자유주의자(데이비드 에드워즈)와 복음주의자(존 스토트)의 서로간의 질문과 대답을 수록하고 있다. 성경적인 통찰, 철학적, 신학적 해박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단한 책이다.  

 

 

 

분노하는 무종교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책임

교회를 떠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내가 할 말이 없다. 앞에서 다룬 ‘경직되고, 편협하고, 연민의 사랑 없는 종교’의 모습 때문에 상처받아, 실족하게 되어 떠나버린 이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하단 말씀을 드릴 뿐이다. 교회가 누군가의 표현처럼 ‘막장 짓’을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험악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기독교에 대해 세상은 분노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분노사회이다. 기독교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기독교인으로서 더 없이 분명하게 인지해야 할 대목은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한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이다. 세상에 지탄을 받고 개독교라는 말까지 듣게 된 현실에 대해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의 모습, 또 한편에서는 우리의 책임을 물으실 정의의 심판자 하나님,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의 중심은‘관계’이다

필 주커먼의 책을 통해 무종교인들의 삶이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을 띄는지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혹여나 이 책을 읽고 무종교인의 삶에 더 박차를 가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믿는 기독교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진다.

 

기독교는 ‘관계’다. 기독교는 종교도 아니다. 교리도, 이론도, 철학도, 시스템도, 프로그램도 아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개인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무종교인 저자가 이야기하는 인간적인 ‘유대’와는 대별되는 관계이다. 그 관계를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안타깝기만 하다.

 

 

기독교가 ‘관계의 종교’로 삶을 살았다면 이렇게까지 엇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종교 없이도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말하는 그 도덕의 기준은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자율적이면서도 도덕적인 잣대는 다 다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도덕성이 실추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면서 나는 회개할 뿐이다. 나 한 사람, 개인이 이런다고 해서 사회가 무엇이 달라질까? 아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사역을 하실 때 12명의 제자를 불렀다.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해놓고선 작전수행자들이 고작 12명이라고(물론 그 중에 1명인 가룟 유다는 탈락인 셈이다). 하지만, 그 팔레스타인의 한구석에서 시작된 복음은 12명을 통해(후에, 가룟 유다의 자리는 맛디아로 대체된다)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그들의 생명력은 ‘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의 숫자는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숫자는 시스템이나 체제에서 힘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예수님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던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고자 한 의도나 계획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정치적 메시야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정치적인 변혁, 쿠데타, 체제와 시스템의 붕괴가 아니었다. 예수의 변혁의 작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힘’으로 인한 인류의 지각변동이었다. '관계의 힘'을 기초한 한 개인의 울림, 개인의 변혁이 예수님의 계획이었다.

 

 

예수의 진정한 파워는 ‘관계’에서 나온다. 그가 모은 제자들은 이스라엘이란 조약한 땅덩어리에서 편협하게 살아갔던 한 사람, 한 사람이었지만, 그들을 통해 기독교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권력화되고, 상업주의화되고 체제화가 될 때 ‘관계의 힘’은 사라지고 돈의 힘과 세상의 파워를 의지하게 된다. 거기서 교회의 쇠퇴가 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힘을 기초한 한 사람’이다.

 

 

문득 운전을 하다가 도로가에 부착된 현수막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교통캠페인 문구였다.

 

“속도를 줄이면 사람이 보입니다.”

 

그 문구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기독교가 너무 속도를 내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잃고 있다. 사람들이 상처받아 떠나고 있다. 속도를 줄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일도 많고 프로그램도 많다. 그런 수많은 과정을 통해 보이는 효과는 금방 나타났지만 속은 곪아터진 것이 지금 드러난 실체이다.

 

 

나는 저자의 글을 처음에 읽으면서 굉장히 분노했다. 저자가 취사선택한 통계와 논리와 글들로 인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점점 읽어가면서 교회를 떠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이것은 총체적인 기독교의 위기라 생각하니 기분이 씁쓸했다. 관계없는 삶이 종교없는 삶을 낳고 말았다!

 

 

 

 

 

예수의 매력

중세 교회가 타락하고 퇴락의 어두운 길에 들어섰을 때 기독교는 이미 생명력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역교회(local church)가 빛을 잃어갈 때 창조주 하나님은 은밀하고 보이지도 않고 표 나지도 않는 수도원(para church)을 통해 생명력을 움직이게 하셨다. 지금도 교회의 에너지가 거덜 나듯 보이고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기독교는 역사이래로 최고의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는 망하더라고 예수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예수는 하나님의 매력이고, 인류의 매력이고, 역사의 매력이다. 그 매력의 젖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이 글을 읽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란다. '관계의 힘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면.... 희망이 있는 것이다.  

 

 

 

 

 

Epilogue...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전도서 12장 1절)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호수아 24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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