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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은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나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생을 보면서 그 작가에 대해서 깊은 애정과 위로를 건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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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별 어려움이 없이 살았던 인물이다. 대학에 들어가서 그는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부유하게 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한때는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열성적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첫 번째 죄책감, guilt는 바로 ‘부에 대한 부담감, 죄책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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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죄책감, guilt는 무엇이었는가? 다자이 오사무의 형이 국회의원을 나가야 하기에, 당시 보수 우익의 정권시절에 좌파사상에 심취해 있는 동생 다자이 오사무에게 너의 여성편력으로 인한 결혼도 인정해주고, 학비도 대줄 테니 의절하자는 내용이었다. 우익의 정치인으로 등장해야 하는데, 집안 핏줄에 좌익 사상을 가진 동생이 있다는 것을 정치무대에 나서는 형에는 굉장한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의 사상적인 견고함에 비해 생활력은 다소 약했나 보다. 다자이 오사무를 휘감고 있는 심약함은 작품 전반에 드러나고, 결국 그 심약함과 절박함은 자살로 이어진다. 그의 사상에 따라 자신을 투신했으면 그것으로 끝나면 좋았겠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일평생 부모님과 집안의 기대, 생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심적인 부담감이 굉장히 컸던 것을 볼 수 있다. 생가의 기대에 대한 죄책감이 두 번째 다자이 오사무의 guilt였다. 그는 심지어 대학을 졸업해야 할 시점에 좌익활동으로 인해 졸업을 하지 못한다는 것, 졸업을 하면 자신의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 이유로 인해 한 차례의 자살시도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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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죄책감, guilt는 21살 때 동반자살을 시도했던 다나베 아쓰미(당시 19살)와 같이 죽지 못했다는 현실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은 죽었지만,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데서 오는 좌절감과 자책감이 늘 그를 따라다녔다. 다나베 아쓰미의 가족의 시선,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향한 매몰찬 시선이 그를 평생 따라 다녔던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39세에 죽기까지 다섯 번째의 자살시도를 했다. 결국 다섯 번째 자살시도는 강물에 투신함으로 이뤄졌고, 마흔이 되기도 전에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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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문학의 목적, 자신의 일생의 목적은 ‘자기파멸’이었다. 자신을 향한 죄책감과 자책감의 덩어리가 그를 계속적으로 ‘자기파괴’로 몰고 간다. 그의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이 친구가 언젠가는 자살을 하겠구나’하는 생각을 들게끔 만들었다고 평론가는 이야기한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그는 자살이란 도구로 ‘자기파멸’의 마침표를 찍고 만다.
『인간실격』이 그의 최후의 작품은 아니지만, 그의 인생과 문학의 최종적인 결론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작가 다자이 오사무를 둘러싸고 있는 인생의 큰 무거운 짐, 죄책의 이 세 가지 무게감이 결국 그를 그렇게 떠나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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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문학작품, 작품, 텍스트를 읽는가?
우리는 문학작품이나 다양한 매체의 이야기들을 접한다. 그들의 인생의 라이프스토리나 삶들을 바라보면서, 텍스트 위에 놓여진 구체적인 디테일한 상처와 아픔과 고통과 불행과 절망을 보면서 독자는 위로받고 공감하며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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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경우에 공감하고 동감하며 위로받는가?
나보다 더 나은 사람, 더 대단한 사람을 만나서 위로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보다 더 못한 사람, 더 열악한 사람을 보면서 위로받고 공감받는 것이다. 당대의 일본의 문학의 분위기는 자살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평론가는 이야기한다.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했을 때 그의 비극적인 삶과 문학을 사람들이 보면서 혀를 차면서 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감하고 동감했던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생과 작품의 비극을 보면서 2차 세계대전후에 전쟁의 패배로 인한 전의를 상실하고 낙담한 일본의 젊은 세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신의 젊은 시대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다자이 오사무 덕분이었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그것은 바로 ‘고통이 고통을, 슬픔이 슬픔을 이해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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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유명한 문장을 기억하는가?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할 때 모든 사람이 너처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을 기억하렴’이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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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마지막 장면의 내용을 잠깐 인용해보고자 한다.
‘진정한 폐인...
아무래도 ‘폐인’이란 단어는 희극 명사인 것 같습니다. 잠들려고 먹은 것이 설사약이고, 게다가 그 설사약의 이름은 헤노모틴(더운물을 넣어 몸을 따뜻하게 하는 통)이라니,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136-138p)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
恥の多い生涯を送って来ました。 自分には、人間の生活というものが、見当つかないのです。
- 그의 대표작 <인간실격>의 본문 첫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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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을 향하여 ‘인간실격’이란 과도로 자신을 내리찍었나 보다. 그의 가슴에 수많은 상처와 생채기를 보면서, 그의 비극적인 인생과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고통이 고통을, 슬픔이 슬픔을 위로하고 이해하는’선물을 건네받는다.
비극이 주는 매력이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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