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자 김민섭은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는 망원동에서 어린 시절을 거의 보냈다. 그런 추억과 경험, 그리고 그 망원동이란 공간을 사회학적인 시선으로 가볍게 적은 『아무튼, 망원동』이란 책도 나왔다. 북튜버 김겨울이 김민섭에 대한 이야길 하는 것을 귀동냥으로 들었다. 지방대 시간강사로 8년을 지내면서 그는 교수라는 목표를 향해 살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대학에서는 교수도 아니고 학생도 아닌, 어느 중간에 위치한 ‘경계인’에 불과했다고 기술한다.
2
4대 보험도 적용되지 않는 시간강사, 그는 결국 가정의 생계를 위해 투잡을 뛴다. 맥도날드 알바를 하면서, 그는 대학에서는 4대 보험도 적용되지 않는 시간강사지만, 맥도날드에선 알바도 4대 보험이 적용되는 것을 보고서 충격을 받는다.
“지식을 만드는 공간이 햄버거를 만드는 공간보다 사람을 더 위하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라는 문장은 맥도날드에서 1년 3개월 동안 일을 하고서 스스로 내린 결론이다.(17p)
‘사실 내가 받은 첫 명절 선물은 멸치가 이닌 <악수>와 <맥노날드 컵>이다. 대학보다도 택배물류센터와 맥도날드가 오히려 더 구성원들을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자로 대했다. 내가 아는 한, 대학은 가장 전근대적인 공간이다...’(199p)
3
저자는 결혼을 앞두고 대출을 받으러 은행엘 갔다. 은행에선 ‘재직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대학본부에 가니, 당신은 재직증명서 발급 대상자가 아니라고 해서 대신 ‘강의경력증명서’를 발급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은행담당자가 그걸 보더니 이게 무엇이냐고 웃었다. 담당자는 웃지만, 당사자는 서글픈 현실에 울고 싶었다고 한다. 저자는 대학의 ‘대리인간’일 뿐이었다고 고백한다.
명절연휴 기간에 택배물류 알바를 하면서 명절마다 그렇게 많은 선물들이 오가는 것을 보고서 또 충격을 받는다. 시간 강사하면서 제대로 된 선물 하나 받지 못한, 자신이 그토록 목 매달리며 지냈던 대학이란 곳을 가장 근대적이어야 할 공간이 가장 ‘전근대적’이란 말을 내뱉는다.
4
지방대학 시간강사에서 대리기사가 되었다. 저자는 대학의 ‘유령’과 같은 시간강사에서 달리는 ‘몸’으로 변신한 것이다. 대리기사의 신분으로 주인의 운전석에 앉으면서 그는 ‘몸은 행위가 통제하고 말이 통제되며 사유가 통제된다’는 고백을 한다. 그는 우리 사회가 <대리사회>라는 정확한 진단을 내놓는다.
우리 모두 스스로 주체라고 믿지만 실은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대리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4p).‘
5
‘타인의 운전석과 다름없는 <을의 공간>은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차의 주인과 대리기사와 같은 역설의 관계 역시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그 어디에서, 주체의 욕망은 쉽게도 타인을 잡아먹는다. 예컨대 의사결정권자는 언제나 자유롭게 회의 안건을 내고 소통하자고 하지만 그 누구도 화답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상상과 수용 가능한 범위가 제한되어 있음을 모두가 안다. 거기에서 벗어나거나 반론을 내기라도 하면 곧 눈총이 쏟아진다. 소통은 주체가 된 이들의 논리를 확인하고 강요하는 수단이 된 지 오래다. 부하직원은 직장 상사에게 아이디어를 내지 않고, 학생은 교사의 의도에서 벗어난 답을 제출하지 않는다. 아이 역시 부모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털어놓지 않는다.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부터 시작해 교사,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을의 공간>에서 순응하는 방법을 주로 배워왔다.
그렇게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 된다.’(35p)
6
『십팔사략』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 책에서도 강태공의 이야기가 나온다.
강태공은 우리에게 유명한 낚시꾼이다. 강태공은 젊은 날 집안 일은 돌보지 않고 오로지 책만 읽었다. 그가 공부에 몰입하는 동안 아내는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홍수가 왔지만, 책만 읽고 있는 강태공, 마당에 널어둔 곡식이 다 떠내려갔는데도 책만 보고 있는 남편 강태공을 보면서 아내는 강태공을 버린다. 떠난다. 강태공은 만류했지만, 아내는 더 이상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떠난다. 하지만, 강태공이 훗날 폭군 주왕을 몰아내고 공을 세워 제 나라의 제후가 되어 고향 땅을 밟았을 때, 낯익은 노파가 그 앞에 찾아왔다. 바로 자신의 옛 아내였다. 물동이를 가져와 물을 땅바닥에 들어부어놓고선 강태공은 유명한 말을 남긴다.
“쏟아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나는 이 이야기를 첨 대했을 때 강태공을 참아주지 못한 아내를 탓했다. 강태공의 입신양명 이후의 이 한 마디가 사이다 같은 발언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 과연 생활고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는 강태공에 대해 요즘 같으면 돌 맞을 짓은 분명하다. 저자는 『허생전』의 허생도 역시 “허생은 글 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남의 바느질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는 말을 언급한다.
7
많은 이들이 강태공의 아내를 ‘악처’로, 허생의 아내를 철없는 인물로 기억한다.
저자 김민섭은 시간강사를 하면서 생활고에 찌든 자신이 맥도날드 알바를 하다가 사회의 현실을 피부로 접하고 그는 결국 그 대학을 떠나면서 대리기사로 일을 하면서 글을 쓰는 노동자가 되었다. 그는 강태공이나 허생이 가정의 부부/가족을 함께 지고 가는 동반자의 관계가 아니라 남편이 아내를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대리 사회’의 풍조는 아이를 키울 때, 남편은 아내가, 아내는 남편이, 아니면 아이의 조부모(외조부모)에게 ‘대리질’(?)을 시킨다. <대리>라는 이 컨셉이 우리 사회의 특징임을 보여준다.
요즘 어느 시대 보다도 먹방, 먹거리가 인기소재로 텔레비전을 장식하고 있다. 일평생 동안 어쩌면 먹어보지도 못할 음식과 가보지도 못할 여행지와 풍경을 브라운과 액정화면을 통해 우리는 구경하면서 ‘대리만족’을 느낀다. 그 대리만족이 과연 우리의 보상심리를 해소시켜 주는가? 오히려 더 헛헛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닌지. 물론 그게 자본주의의 생리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는 이런 표현을 쓴다.
‘대리사회의 개인은 죄인이 된다’
8
‘대리사회’에서 나도, 너도, 우리도 ‘대리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는 모두가 한 사람의 대리운전 기사다. 자신이 그 차의 주인인 것처럼 도로를 질주한다. 하지만 조수석에는 이미 누군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시동을 걸기 이전부터 거기에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것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의 욕망은 내비게이션을 통해 끊임없이 전달되고 개인의 의지는 통제되고 검열된다. 차를 멈추고 운전석에 잠시 내려, 그렇게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어느 균열의 지점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액셀을 더 강하게 밟는 데만 힘을 쏟는다. 단속 카메라가 보이면 브레이크를 발고, 경로를 이탈했다는 경고음에 다시 도로로 올라오면서도, 자신이 주체라는 환상에 빠져 계속 운전대를 잡는다. 그렇게 대리사회의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이 된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대리인간에게 물러서지 않는 주체가 되기를 강요한다. ′주인 의식′을 가지라고 끊임없이 주문하는 가운데, 정작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을 주체로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봉쇄한다. 결국 개인은 주체로서 물러서는 법을 잊는다. 내가 그랬듯 밀려나고서야 자신이 어느 공간의 대리로서 살아왔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다. 밀려난 개인은 잉여나 패배자로 규정되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대리인간이 들어선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말하자면 우리 사회를 포위한 ′대리올리기′의 서사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누구도 가르쳐준 바 없지만, 결국 우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밀려나기는 쉽지만 스스로 물러서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간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고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그러고 나면 시스템의 균열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 균열의 확장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대리사회의 괴물과 마주할 수 있다. 그때부터는 <사유하는 주체>가 된다. 여전히 행동과 언어는 통제될지라도, 정의로움을 판단하고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
우리 모두는 경계에 있다. 다만, 한 걸음만 물러설 용기를 가지면 된다. 대리인간으로 밀려날 것인지, 스스로 물러서고 다시 나아오는 주체가 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251-252p)
9
그는 대학의 시간 강사의‘샌님’에서 대리기사의‘거리의 아재’로 변신하였다.
그는 이제 대리사회의 시스템 가운데 우리가 살지만 <사유하는 주체>로 살기를 부탁하는 듯 하다.
10
김민섭 작가는 이 글을 거리에서 썼다고 했다.
거리에서 태어난 글이라 더 생동감이 넘치는 듯 하다.
대리운전사의 경험담을 털어놓다가 후반부에 사회학적인 통찰을 담아내는 저자의 필력이 감칠맛 난다.
이 책도 읽고 싶다.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은밀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발화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 모두를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힌다. 자신의 차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프롤로그 중에서)- P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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