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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비비어의 광야에서

탐독: 탐서/Book Review

by 카알KaRL21 2021. 6. 1.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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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비비어의 광야에서 책이다

  

0 ‘광야’를 아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광야’라는 단어는 너무나 익숙한 단어이지만, 신앙이 없는 비그리스도인이라면 ‘광야’라는 단어는 익숙치 않을 것이다. T.S.엘리엇의 유명한 시 <황무지>의 그 황무지와 같은 현실이 광야라고 볼 수 있겠다(이 계기를 통해 나는 또 대학 시절에 공부했던 영미시 책을 들추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말 그대로 들추어보기만 했다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콤멘트가 앞에 적혀 있는데, 미국의 플로리다에 북상했던 허리케인으로 인해 삶의 터전에 풍지박산이 났을 때, 이 책을 만나 너무 감사했다는 내용도 있다. 광야라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가 만나게 될 딜레마이고, 미궁이고, 늪과도 같은 고통의 터널, 절망의 덩어리라고 볼 수 있겠다.

 

 

 

 

 

1

하지만, 단말마적인 위로가 되는 것은 누구나가 다 ‘광야’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광야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쨍하고 해 뜰날이 있는 반면에, 고개를 떨구고 비통해하면서 맨홀 뚜껑 아래로 쳐박히는 날들이 또 점철되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하지만, 그게 인생이기에.

 

 

‘용기를 내라.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작자 존 비비어의 아내, 리사 비비어의 말이다.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겠다. 광야에 대한 존 비비어의 이야기를 한 번 들추어볼까 한다. 이 책은 ‘광야의 중요한 측면, 무엇이 광야이고, 무엇이 광야가 아닌지, 그리고 광야의 목적과 유익’에 대해 다루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감동 그 자체이다!

 

 

 

 

 

 

2

구약성경에 등장한 욥은 자신이 처한 딜레마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기 23장 8-9절

 

백만장자, 억만장자라고 볼 수 있는 욥이 하루 아침에 자신의 사랑하는 열명의 자녀들이 죽고, 가문이 풍지박산이 나고 자신의 몸조차 거덜나게 된 상황에서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불평한다. 흔히 우리를 압도하는 아픔과 상처와 고통에 우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욥은 버틴다. 불가사의한 믿음으로 버틴다.

 

 

 

 

 

 

3

욥에게 불어닥친 모든 환난은 신의 不在나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광야는 거부가 아닌 준비된 장소>라고 말한다. 광야는 형벌과 심판의 결과가 아니다. 광야는 말 그대로 ‘준비된 장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깨서 거기로 부르셨다. 사람들은 광야에 머무르면 일단 ‘탈출’하고 싶어한다. 절망과 고통의 현장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광야는 탈출이 아니라 하나님께선 거기서 거주하고 머물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거기서 찾아야 할 것은 더 나은 미래, 파랑새의 꿈, 성공의 신화, 신데렐라의 환상, 슈퍼스타의 드림dream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다. 욥은 그걸 찾았다.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메마름과 황폐함을 평온하게 견뎌내는 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이 달콤한 임재로 우리를 방문해 주시는 것은 곧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잔느 귀용

 

 

 

 

 

4

광야는 인생의 선배, 믿음의 선배들이 다 거쳤던 곳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터널이다. 성경에서 욥, 모세, 요셉, 다윗 왕, 세례요한, 사도바울, 그리고 밧모섬의 사도 요한...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의 광야를 거쳐 갔다. 이 말은 광야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준비된 장소’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그리고

 

 

‘광야의 가장 멋진 점은 하나님이 자신을 새롭게 나타내시는 곳이라는 점이다’(43p).

 

 

광야는 지치고 헐벗고 굶주리고 열악하고 불편하고 진절머리 나는 곳이지만, 광야가 황홀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스펙트럼을 배우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광야에 떨어졌다고 해서 무신론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신이 죽었다거나, 하나님이 외출중이거나 하나님이 주무시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나는 이 구절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 구절이 있는 텍스트의 맥락에 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점이 흥미롭다. 13:5의 전반부 구절을 보면,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이 나오고 ‘내가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나온다는 점이다. 나는 이 부분을 첨 대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떨어지면, 돈이 소진되거나 은행잔고가 부족하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현실은 변하지 않는데, 감정적으로 다운 다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도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신다. 그게 신앙의 강점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광야’에 대해 너무나 많은 이야기와 설교를 들어왔지만, 정작 ‘Mr.광야’를 만나면 당혹스러워하고 어쩔 줄 몰라한다.

 

     

 

 

5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시편 139:8)

 

대학 시절, 한때 신앙의 위기가 찾아왔었다. 써클 선배 중에 학교 수업도 빠지고 여행을 다니는 선배와 만났다. 신앙의 방랑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철학적인 질문을 하면서 방황하였던 것이다. 나도 부러웠다. 여행다니면서 존재론적, 실존주의적 질문들을 하는 것이 너무나 멋스러웠다. 신앙인의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은 언제나 한 번씩 신앙의 탈선과 반기독교, 비기독교적 노선과 동선을 훔쳐본다. 거기에 뭔가 대단한 게 있는 듯 싶어서 말이다. 모든 것은 자기 선택이다. 그때 내가 참 마음에 다가왔던 CCM 찬양이 있는데, 그것은 시편 119편을 가사로 만든 곡이다.

 

 

‘내가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스올은 지옥, 하데스와 같은 곳이다. 내가 지옥의 저편, 죽음의 골짜기를 지난다 해도, 신의 부재와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는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조차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것! 그래서 나는 노래를 좋아하고 찬양을 좋아한다. 

 

 

 

광야에서 해야 할 일은?

‘지금 뭔가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는 안다면 노래가 나온다.

 

 

    

 

 

6

문득 예수님을 생각해보았다.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바로 광야,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말씀이 육신이 되는’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것에 육적인 것이 섟이는 이 참담한 오류를 인정할 수가 없었지만, 성경은 그것을 예수님을 통해 보여줬다.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7

우리는 자주 기복(祈福)신앙의 노예가 되곤 한다.

 

‘하나님이 <주시거나 해 주실 수 있는> 것 때문에 그분을 찾는 것과, <그분 자체를 찾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60p)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이 아닌 하나님 ‘마음’을 구해야 한다. 

그것을 배우는 시간과 장소가 바로 광야이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마음과 인격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급만을 바라는 천박한 기복주의와 샤머니즘적인 종교로 전락하여서 사달이 난 것이다. 광야는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정화되고 준비되어가는 곳이다.

 

 

 

 

8

내적 삶이 바로 서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저절로 해결되는지 모른다.

-A.W.토저(Tozer)

 

 

 

 

 

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더 깊은 친밀감과 따뜻함의 관계, 교제의 관계를 원하신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한다. 요즈음 저마다 SNS 왕국과 제국을 꿈꾼다. 허세와 인기를 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존 비비어는 부부의 예를 들면서, 남편이 아내를 ‘아이를 낳아주는 사람’으로만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말하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에서 종종 이런 잘못된 복음, 비루한 제스처가 등장한다는 것을 꼬집는다.

 

 

“네가 내 계명을 지키면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증명된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이미 알고 있다. 내 말의 뜻은 나와 사랑에 빠지면 내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76p)

 

 

 

 

10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는 6개월을 사역하기 위해 30년을 준비하고 죽었다(순교했다). 그는 등 따시고 배부른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광야, 그것도 빈 들에서 사역했고, 금식과 고행과 낙타털옷과 벌꿀을 먹으면서 수도자처럼 살다가 참 세상 재미없이 살다가 죽은 인생이다. 그는 6개월 반짝 사역하고 30년 준비하고 죽었다.

 

 

아, 정말 얼마나 허망한가!

그런데, 문득 우리의 인생의 길이에서 사용되는 아라비아 숫자도 역시 숫자놀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 잖아요 라고 하면서 아이들의 성적의 숫자에 관여치 않겠다고 자주 다짐한다. 물론 잘 안 된다. SNS의 조회수, 좋아요 수, 유튜브의 시청시간, 할인율, 연봉, 사람모인 數, 수수수...모든 것이 숫자놀음이다.

 

 

 

 

11

사람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오래 살면 좋지만, 그 인생의 길이도 인간적인 패러다임이라는 생각. 하나님께서도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세상에서 제일 큰 자’라고 찬사를 보냈던 세례요한의 수명도 좀 길게 늘여 놓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단명했다.

    

 

 

최근에 읽은 『그 바보청년 의사』의 주인공, 안수현은 33년을 짧게 살다가 죽었다. 그가 죽은 이유는 잔디밭에 앉아서 봉변을 당한 것이다. 유행성 출혈이란다. 의사로서 수많은 환자들과 아픔을 당한 자들에게 책과 음반과 수고와 따뜻한 마음을 선물했던 그가 ‘유행성 출혈’로 들것에 실려 올 때 사람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더 충격인 것은 그가 살아나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그의 생애는 너무 허망한 인생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작품을 인정받기 위해 안달한다. 하지만 심원한 감동은 완벽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연약함 가운데 삶의 아름다움을 잔잔히 보여주는 이들에게서 넉넉히 흘러나오지 않는가. 비움 가운데 더 큰 채움의 은혜가 임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느 한 명 똑같은 사람이 없는 독특한 인격으로 창조하신 데는 각자에게 맡겨진 삶의 노래를 온몸으로 연주해보라는 뜻이 있다. 그것은 서로 누가 더 나은가를 가리는 경쟁의 문제가 아니다. 각 사람만이 고유하게 낼 수 있는 그 아름다운 소리, 그 숨겨진 멜로디를 누가 들려줄 것인가의 문제이다. 삶의 거창하지 않아도, 섬기는 일이 주목받지 않아도 된다. 너무 웅장한 곡은 쉬이 피곤해지기도 하는 법이다. 찬양 곡의 가사 한 구절이 이런 생각을 잘 요약해준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 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故 안수현의 에세이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만의 영역에서 ‘슈퍼스타’를 꿈꾼다. 대박이 나면 좋겠다. 하지만, 인격과 바탕이 되지 않는 슈퍼스타는 결국 허망하게 허물어져 내린다. 근래의 연예계의 소식들은 그러한 세태를 반영해준다. 안수현은 인생 자체가 광야였고 결말도 광야였지만, 사람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에서 과연 어떤 평가와 결론을 내리실까!

 

 

 

<꿈이 있는 자유 3집-아침묵상>이다.

 '소원'이 수록되어 있고, 내가 한때 애청했던 음반이다.

특별히 짧은 곡인 '아침묵상'이란 곡도 참 좋다.

 

 

 

 

12

세례요한은 30년을 준비하고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사역을 시작해 예수님과 바통 터치를 한 후 순교했다. 죽었다. 세례요한은 과연 낭비하는 인생이었는가! 세상의 시각에서 그렇게 생각한다. 세례 요한이나, 故 안수현 이나.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선 시간 낭비를 하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광야라고 해서, 뺑뺑이 치는 광야라고 해서 시간 낭비가 아닌 것을 기억해야 한다.

 

 

존 비비어의 나이는 이제 60대이다. 나는 처음에 그의 프로필을 읽으면서 ‘79년에 출생했으면 나보다 훨씬 젊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한 베스트셀러작가가 되었네! 인생은 참 불공평해! 나보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라고 내심 부러워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79년에 대학생이었다는! 허허허....참 나도 무심하게 읽는다 싶다. 어쩔! 작가가 인생의 여정들을 뒤돌아보면서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결국 그 분의 마스터플랜에서 맞춰 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경험을 실어 말해주는데, 감동적이다.

 

 

 

 

13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권위’로, ‘자신의 파워와 에너지와 힘과 능력과 감각으로’승부를 내고자 한다. 그게 세속의 원리이고 법칙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질서는 ‘하나님의 권위로’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것, 그것을 훈련시키는 곳이 바로 <광야>라는 사실이다.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당시 최고의 잘 나가는 이집트 왕족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지만, 

 

하나님께서는 40년을 <광야에서>에서 ‘굽게’(to dealy) 하셨다. 광야가 하는 일이 바로 ‘굽는 일’이다. 새로운 모세가 탄생한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은 세상의 숫자의 스펙트럼에 갇히지 않는다. 광야의 본질은 ‘준비’이다. 광야는 새 포도주로의 변화를 위해 준비시키는 곳이다.

 

 

 

 

14

이사야는 이렇게 약속했다.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9)

 

 

도시나 광장이 아니라 ‘광야’이고 ‘사막’이다. 거기에 ‘길과 강’을 내신다 했다. 광야의 시온의 대로가 놓인다. 그 대로는 그냥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풀무불’을 통해서 놓여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길은 ‘거룩한 길’로 놓여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광야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재난과 아픔과 더 깊게는 자신의 ‘쓴 뿌리’나 파괴적인 성향과 옛 자아를 만나게 된다. 거기서 우리는 내면의 영적 쓰레기들을 마주치게 된다. 이를테면, 분노 같은 것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내가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분노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보면서 내가 스스로 충격을 받는다. 거기서 우린 ‘감정의 광야, 분노의 광야’를 대면하게 된다. 저자는 그것을 또한 ‘영적 이스마엘’에 비유한다.

 

 

 

 

15

헬쓰 클럽에서 바벨을 들어본 사람들은 근육이 어떻게 팽창하는지 알 것이다. 저자는 헬쓰 클럽에서 다니면서 바벨을 65kg도 겨우 들었던 그가 100, 130, 150kg까지 들게 되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영적 근육을 키우는 곳이 바로 영적 헬쓰클럽, 바로 광야라고 아주 흥미롭게 전한다. 근육의 힘을 키우면 물건 드는 것, 힘을 쓰는 것은 쉽다. 근육량이 그만큼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광야의 시험은 우리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인데, 우리는 늘 뺑뺑이만 돌고 있다....

 

 

 

 

16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느 8:10)”

 

광야의 본질은 바로 이것을 제대로 재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쁨은 우리를 강화시키는 영적인 힘이다(190p). 저자는 광야에서 생수의 강되신 성령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 생수는 여러 가지의 강들(복수)이며, 이것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길러내야(to draw) 한다’고 강조한다. 답답함과 갑갑함의 벽과 같은 현실 앞에서도 계속해서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힘이란 사실을 계속 주지하며 영적 싸움의 기도를 계속하라고 촉구한다. 새포도주의 변화된 생수는 맛보기 위해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

 

 

‘하나님은 언제나 시간을 최적으로 사용하시는 분이다(218p).’

 

 

 

 

17

예정(predestination)이란 말은 접두사 pre는 단순히 ‘이전’ 혹은 ‘시작 전’을 뜻하고, 어근 destination은 ‘목적지’나 ‘결승선’을 뜻한다. 이제 둘을 합치면 ‘출발 전에 결승선을 정하는 것’이란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에베소서 1장 11절은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기 전에 인류를 향한 목적 혹은 목적지를 정하셨다는 뜻이다(230p).’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무엇인가? ‘출발 전에 결승선을 정한 그 무엇’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친밀함의 교제’이다. 이 관계가 바탕이 되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용기의 반대말은 두려움이 아니라, 낙심'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18

광야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광야는 ‘여호와를 기뻐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광야의 본질은 <준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받은 통찰과 감동이 너무나 크다.

나의 광야 시간에 받을 은혜를 기대한다.

존 비비어 저자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읽으면서 눈시울이 자주 붉어졌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나의 광야 여행이 끝났기 때문에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것을 모두 얻지도 못했다. 하지만 당신이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운명을 향해 꿋꿋이 나아갈 힘과 용기를 얻기를 간절히 원한다.-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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