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다들 알 것이다. 『햄릿』, 『리어왕』, 『오델로』, 『맥베스』이다. 나는 이것을 항상 기억하지 못해, 『로미오와 쥴리엣』을 삽입하여 기억하곤 했다. 로미오와 쥴리엣도 비극적이지 않은가!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오인하여 동반자살하는 비극도 대단하지 않은가! 아마도 이것은 내가 몇 번 해보지 않은 연극 중에 『로미오와 쥴리엣』이 들어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주무대였던 교회가 아닌 대학의 단과대 발표공연으로 했다는 것은 내 인생에 있어 좋은 추억이 되었다. 당시에 영어로 대사를 치면 옆 스크린에서 한글자막을 띄워주는 굉장히 불편한 구도였다. 그땐 기술이 그렇게밖에 안 되었다. 연극이나 영화를 관람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 요즘은 어떻게 번역된 자막을 보여주는지 모르겠다.
비극하면 보편적으로 세익스피어의 비극을 떠올릴 수 있는데, 오늘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페이퍼를 한번 시작해보고자 한다. 소포클레스는 당시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중의 한 사람이다. 소포클레스는 무기 제조업자인 소필로스의 아들로 기원전 497년에 출생해서 부유한 가정, 좋은 교육, 빼어난 용모까지 갖춰 인기의 대상이 되었다. 15세에는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기리는 찬신가를 선창했을 만큼 시인으로 두각을 보였고, 초기에는 배우로도 활동했다. 28세에는 디오니소스 대제전에서 열리는 비극 경연대회에서 앞에서 업급한 비극작가들을 제치고 우승을 거머쥐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포클레스는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로 불린다. 금수저에 속한 소포클레스에게 문학적인 감수성과 능력까지 겸비하다니! 근데 그리스는 좀 의외인 것은 비극경연대회라니? 하지만 어떻게 보면 요즘 문학이나 시, 소설 대회처럼 그렇게 열릴 수도 있겠다 싶다. 고대 그리스는 인문학이 꽃피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책을 읽고 난 후 이 소포클레스가 가진 인간과 인생에 대한 통찰과 식견이 탁월하다 싶다. 어떻게 이런 혜안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감탄을 금치 못했다.
1
오늘 페이퍼의 주제를 보더라도, 소포클레스를 읽어본 이들은 대략 짐작을 할 것이다. 내가 읽은 『소포클레스』(별글클래식)에는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엘렉트라> 만을 담고 있다. 소포클레스가 어떤 작가인지를 알 수 있는 선별된 작품인 듯 싶다. 별글클래식에서 나온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모사이트에서 전집으로 저렴하게 고전을 구입할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영향력이 있고 이름있는 출판사의 저작을 읽는 것이 좋은데, 이미 사버려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2
인간의 비극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며 시작되는가?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선친인 라이오스 왕을 죽인 살인자를 찾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이디푸스 왕은 예언자인 테이레시아스에게 집요하게 묻는다. 하지만, 테이레시아스는 극구 거절하다가 오이디푸스가 ‘네 놈의 손만 보고도 살인을 저질렀다’(26p)는 대구에 결국은 입을 뗀다. 그가 왕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그대가 바로 우리 도시를 더립힌 죄를 지은 자입니다.
왕 자신이 바로 당신이 찾는 살인자란 말입니다...
왕이신 당신께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더불어 치욕으로 얼룩진 끔찍한 인생을 살고 있음을 당신이 모른다는 겁니다.”(27p)
예언자는 더 중요한 대사를 날린다.
“당신의 적은 크레온(왕비 이오카스타의 남동생, 오이디푸스의 처남격)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28p)
예언자는 ‘저 자신이 친자식들에게 아버지이자 형제요, 자신을 낳은 어머니의 남편으로 제 아버지 대신 들어앉은 자이며, 게다가 아버지를 죽인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말입니다’(32p) 라고 이야기하면서 오이디푸스 왕의 모든 비밀을 폭로한다.
3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그 진원지를 만난 셈이다. 네이버사전에는‘아들이 어머니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에 근거한 생각ㆍ원망ㆍ감정의 복합체. 아버지에게 반감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길 한다. 심리학의 근거가 되는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을 살인자로 모든 것에 격분하지만, 그 실체를 마주치게 되었을 때, ‘아, 이럴수가! 그렇다면 내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 자신에게 잔혹한 저주를 퍼부은 꼴이 된 거란 말인가?’(46p)라고 한다. 그는 실제 선왕을 죽인 범죄자에게 대해 엄청난 저주를 했던 것이다. 무수한 비극의 주인공처럼, 오이디푸스 왕은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한다.
‘내가 내 손으로 죽인 자의 침대를 더럽히다니!
말해보시오, 내가 사악한 인간이오?
내가 그렇게도 부도덕한 인간이오?’(50p)
4
자신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타는 ‘아, 당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라도 되잖아오!’(62p)라고 대구하지만, 오이디푸스는 결국 비밀 속에 감춰진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이러한 진실이 드러나자 이오카스타마저 목숨을 달리한다.
‘그 일로 당신은 죽임을 당하고, 나는 제 자식의 자식을 낳은 저주받은 어미가 되었소이다’(72p)
그녀가 죽어가면서 남긴 말이다.
오이디푸스는 왕비의 목매단 밧줄을 끌어 내리고 왕비의 드레스에 달린 금 브로치를 뜯어 그 날카로운 끝으로 자신의 눈을 찌른다. 자신의 겪은 고통과 자신이 저지른 죄를 다시는 육안으로 봐서는 안 된다며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작가 소포클레스는 어떻게 이런 구도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일까!
‘그랬다면 이곳으로 와서 내 아버지를 죽이지도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날 낳은 그녀의 남편으로 불리지도 않았을 텐데. 이제 나는 신의 적이오. 날 낳은 그녀가 또 나의 자식을 낳게 한 죄의 자식이다. 악을 능가하는 악이 있다면, 그게 바로 오이디푸스다’(77p)
5
오이디푸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탓에 결국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출생의 비밀을 안고, 결혼의 비밀을 안고, 가족의 비밀을 껴안고 살았던 가족의 비극적인 결말은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의 실날 같은 희망인 딸(딸이기도 하지만, 동생이기도 한)들과 함께 있는 조차도 거절당한다. 결국 왕권도 잃게 된다.
6
오이디푸스 왕의 뒤를 이어 처남이자 삼촌격인 크레온이 왕이 되지만, 크레온에게도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 이야기는 『안티코네』에 등장한다.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왕이 되면 오만은 어쩌면 저절로 따라오는 것일까? 크레온은 오이디푸스 왕의 처참한 결말을 옆에서 지켜본 증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딸 안티코네의 청을 들어주지 않음으로 비극을 또 자초한다. 『안티코네』의 이야기는 대충 그러하다.
7
인간의 비극의 출발점은 과연 어디인가? 나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 구약성경 잠언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 23)
Above all else, guard your heart, for it is the wellspring of life.(NIV)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해주고 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네 마음을 지켜라.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다.’(Message)
마음은 생명의 근원, 생명의 원천이다. 반대로 그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죽음, 멸망, 파멸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마음은 어떠했는가? 사람의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이 말로 표해지고, 말은 행동으로 드러나며, 그 행동은 상황과 환경의 결과를 초래한다. 오이디푸스 왕이 선친을 살해하고 어떻게 왕비와 결혼을 했는지,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그런 과정들은 모두 생략한 채 작가는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고 있다. 오이디푸스 왕이 선친을 살해한 그 장면, 선친의 살해범을 추적하는 장면,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결과로 인해 벌어지는 모든 비극적인 장면들...모두가 한 사람의 마음에서 출발되어진 것이다. 라이오스 왕과 무리들을 완력으로 아주 쉽게 해치웠던 오이디푸스!
8
<마음>에 대한 이야길 하니 지금 읽고 있는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대변동』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80대의 지성인인 저자는 이 책에서 개인의 위기에 대한 이야길 하면서 국가의 위기를 다룬다. 개인의 위기는 짧게 언급하고, 6개의 국가, 이를테면 핀란드, 일본, 칠레, 인도네시아, 독일,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이야길 흥미롭게 다룬다. 그는 이 6개의 국가에 대한 남다른 정보와 식견, 그리고 무엇보다 두 발로 머물고 거주했던 경험들을 토대로 생생하게 적어주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어떻게 ‘개인의 위기’란 주제와 ‘국가의 위기’란 주제를 연결시키면서 글을 쓸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거장이란 말이다. 국가의 위기에 대해 운운한다고 해서 책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 책을 보고 연구한 순전한 연구물이 아니라 그가 각 나라에서 생생한 체험과 인터뷰와 이야기들, 그리고 엄청난 저작물들을 토대로 글을 적어갔기에 흥미진진하다. 저자는 자신의 젊을 때의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지성인이었고, 그런 피가 저자에게 흘렀다. 그는 실험생리학 박사학위를 위해 열심히 실험을 하였지만, 자신이 준비한 쓸개 연구에 성공하지 못했다. 1959년을 그는 ‘개인의 위기’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진로가 이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1959년 6월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제1회 국제 생물리학회에 참석한 후 내 사기는 더욱 꺾였다. 세계 전역에서 모여든 수백 명의 학자가 연구 논문을 발표했지만 나는 발표할 만한 성과가 없었다. 굴욕감을 느꼈다. 학창 시절에는 1등을 도맡아 하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당시 나는 보잘 것 없는 무명 학자였다.
그때부터 나는 과학자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철학적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가 쓴 유명한 책 『월든』을 읽고 또 읽었다. 그 책이 순전히 나를 위해 남긴 듯한 메시지에 전율감마저 느꼈다. 과학을 추구하는 진정한 동기가 다른 과학자에게 인정받으려는 이기적인 이유냐는 꾸짖음이었다. 대부분의 과학자가 그런 동기를 품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소로는 그런 거창한 동기를 헛된 자만이라며 설득력 있게 일축해버렸다.
『월든』의 핵심 메시지는 <내가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남에게 인정받겠다는 허영심에 유혹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케임브리지에서 과학 연구를 계속해서 하느냐는 내 의혹은 더욱 깊어갔다.....생리학 연구에 성공하지 못한 실망감을 상쇄할 만큼 핀란드어 학습은 만족스럽고 성공적이었다.’(45-46p)
생리학에 대한 좌절감과 절망감이 그를 휘감았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흐르는 언어에 대한 관심과 재능(그는 그때만 해도 6개국어를 할 수 있었다)으로 ‘통역사’를 하면 어떨까 하는 터닝포인트turnning point를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부모님에게 하면 굉장한 파문은 예상되었다. 그 상황을 저자는 ‘개인의 위기’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위기는 아버지의 인내심 서린 조언으로 해결된다. ‘6개월만 더 연구해보고 결정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6개월 후, 1960년 봄, 그때 가서 포기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여하튼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은 성급히 내릴 필요가 없었다.’(47p)
아버지의 조언은 저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고 결국 그는 6개월 안에 그 쓸개 실험과 연구에서 테크놀로지적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해서 마친다. 만약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그때 쓸개연구에서 실패하고 생리학을 접고 다른 길로 들어섰다면, 우리는 지금은 거장, 제러드 다이아몬드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위기는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위기는 중국어로 ‘웨이-지’로 발음되며 crisis를 중국문자 危機에도 반영되어 있다. 웨이危는 ‘위험’을 뜻하고, 지機는 ‘중대한 시점, 임계점, 기회’를 뜻한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1844-1900)도 “우리를 죽이지 않는 것은 예의 없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재밌는 말로 비슷한 생각을 피력했다. 또 윈스턴 처칠(1874-1965)의 “좋은 위기를 헛되이 보내지 마라!”라는 경구도 마찬가지이다.‘(51p)
개인의 위기 또한 마음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상황도 환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지혜의 대가로 불리는 솔로몬이 지은 잠언에서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지 않는가! 마음이 황폐해지면, 삶도 황폐해진다.
9
작가 소포클레스는 이러한 오이디푸스 왕의 모습에서 그의 내면세계를 드러내주는 대목을 희곡의 코러스의 답송1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오만은 폭군을 낳는다. 부와 권력에 대한 오만이
극에 달해 지혜와 자제력도 힘을 잃는구나.
오만이 정점을 치닫고 나면,
인간은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네.
도망갈 곳도, 의지할 구석도 없도다.’(52-53p)
생명의 근원, 생명의 원천인 마음에서 오만의 쓴뿌리가 결국 오이디푸스 왕을 파멸로 치닫게 했다고 말한다. 부와 권력의 정점에 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왕관은 바로 ‘오만’이 아닐까! 욕망의 또 다른 얼굴은 바로 ‘오만’이다.
10
구약성경 속에 엘리야(Elijah)라는 한 예언자가 있다. 그는 원수들과의 전쟁에서 850 VS 1 이라는 엄청난 신(神)과 신(神)의 싸움에서 확실한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를 쟁취한다. 그러나 그 승리 이후에 그는 엄청난 고독감에 사로잡혀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갈구하였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열왕기상 19:4)’
그는 그만큼 고독하였고 예전의 승리감은 온데 간데 없다. 오직 혼자라는 그 치가 떨리는 외로움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그에겐 늘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지만, 그는 여전히 외로워했다. 성스러운 선지자란 작자가 자살을 꿈꾸다니. 그것도 화려한 승리 이후에 말이다.
왜 그러한가?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인 것이다. 성악설, 성선설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인간은 원래 그렇게 유약하고 연약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흔들리고 넘어지는 존재인 것이다.
11
대학시절에 비틀즈의 노래인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을 가지고 詩수업시간에 발표를 한 적이 있다. 좋아하는 시를 하나씩 골라 발표하고 토론하는 뭐 그런 시간이었더랬는데,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 앞장에 보면 비틀즈의 이 노래 가사가 나온다. 나는 그때 『상실의 시대』의 느낌과 비틀즈의 노래의 느낌, 그리고 가사에 대한 개인적인 감성을 덧붙여 해석했던 적이 있다.
12
그걸 잠깐 소개하자면, 이 작품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비틀즈의 노래)에서 <숲>은 두 가지의 의미와 이미지를 제공한다.
하나는 첫 번째 노르웨이의 숲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울창함'이라는 것이다. 숲속에 들어가 보면 그 숲이 주는 울창함과 거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울창함은 바로 남녀가 만나 사랑하면서 생기는 사랑의 울창함이다.
20대의 고등어의 푸른 빛깔같이 빛난 청춘 시절에, 난 4년이라는 세월 동안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집안 반대'로 헤어지게 되었다. 내 쪽에서는 그녀를 기다리지만, 잠시 그녀와의 관계가 뜸해진 틈에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나 양가 부모님이 인사를 드렸단다. 그녀를 비판만 할수도 없었다. 당시 여성의 결혼적령기에는 다들 그러한 모양새가 보편적이었다. 이런 현실적인 결과를 덮어두고서 난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도심지에서 살면서도 '나'와 '그녀'라는 둘만의 숲속에서 사랑과 동심(童心)과 위로와 친밀감과 기쁨과 환희와 열정을 맛보았다.
이것은 바로 '울창함'의 숲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노르웨이의 숲은 자기정체성(Self-identity)를 찾는 인생의 숲이다.
숲에 들어서면 울창함이 있는 반면에 그 속에 혼자 서 있노라면 그 울창함에 압도되어 인간은 '홀로됨'을 절실히 통감한다. 그것은 바로 '고독감(孤獨感)'이라는 것이다. 숲이 주는 그 공기, 기운, 정염, 열기 가운데서 느끼는 외로움, 고독감, 홀로됨... 이러한 것은 내가 '돌아서 버린 그녀'의 마음을 돌이켜보고자 나의 신(神)께 아뢰기 위해 기도원에 들어갔을 때 느꼈다. 중간고사를 마치고서 곧 바로 기도원에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에 여자친구의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다 편지를 써 지인을 통해 건네주었다. 그리고 난 거기서 일주일간의 금식기도를 결심하고 들어갔다. 결국 일주일은 못하고 10끼 금식을 하고 죽을 먹었다. 난 거기서 배고픔의 고통을 깊이 체험했다. 그러면서 그 굶주림의 고통과 내게서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날 아프게 한 그녀와의 헤어짐을 생각하면서 나의 하나님에게 울부짖으며 서럽게 울었고 통곡했다. 내가 당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경제활동을 뒤로하고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억지스러운 떼쓰기(?)같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참으로 '깊은 슬픔'이었다.
그 때 내 가슴에 깊숙이 지나가는 생각은 바로 '그녀의 마음을 다스릴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깐 그녀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보다도 내 마음을 먼저 소유하는 것이 더 절실한 것임을 통감했다. 하지만 깨달음이 있다고 해서 마음이 바로 후련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별은 언제나 강한 후유증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노르웨이의 숲'이 주는 두 번째 의미-고독감-이라는 것이다.
13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두 개의 노르웨이의 숲-울창함과 고독함-을 '줄타기'하면서 生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난 이 '노르웨이의 숲'을 보면서 나의 인생이 비록 지금은 고뇌하며 번뇌하며 힘들어하지만, 아직도 미성숙의 단계에 있지만 나의 정체성,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서정윤의 '홀로서기.5'
나 인간이기에
일어나는 시행착오에 대한 질책으로
어두운 지하심연에
영원히 홀로 있게 된대도
그 모두
나로 인함이기에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으리
내 사랑하는
내 삶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나 유황불에 타더라도
웃으려고 노력해야지
내가 있는 그 어디에도
내가 견디기엔 너무 벅찬데
나를 이토록 나약하게 만든 신의 또 다른 뜻은 무엇일까
-서정윤의 '홀로서기'와 노르웨이의 숲'의 홀로서기 1)
14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을 지나쳐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개인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와 나의 과거사를 이야기했다.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듯이 브로치의 끝으로 두 눈을 찔러버린 장면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 아프면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너무 힘들면 살아남는 것조차 벅찰 때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다.
상실의 마음을 추스리고, 욕망의 마음을 내려놓고, 홀로 당당히 서가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와 같은 비극사가 우리에겐 거의 없겠으나, 그래도 이 악물고 살아간다면 제러드 다이아몬드처럼, 추억담을 소재로 글을 적고, 나처럼 그때는 내가 죽을 것만 같았는데, 지금 이렇게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존버'라는 말을 좋아한다. 나는 이 '존버'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존zone버burrow라는 말로 해석했다. 영어를 한글로 잘 번역했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뜻은 경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졸라게 버티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영어 의미도 얼쑤 들어맞다. 인생에는 '존버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존버!
암튼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 노출하고 나서 후회하면 어떨까 싶다. 그래도 노출이다! 젠장~
15
비극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는가?
비극의 출발점은 바로 한 인간의 마음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인간의 마음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두 눈을 부릅뜨고 네 마음을 지켜라.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다.’(Message)
-주
1) 10번부터 <노르웨이의 숲>, <홀로서기>의 글은 필자가 20여년 전에 수업시간에 제출하여 발표한 paper임을 밝힌다.
위트 넘치는 이기호 우화집/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0) | 2021.05.11 |
---|---|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길 위의 인간 (2) | 2021.05.11 |
웹툰 추천 / 흙수저를 위한 나라는 없다 (0) | 2021.05.10 |
화가 이중섭의 비극미 (0) | 2021.05.09 |
그 탕자의 그 탕부 아버지 (2) | 2021.05.08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