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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중섭의 비극미

탐독: 탐서/Book Review

by 카알KaRL21 2021. 5. 9. 13:02

본문

1

소의 말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이 시는 1951년 봄 피난지이던 제주도 서귀포 이중섭의 방에 붙어 있던 것을 조카 이영진 씨가 암송하여 전한 것이다.

 

   

 

 

2

이산가족처럼 한국과 일본에 각각 떨어져 생활했던 이중섭과 그의 아내 남덕, 그리고 두 아들이었다. 이남덕은 이중섭의 제작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통운 회사 사무장으로 일하던 오산고등보통학교 후배 마 씨를 통해 일본 서적을 한국에 보내는 일을 했다. 일본 서적을 외상으로 구입해 한국에 보내고 이를 팔아서 생긴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마 씨가 약속을 어기고 횡령을 하는 바람에 27만 엔의 빚을 지게 되었다. 후에 8만 엔은 받았지만 나머지는 끝내 받지 못했다. 당시 27만 엔이면 2,3인 가족의 일년 생활비에 해당되는 큰 액수였다. 이남덕은 이 돈을 갚기 위해 바느질, 뜨개질 등을 닥치는 대로 하다가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20p).

 

 

    

 

 

3

이중섭의 민속적이면서도 민족적인 화풍은 독보적이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소>그림 하면 이중섭을 떠올리곤 했다. 아이들의 동화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주다가 이중섭의 전기를 읽어주는데,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슬퍼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냅다 챙겨 읽었다.

 

 

 

 

4

이중섭은 1916년 9월 16일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지주, 어머니는 평안의 민족 자본가 집안이었기에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자랐다. 비록 5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어릴 적부터 후에 화가가 된 김병기와 함께 화구, 미술 서적들을 구경하고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무덤 유적 안에서 잠도 자고 운동과 그림그리기에 몰두했다.

 

1931년, 평북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다닐 시절에는 미술부가 되어 미술부 교사였던 유화가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특히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 정책에 반발하여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렸다. 이후에 그림에 한글로만 서명하기로 실천했고 소를 즐겨 그리기 시작했다.

 

1934년, 일본 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학교를 재건하고자 하는 의도로 친구들과 함께 교사에 불을 질렀다. 졸업 기념 사진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사진첩 제작이 취소되었다.

 

1938년, 22살이었던 이중섭은 3년 전에 일본으로 건너와 도쿄 데이코쿠미술학교에서 입학했었고,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화가들이 설립한 미술전람회에 응모하여 상과 평론가들의 호평을 얻었다. 이즘에 후배인 일본 여성 마사코(이남덕)을 알게 되어 사귀게 되었다.

 

1945년, 4월 마사코와 천신만고 끝에 홀로 현해탄을 건너 원산으로 와서 5월에 결혼한다. 마사코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지만, 시대의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이중섭은 아내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친일파는 딱지가 자주 따라붙었다.

 

 

 

 

1947년, 큰 아들 태현이 태어나고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란 작품은 소련 평론가 나탐의 극찬을 받았다.

 

1948년, 아들 태성이 태어났다. 하루종일 소를 관찰하다 소 주인에게 도둑으로 몰려 고발당하기도 했다. 천재는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소그림의 깊이와 힘은 오랫동안 담금질된 그의 관찰의 힘과 사색의 그릇에서 나온 것이리라.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형 이중석이 행방불명되었다.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회장이 된다. 12월 초 중국군의 개입으로 가족을 데리고, 조카 영진이까지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하여 범일동 창고에서 생활하며 부두에서 하역하는 일에 잠시 종사한다.

 

1951년, 연초에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건너간다. 수일을 걸어 제주도에 도착했는데, <피난민과 첫눈>은 이 때의 체험을 그린 것이다.

 

1952년, 곤란이 계속되어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곧 일본의 친정으로 떠났으며,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 편지가 시작되었다. 이 책에는 이중섭의 수많은 그림들이 게재되어 있다. 너무나 가난하여 종이값이 없어 담배은박지 등과 같이 재료를 가리고 않고 그림을 그렸던 천재 이중섭이었다.

 

1953년, 앞에서 이야기한 사기사건으로 인해 큰 손해를 본다. 또한 일본에 밀항했다가 체포된 이중섭의 친구가 부인에게 보증금과 여비를 빌리고는 돌려주지 않아 또한 막대한 빚을 지게 된다. 7월 말 오래 애쓴 끝에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으로 갔다가 일주일만에 돌아온다.

 

1954년,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서 부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개인전을 개최하려고 계획, 6월 <달과 까마귀>외 2점을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다.

 

1955년, 1월에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 유화 41점, 연필화 1점, 은종이 그림을 비롯한 소묘 10점을 전시했다.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종이 그림이 춘화라는 이유로 철거되고 그림 값을 떼이기도 했으며 저녁마다 술로 지내다 빈털터리가 되어 자학과 기진맥진에 빠졌다. 구상의 권유로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내려와 여관방에서 전전하면서 5월에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회에 출품된 은종이 그림 세 점은 뉴욕 현대 미술관에 기증하기도 해다. 그러나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았으며, 그의 가난은 해결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실망과 분노에 영양부족까지 겹쳤다. 극도로 쇠약해져 정신분열 증세까지 보였다. 대구의 병원에 입원, 이종사촌의 집에 머물다 수도육군병원 정신과에 입원했다. 후에 성베드로병원으로 옮겨서 늦가을에 퇴원하여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살기 시작했다. 이때 황달이 극심해졌다.

 

 

이중섭의 은지화

 

 

5

1956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다시 음식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봄에 청량리 뇌병원에 입원후 정신이상이 아니라고 진단받고 퇴원했으나 곧 극심한 간염으로 다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 입원한 지 한달 후인 9월 6일 홀로 숨을 거두었다. 3일 뒤 이 사실을 안 친구들이 장례를 치르고 화장된 뼈의 일부는 망우리 공동 묘지에, 다른 일부는 일본의 부인 남덕에게 전해져 그집 뜰에 모셔졌다. 부인 이남덕과 태현과 태성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이 책에선 부인과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묶어 놓았는데, 이중섭이 아내를 향한 애틋하고도 깊은 사랑이 전해져온다. 그런 부부가 그렇게 생이별하며 한평생을 살다가 죽었다.

        

 

 

 

6

당시 시대가 시대인지라, 이중섭은 예술가로서의 길, 생활인(가장)으로서의 길, 그리고 또 하나 한국인으로서 길에 대해 깊이 갈등한 듯하다. ‘유화. 수채화. 크로키. 데생. 에스키스 등 약 200점, 은종이 그림 약 300점이 이 남한 땅에도 남아 현대 미술가, 아니 전체 예술가 중에서도 가장 민중에게 사랑받는 이중섭의 세계를 이루고 있(233p)’이었지만, 현실에선 기약할 수 없는 유리걸식과도 같은 생활, 자기 그림의 완성에 대한 불타는 예술혼, 초조, 불안이 항상 그를 괴롭혔다. 결국 그래서 택한 것이 귀화선으로 일본에 가 있는 처자들 곁에 가는 것이었다.

 

 

 

 

7

“내 그림 좀 그려올게. 내가 보고 겪은 대로 이 피눈물 나는 우리 고장의 소재를 가지고 말이야! 동경 가서 그려올게. 큰 캔버스에다 마음껏 물감을 바리고 문질러서 그림다운 그림을 그려올게. 상(常)! 내가 남덕(마사코)이 보고 싶어서 가려는 줄 오해마! 내 방 하나 따로 구해 놓으라고 편지했어! 임자 알았음마?”(233p)

 

 

 

 

8

이중섭에겐 아내와 자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렬했을까! 그의 그림을 보더라도 아이들에게 그려주는 그림에 드러난 가족의 풍경에서 애잔하게 느낄 수 있다. 일본으로 가고자 했던 마지막 일루의 희망이 좌절되자, 그의 심신의 증상이 이렇게 나타났다.

 

 

“나는 세상을 속였어! 그림을 그린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놀고 다니며 훗날 무엇이 될 것처럼 말이야.”

“남들은 세상과 자기를 위하여 저렇듯 열심히 봉사하고 바쁘게 돌아가는데 나는 그림만 신주 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며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동경에 그림 그리러 간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남덕이와 애들이 보고 싶어서 그랬지.”(235p)

 

 

    

 

 

9

“상常! 아니야. 일본의 산은 너무 숲이 빽빽해서 답답하고 나무들은 너무 하늘 높이 솟아서 인정미가 안 가! 우리 산들이 좋아! 더러 벌거벗은 데 꾸부정한 나무들이 목욕탕에서 만나는 사람들처럼 친근감이 들어.”

 

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무심한 말에 당장은 일종의 예술가의 정취로 여겼으나 씹을수록 그다운 국토애가 가슴에 온다. 실상 그의 그림처럼 보편적인 예술에다 한국적인 풍토성을 짙게 갖춘 작품을 나는 모른다(240p).

 

 

 

 

10

괴테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했다. 비범하지만 너무나 고통스럽게 살다가 떠난 화가 이중섭의 인생을 보고서 마음이 서늘해지고 애잔해진다. 문득 과거에 보았던 영화, 화가 장승업의 생애를 그린 <취화선>과 화가 잭슨 폴락의 <폴락>이 생각이 난다. 생의 비극이 그들의 예술을 더 깊게 만들었구나...!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예술적인 것이다"-괴테

 


 

-최민식이 주연한, 장승업의 생애를 다룬 영화 <취화선>

 


 

 

-잭슨 폴락이란 화가에 대해 알게 된 영화 <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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