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페리는 1900년 6월 29일 리옹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1년 21살 때, 공군에 입대해서 조종사가 되었다. 1926년에는 라테코에르 항공사에 취직해 우편기를 몰았다. 이 비행의 경험을 그는 첫 장편소설 『남방우편기』(1929)로, 두 번째 장편소설은 바로 『야간비행』(1931년)을 발표했다. 29살과 31살에 발표한 이 ‘비행’을 소재로 한 소설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1944년(44세) 7월 31일에 실종되었다.
특별히 31살에 발표한 이 『야간비행』은 생텍쥐페리의 자신의 인생과도 너무나 닮아 있는 작품이다. 44살 되던 해 7월에 그는 마르세유 앞바다에서 실종되었다. 마치 자신의 삶을 예견이라도 하듯, 13년 전에 발표한 그의 작품 『야간비행』의 파비앵의 스토리와 닮았다.
“속도란 우리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다. 우리는 낮 동안 기차나 선박에 비해 앞섰던 것을 밤이면 다 까먹어버리기 때문이다.”(71p)
야간비행은 운송속도는 탁월하긴 하지만, 그 위험성 때문에 초창기에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러다가 차차 허용되었다. 이 소설이 나올 때만 해도 여전히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 바로 야간비행이었다. 왜냐하면 밤에는 뜻밖의 사건으로 가득한 항로에 항상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야간비행조종사에게 밤의 무시무시한 신비까지 더해졌다.
야간비행중의 파비앵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온 직원들이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때 결혼한 지 6주 밖에 되지 않은 그의 아내가 남편의 안전을 염려한 나머지 급히 사무실에 출현했다. 이에 대해서 작가는 이렇게 기술한다.
‘그는 개인적인 고뇌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 자체의 문제로 넘어가는 경계에 서 있었다. 리비에르의 앞에 나타난 것은 파비앵의 아내가 아니라 삶의 또 다른 의미였다.’(87p)
‘사랑한다는 것, 단지 사랑하기만 하는 것은 막다른 골목과 같다!’리비에르는 사랑하는 일보다 훨씬 더 막중한 의무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들을 영원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그는 어디서 그 문장을 읽었을까? “그대가 그대 자신 안에서 추구하는 것은 모두 죽어 없어진다.” 그는 고대 페루 잉카족의 태양신 사원을 생각했다...(88-89p)’
감독관 리비노와 소장 리비에르의 대화이다.
“이보게, 로비노, 인생에 해결책이란 없어. 앞으로 나아가는 힘뿐. 그 힘을 만들어내는 해결책은 뒤따라온다네.”(103p)
독자의 시선에 따라 주인공을 조종사 파비앵으로 볼 수도 있고, 소장 리비에르로 볼 수도 있다. 파비앵이 실종되고 난 후에도, 소장 리비에르는 야간비행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삶과 철학은 ‘앞으로 나아가는 힘뿐’이었다.
‘단 한번이라도 출발을 중단시켰다면, 야간비행의 명분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내일이면 그를 비난할 마음 약한 사람들을 앞질러 리비에르는 그날 밤에도 또 다른 승무원을 출발시켰다.
승리......패배.....이런 단어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생명은 이런 이미지들의 저 아래쪽에서 이미 새로운 이미지들을 준비하고 있다. 승리로 인해 어떤 민족은 약해지고, 패배로 인해 어떤 민족은 각성한다. 리비에르가 겪은 패배는 어쩌면 진정한 승리에 한발 다가서는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오로지 전진하는 사건만이 중요하다.......만 오천 킬로미터에 걸쳐 퍼져나가는 생명의 떨림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오르간의 노랫소리 같은 비행기 소리가 벌써 고조되고 있다....리비에르 대왕, 승리자 리비에르, 무거운 승리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120-121p)
43세의 생떽쥐페리는 『어린왕자』를 발표했다.
죽기 한 해 전의 일이다. 비행기 조종사의 일을 쉬고 있던 그가 다시 비행을 하고자 했지만 착륙이 미숙해 연령 초과 사유로 비행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다시 비행훈련을 받고 단 5회만 비행한다는 조건으로 알제의 2/33비행중대에 복귀한다. 그리고서 1944년 44세의 생떽쥐페리는 7월 31일 아침 8시 25분에 무장하지 않은 채 6시간동안 비행할 수 있는 연료만을 싣고 단독비행에 나선다. 지역의 상세지도제작을 위한 정찰 비행이었는데, 8시 30분에 마지막 무선 신호를 보냈다. 그의 비행기는 프로방스 해변으로부터 몇 백미터 떨어진 곳에 격추된 것으로 보였다. 시신을 전쟁 중이라 수색불가하여 실종자로 처리되었다. 그에겐 자식이 없었고, 막내 여동생 가브리엘이 유일한 혈육이었던 그녀에게 모든 작품의 상속권을 물려주게 된다.
1998년 마르세유의 어부들이 쳐놓은 그물에 생텍쥐페리의 신분 인식 팔찌가 걸려 올라왔다. 2000년 지중해 연안에서 생텍쥐페리가 탑승했던 정찰기의 잔해가 발견되었다. 2003년 정찰기 잔해가 추가 발견되고 인양되었다. 아.....
생텍쥐페리의 작품과 인생은 묘하게 비슷해서 다소 섬뜩한 느낌도 없지 않다. 끊임없이 삶을 향해 나아가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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